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모두가 잠든 밤.
에슬린은 얇은 가운을 걸친 채 다시 응접실을 서성였다.
산속에서의 추위가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실내는 조금 무더웠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밤바람이 불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베르타니아 지도 앞에 멈췄다.
“지도를 보는 건 오랜만이네.”
슐든 대륙 대부분을 지배하는 대제국, 베르타니아.
바다와 맞닿아 있는 남부를 제외하고, 양옆으로 길게 뻗은 동부와 서부는 모두 군소 왕국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워낙 작은 규모다 보니 베르타니아의 지방 영지와 큰 차이는 없었다.
“…….”
그녀의 시선이 위로 이동했다.
북부 리페리우스 공작령 너머. 유목 민족의 평야를 지난 곳.
‘밤의 산맥.’
그곳은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사람을 집어삼키는 산맥이라던가?’
그곳을 통과한 자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지도가 거기서 끊겨 버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사람들은 그곳이 마법사의 땅이라고 말했다. 혹은 마물의 땅이라고도, 그도 아니면 신의 땅이라던가?
“말도 안 돼.”
에슬린은 짧게 비웃었다.
그녀는 그 모든 추측들이 다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저 검은 낭떠러지 같은 선 너머엔, 저와 똑같은 사람이 살 것이다.
이 축복받은 슐든 대륙에 고작 우리뿐이라니. 신이 그런 낭비를 저지를 리 없다.
그 옛날 선조들도 그런 믿음으로 남부 바다를 건너, 신대륙을 발견한 게 아니던가?
“언젠가는…….”
에슬린의 눈동자가 아득히 멀어졌다.
짙푸른 눈동자가 조금 아래로 향했다. 익숙한 글씨가 눈을 사로잡았다.
‘리페리우스 공작령.’
그러고 보니 테베트는 북부로 돌아갔을까?
‘나를 잃는 것이 불행이라고…….’
그녀는 디에리안의 말을 떠올렸다.
신의 대가를 거스를 만큼 간절했던 그의 바람.
하지만 비단 그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예요.”
에슬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지금쯤 어디를 달리고 있을까?
가늠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밤이잖아.
그녀는 고개를 털며 웃었다.
“……보고 싶어.”
그렇게 헤어져 버린 게 마음에 걸렸다. 또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통, 고운 이마가 지도 위에 부딪쳤다.
그녀는 가만히 목을 감싸 쥐었다. 미미한 통증에 절로 눈썹을 찡그렸다.
이렇게라도 그의 흔적을 느낄 수 있으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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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리페리우스 공작저의 하녀장 아델 브라이스 님께.
하녀장님, 그간 잘 지내셨나요?
저는 이곳 수도 베클라에 도착했습니다.
적어 주신 추천장으로 무사히 황궁 하녀로 취직했어요. 요즘 황궁 인력이 부족한지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뭐예요? 깜짝 놀랄 정도였답니다.
요즘 수도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어요.
(글씨가 조금 흐트러졌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다는 소문이에요.
어휴! 제가 이런 종류의 괴담, 싫어하는 거 아시죠? 안 들으려고 하는데도 하녀 애들이 어찌나 떠들어 대던지.
아무튼 오싹오싹한 여름이네요.
그럼, 하녀장님께서도 건강하세요!
─ 세피아 레나드 드림.
PS. 북부 공작저는 요즘 어떤가요? 리페리우스 공작님께서 아직 수도 타운 하우스에 머무시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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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세피아 레나드 보아라.
세피아, 잘 지냈느냐?
편지를 받고 몹시 흐뭇했다. 넌 늘 수도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니. 무사히 황궁 하녀까지 되다니, 다행이구나.
수도 소식을 전해 줘서 고맙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다는 괴담이라.
그런 종류의 유령 괴담은 매해 돌곤 하지.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만, 황궁 하녀인 너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그 황궁에서 최근 죽은 사람은…….
너도 알지 않니.
그런데 에슬린 그 아이는 만났니?
꽤 우수한 아이였는데 갑작스럽게 사라져 늘 신경 쓰이는구나. 수도에 있다고 들었는데, 소식을 접하면 알려 주렴.
그럼, 언제나 건강하거라.
─ 아델 브라이스 씀.
PS. 공작저는 가주님께서 안 계시어 몹시 한가하단다. 아, 집사장님께서 돌아오셨어. 다행인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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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리페리우스 공작저의 하녀장, 아델 브라이스 님께.
하녀장님, 안녕하세요? 세피아예요!
집사장님께서 돌아오셨다니 한숨 놓으셨겠어요.
아쉽게도 에슬린은 아직 만나지 못했답니다. 소식이 닿는 대로 편지 쓸게요.
참, 동봉하는 편지를 하인장님께 전달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하인장님께도 안부 편지를 적어 보았거든요!
그럼, 언제나 건강하세요.
─ 세피아 레나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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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세피아 레나드 보아라.
세피아, 잘 지내고 있느냐?
편지는 하인장에게 잘 전달했다. 네가 하인장과 안부를 나눌 정도의 교류가 있었을 줄은 몰랐구나.
로와나무의 뿌리를 동봉한다. 요즘 뜨는 건강식품이라고 하니 잘 챙겨 먹거라. 휴가 날에도 밤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고 일찍일찍…….
탁.
세피아 레나드는 편지를 접었다.
“이거면 되는 거지?”
밀도 높은 여름 바람에 선홍색 머리가 흔들렸다.
그녀는 가만히 제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연보랏빛 머리카락, 짙푸른 눈동자.
그림 같은 미소를 걸치고 있는 새벽을 닮은 얼굴.
“에슬린.”
그러자 여자가 더욱 짙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래, 세피아.”
“휴…… 갑자기 수도로 불러들이더니 이게 다 무슨 일이람.”
세피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슬린이 살짝 눈썹을 떨어뜨렸다.
“미안. 모처럼 휴가 날인데.”
“공작저에서 말도 없이 사라졌던 거나 더 반성해.”
“그땐…….”
에슬린은 입술을 달싹였다.
“동생이 아파서 너무 다급했어.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떠나서 미안해.”
세피아는 물끄러미 에슬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 연락받고 어찌나 놀랐던지.’
솔직히 반쯤 화를 내기 위해 수도에 올라왔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친구가 아주아주 미웠으니까.
하지만 그간의 사정을 들으니 마음이 풀어져 버렸다.
‘나도 레피아가 아팠을 땐 거의 정신이 나갔으니까…….’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가관이었다.
‘황궁에서 음모에 휘말려 누명을 쓰고 절벽에서 떨어졌다니!’
결국 세피아는 에슬린을 꽉 끌어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됐다, 됐어! 지난 일 말해서 뭐 해! 그런 표정으로 사과하면 안 받아 줄 수도 없고.”
“이해해 줘서 고마워.”
잠시 침묵이 흘렀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가득 찰 때쯤 세피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그 소문, 진짜야?”
“무슨 소문?”
“네가 말한 그 소문. 죽은 사람이 다시…… 어휴! 나 소름 돋은 거 봐.”
세피아는 입에 담기도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에슬린이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나도 길에서 주워들은 거라니까.”
“그래? 그렇다기엔 황궁 하녀 애들한테 말해 봐도 자세히 아는 애들이 없던데.”
에슬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흔한 여름 괴담이 다 그렇지, 뭐.”
“그런가. 하여튼 북부에도 수도 소식은 잘 전해 뒀어. ……정말 하녀장님께 널 만났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로와나무 뿌리를 만지작거리며 세피아가 속삭였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한 게 찜찜한 것 같았다.
하녀장은 제 자식처럼 하녀들을 챙기곤 했다.
그러니 에슬린 또한 그 기분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내가 쫓기는 신세라는 걸 아시면 더 속상해하실걸.”
“그건 그래…….”
세피아에게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슬린 네 결백이 밝혀지면 말씀드려야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바로 며칠 뒤, 디에리안이 입궁해 황후를 만날 예정이었다.
“누명을 벗으면, 넌 다시 황자비궁 하녀로 돌아오게 되는 건가?”
“그렇겠지.”
“얼른 와. 네가 황궁에 있을 거라고 해서 나도 황궁에 취직한 건데. 의지할 데 없어서 쓸쓸해.”
“그래. 조금만 기다려.”
세피아의 얼굴이 그제야 환해졌다.
쿵쿵! 낡은 나무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거친 인상의 남자가 등장했다. 콧잔등에 기다란 상처가 있었다.
“이봐, 아가씨들. 우리 길드를 카페처럼 쓰는 것까지는 내가 별 상관 안 하겠지만.”
남자는 울퉁불퉁한 손을 들어 코를 쓱 문질렀다.
“슬슬 카페 문 닫을 시간인데.”
엇! 세피아가 고개를 빼 창밖을 살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황궁으로 돌아가려면 지금 마차를 잡아타야 했다.
“그럼 또 봐, 에슬린.”
“그래. 부길드장님, 세피아에게 마차를 잡아 주세요.”
“날 아주 몸종처럼 부려 먹는군. ……근데 난 왜 이걸 군말 없이 하고 있지?”
남자는 구시렁대며 사라졌다.
세피아가 주섬주섬 짐을 챙겨 들었다. 서둘러 나가려다 말고 아, 맞다! 하며 몸을 돌린다.
“왜 그래?”
“가주님께서 지금 수도에 계시는 거 알아?”
순간 에슬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아, 이제 가주님이 아니지. 리페리우스 공작님께서…… 잠깐. 이것도 어색한데?”
“가주님께서, 왜?”
“후후, 그래. 우린 그 호칭이 편하긴 하지? 아무튼 가주님께서 수도 타운 하우스에 계신대. 북부 공작저로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말이야.”
북부로 돌아가지 않았구나.
에슬린은 멍하게 생각했다. 한참을 굳어 있자 지켜보던 세피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 표정이 왜 그래?”
“아니, 아니야. 그보다 타운 하우스…….”
이상하게 자꾸 목이 잠겼다.
“타운 하우스 소식을 어떻게 알았어?”
“거기 아는 사람 있거든. 내가 여기저기 발 좀 넓은 거 알지?”
그녀는 다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웃었다.
에슬린이 다음 말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가주님께서 요즘 뭔갈 찾는 데 몰두하고 계신다는 것도 들었지.”
“……뭐?”
기어코 목소리가 떨렸다.
“롭시온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고 계신대. 그래서 북부로 돌아가지 않으셨다고 하던데. 아직 찾지는 못하신 것 같지만…… 너 진짜로 표정이 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