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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70화 (70/147)

70화

에슬린은 그간의 일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세 사람의 안색은 그야말로 천변만화했다.

벌겋게, 퍼렇게, 누렇게 물들다 종내에는 하얗게 질려 버렸다.

‘전하께서 기억을 찾는 바람에, 공작이 기억을 잃은 거라고요? 그럼…… 제가 전하의 기억을 찾게 도우면 안 됐던 겁니까?’

디에리안은 그야말로 반쯤 패닉이었다.

‘아무것도 밝히지 말아 달라는 말이 그런 뜻일 줄이야……. 그것도 모르고…… 신나서 기억 물약을…….’

자책하는 그를 에슬린이 달랬다.

어차피 모든 건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지.’

불쌍한 마법사는 그저 제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한 것일 뿐이었다.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났다.

먼저 백기를 든 건 에르단이었다.

‘나 갑자기 기 빨려서 너무 배고파…….’

그로 인해 이야기는 잠시 중단되었다.

에슬린이 여기 있는 건 당연히 비밀이었으므로, 에르단은 제 시종들조차 물린 채 직접 음식을 가져다 날랐다.

“그러고 보니 줄 게 있어, 디엘.”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에슬린이 말했다.

디에리안은 식사조차 거르고 꼬부랑글씨가 가득 적힌 마법 책으로 심신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제게요? 뭐죠?”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까보단 회복한 얼굴이었다.

“자.”

“이건……!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다시 패닉에 빠졌지만.

산산조각이 난 붉은 보석이 마법사의 손 위에서 가늘게 진동했다.

“이 위대한 보물이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그는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 애도했다.

“펠리서스 덕분이었던 것 같아.”

에슬린이 말했다.

“무슨 소리죠?”

“내가 기억을 모두 되찾았는데도, 테베트 경의 기억이 멀쩡했던 시기가 있었거든.”

에슬린은 그때를 회상했다.

둘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던 순간.

아주 잠시였지만, 분명 그런 순간이 있었다.

“신의 눈을 가리기라도 했단 말이야? 이 보물이?”

에르단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그럴 법한 얘기입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디에리안의 말이 뒤따랐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소지자가 생각하는 불행을 피하게 해 주는 마법석.”

그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만약 그 남자가, 전하를 잃는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했다면…….”

“…….”

“신의 대가에 변수로 작용한 셈이겠죠.”

딱히 기꺼운 말을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가 기다란 손으로 마법석 조각을 어루만졌다.

“그런데 이렇게 걸레짝이 되었으니…….”

흑. 디에리안의 얼굴이 다시 울적해졌다.

“변수고 나발이고 다 무용지물이군요.”

잠자코 있던 에슬린이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마법사를 만났는데…… 그 마법사는 펠리서스를 재생할 수 있다고 했거든.”

“뭐라고요?”

“어떻게 생각해?”

재생? 재생이라고? 무언가에 홀린 듯 디에리안이 재차 중얼거렸다.

“부서진 보물을…… 재생?”

흡사 유령이라도 마주친 표정이었다.

별안간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손톱을 까득까득 물어뜯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요. 그 마법사의 이름이 뭐죠?”

“그것까진 잘…….”

에슬린은 슬쩍 미간을 구겼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묻지 못했다.

“아, 맞다.”

에슬린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쓰레기?”

에르단이 중얼거렸다.

“종이야, 에르단. 다른 말로 편지지라고도 해.”

에슬린은 상냥하게 가르쳐 주었다. 고귀한 황자는 입술만 삐죽거릴 뿐이었다.

디에리안이 와락 달려들었다.

“뭐죠? 뭐죠?”

“그 마법사에게 받았어. 여기에 편지를 쓰면 어떻게든 자기한테 도착한다던데?”

그는 단숨에 종이를 낚아챘다.

불빛에 비춰 보고, 냄새를 맡고, 그 끝을 살짝 찢어 보았다. 그러더니.

“마법 종이군요!”

하며 눈빛을 빛냈다. 흡사 금광이라도 발견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재생, 재생이라니!”

다시 손톱을 물며 매처럼 같은 자리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 샘물을, 공식을, 마력을…….

알 수 없는 중얼거림과 함께였다.

“아무튼 난 황궁으로 돌아갈 거야.”

에슬린은 가볍게 선언했다.

“돌아가겠다고?”

“그래. 황궁에서 성배를 조사할 생각이야. 카르단도 감시해야 하고.”

“그건…… 황녀로서 돌아가겠단 소리야?”

에르단의 물음에 에슬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답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전하.”

한참을 정신없이 굴던 디에리안이 우뚝 멈추어 섰다.

“응?”

“황녀로서든, 하녀로서든 황궁으로 다시 돌아가긴 어려우실 겁니다.”

그는 다시 테이블로 다가와 털썩 앉았다.

“잊으셨습니까? 전하께서는 지금 쫓기는 몸이십니다.”

알아,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렇게 떳떳한 입장은 아니잖아.”

“뭐, 상황이 그렇게 되어 버렸죠. 하! 황자비 시해 미수라니.”

마법사가 싸늘한 얼굴로 조소했다.

“진짜 그런 허술한 암살도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 멍청인?”

“널 잡기 위해 억지를 부린 거겠지.”

“멍청한데 건방지기까지! 감히 날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그 말대로 디에리안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영원히 카르단의 추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슬린은 그를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디엘, 황후 폐하를 알현해. 프레이 백작가 장남 이름으로. 그러면 네 누명을 벗기가 좀 더 수월할 거야.”

디에리안의 혐의가 사라진다면, 그에 휘말린 하녀인 에슬린의 혐의 또한 사라질 터였다.

디에리안이 꽥 소리를 질렀다.

“저보고 공작새 같은 꼴을 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귀족 행세를 하라는 겁니까!”

“저기, 여기 듣고 있는 공작새 있어요.”

에르단이 허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디에리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흥! 차라리 기억 마법을 연구하겠습니다! 황궁 멍청이들의 기억을 조작할 어마무시한 마법을 연구해서…….”

“네 마법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걸 기다리다간 올해가 다 가 버릴 것 같은데.”

에슬린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마법사의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

“그럼 지금 당장 연구하러 가 보죠!”

“젝스 경.”

에슬린의 부름에 커다란 기사가 움직였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던 디에리안의 앞을 젝스가 막아섰다. 그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디에리안 님, 죄송합니다.”

그러자 디에리안이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젝스 겨엉…… 함께 산을 헤매던 의리는 어디다 갖다 버리고.”

“그러니까 그냥 내 말 들어.”

마법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에슬린을 향해 빈정거렸다.

“젝스 경이 제 푸른 말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개량에 성공해 비상식적으로 속도가 빠르다고요!”

“글쎄, 그 개량형……. 확실히 빠르긴 했지만 말 형태가 3초밖에 유지가 안 됐지, 아마?”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겁니다!”

“아하. 그럼 한 5초?”

디에리안이 어어억, 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사실이었다.

에르단이 깔깔 웃으며 즐거워했다.

“이런 난장판도 오랜만이네.”

“진정, 진정하십시오. 두 분 모두.”

둘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건 젝스뿐이었다.

디에리안을 바라보던 에슬린의 눈빛이 둥글어졌다. 그녀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알겠어. 네가 정 싫으면 다른 방법을 생각할게.”

젠장, 또 저런 식이시지.

마법사의 눈동자가 잠시 에슬린을 쏘아보았다. 이윽고 푸우우, 긴 한숨이 터졌다.

“진짜 싫었으면 벌써 도망쳤을 거 아시면서, 놀리시는 겁니까?”

기다란 손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다 멈추었다. 그는 손가락 사이로 에슬린을 쏘아보았다.

“서얼마…… 진짜 제게 도망칠 방법이 푸른 말밖에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니시겠죠? 제겐 지금 상황에서 도망칠 방법이 최소 31가지 정도는……”

“그래, 알아. 넌 대단한 마법사지.”

에슬린은 재빠르게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럼 어디…….”

잠시 뒤 에슬린은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을 빙 돌아 응접실 한쪽 벽면에 가서 섰다.

거기엔 베르타니아 지도가 걸려 있었다.

하얀 손가락이 지도의 아래쪽 어딘가를 짚었다.

“디엘 넌 누명을 벗은 다음엔 남부로 가. 거기에 그 마법사가 있다고 했으니까.”

디에리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하는 마법 연구를 실컷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얼굴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나랑 젝스 경은?”

에르단이 물었다. 그녀는 지도의 정중앙을 짚었다.

“황자 전하께선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셔야죠. 그리고 젝스 경은……”

“전 주군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짧지만 강한 의지가 담긴 말이었다. 에슬린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함께 황궁으로 가자.”

“제가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에르단 전하?”

“황궁 제일검이 돌아온다는데, 기사단장이 가장 먼저 환영하겠지.”

에르단은 가볍게 대꾸했다.

그들은 죽은 황녀의 측근이었지만, 죄인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이 원한다면, 그리고 황궁이 그들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다.

거취를 정하는 건 그들의 자유였으니까.

그게 에슬린이 제 목숨을 걸고 얻어 낸 유일한 약속이었다.

“자, 그럼 날이 밝는 대로 수도로 돌아가자.”

짝. 에슬린이 가볍게 손을 맞댔다. 에르단에게서 벌써? 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냥 여기 숨어 있다가 입궁하면 안 돼? 세비스 자작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텐데.”

“안 돼. 수도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만나야 할 사람도 있고.”

“무슨 할 일?”

“음.”

에슬린의 얼굴에 즐거운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세 사람은 순간 강렬한 기시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 때마침 여름이기도 하니까…….”

에슬린이 저렇게 웃을 때면 항상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덧붙이곤 했으니까.

“괴담이나 하나 유행시켜 볼까?”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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