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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72화 (72/147)

72화

“가주님.”

테베트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제 앞에 도열한 수많은 사용인들을 무감한 눈으로 훑었다.

시선은 가장 선두에 있던 나이 든 여인에게서 멈추었다.

“무사 귀환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인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자, 그를 마중 나온 사용인들이 일제히 몸을 숙였다.

“별일이군. 자네가 타운 하우스까지 오다니.”

테베트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수도의 리페리우스 타운 하우스.

북부 공작저보다 작은 규모이지만, 다른 귀족저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저택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 늙은이까지 움직이게 만드시니 속이 시원하십니까?”

은퇴한 노집사, 사티나 레밀턴이 주름진 얼굴을 움직여 웃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큰일도 아닌데 다들 호들갑을 떨었군.”

테베트는 사티나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수많은 사용인들을 뒤꽁무니에 줄줄이 단 채, 본관 내부에 들어섰다.

오래 들르지 않았는데도, 저택은 변함이 없었다.

‘지긋지긋하군.’

테베트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

“리페리우스의 가주가 행방불명이었는데, 어찌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고작 며칠이었을 뿐이야.”

“며칠이나, 였습니다. 리페리우스의 무게를 잊으신 건 아니실 텐데요?”

노집사의 기운은 여전히 형형했다. 테베트는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보다시피 잘 돌아왔으니 이제 안심하고 돌아가도록 해.”

테베트가 계단을 올랐다. 따르던 사용인들이 제각기 흩어졌다.

그에게 붙은 건 사티나뿐이었다.

“아뇨, 가주님. 이 늙은이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무슨 뜻이지?”

“사람을 찾고 계신다고요.”

걸음이 멈추었다. 그는 층계참에서 나이 든 전(前) 집사의 얼굴을 응시했다.

우아한 백발을 단정히 묶은 여인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집스럽게 다문 입매 또한 여전했다.

테베트는 엄지 끝으로 한 손에 든 검 장식을 어루만졌다. 음각된 천칭이 느껴졌다.

“그게 자네와 무슨 상관이지?”

“상관이 있다마다요.”

사티나가 다가섰다.

“라노를, 북부 공작저의 집사장을 어째서 내보내신 겁니까? 그녀만큼 충실한 리페리우스의 가신도 없습니다.”

테베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북부 집사장을, 라노 레밀턴을 내보냈다고?’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아니, 잠깐만.

‘황궁에 추천장을 써 달라고 했습니다.’

집사장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이후, 그녀를 내쫓던 자신의 분노한 목소리 또한.

하지만…… 왜 그랬지?

테베트는 동요를 감추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단단한 턱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가주님, 리페리우스의 저주를 기억하십니까?”

의미심장한 얼굴로 노집사가 말했다.

“충신을 내보내고, 누굴 그리 애타게 찾고 계신지는 모르오나, 그만두십시오.”

“감히 자네가……”

“그건 리페리우스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노집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가주님의 의무는 이 땅을 위협하는 삿된 마물을 물리치는 것뿐. 오직 그것뿐입니다.”

“…….”

“그래야 리페리우스가 이 대륙에서 온전히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녀에게 테베트는 여전히 꽃 같던 열 살짜리 어린애였다.

“안 본 사이에 말이 많아졌군, 집사.”

테베트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사티나가 빙긋 웃었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리페리우스를 섬기는 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말이기에.”

“내가 자네의 꿍꿍이를 모를 것 같나?”

그는 냉랭히 쏘아붙였다.

“넌 리페리우스를 통해 레밀턴 가문을 지키려는 거겠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리페리우스의 가신 가문으로서 그들이 누려 왔던 혜택을, 그녀 또한 모르지 않을 것이다.

사티나는 고개를 저었다.

“궤변이십니다. 전 제 가문보다 리페리우스를 우선합니다.”

미소가 짙어졌다.

“그게 아니라면, 제가 왜 이 팔을 가주님을 위해 내놓았겠습니까?”

그녀가 펄럭이는 오른쪽 소맷자락을 눈으로 가리켰다.

“가주님께서 가문을 거슬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잊으신 건 아니시겠지요?”

“그만…….”

“모친께서 우십니다.”

그 순간 테베트의 주먹에서 탁, 힘이 풀렸다.

그녀는 늘 그렇듯, 습관적으로 눈을 휘어 웃고 있었다. 인자해 보이는 푸근한 미소.

그러나 인자하다고 하기에 그 주름진 눈가 사이로 보이는 눈빛은 지나치게 차가운 것이었다.

“…….”

“충신의 마음으로 간언 드립니다.”

아이는 가문을 위해 열 살에 전장으로 내몰렸다. 사티나는 그때도 이렇게 말했다.

“적군은 베고, 아군도 베십시오.”

아이의 손은 그렇게 피로 물들었다.

“강함은 드러내고, 약점은 숨기십시오.”

아이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자랐지만, 저주를 들킬까 언제나 두려워했다.

“누구도 믿지 말고, 아무도 선택하지 마십시오.”

사랑을 모르는 아이는 그래서 언제나 혼자였다.

“그래야 살아남습니다.”

그렇게 죽어 가고 있었다.

“부디 포기하십시오. 순응하십시오. 약속된 부귀영화가 가주님 손에 있는데, 대체 뭐가 더 필요하단 말씀이십니까?”

노집사의 목소리는 공손했다. 세상의 진리를 읊듯, 확신에 차 있기도 했다.

“나는…….”

오랜 시간 강요받은 진리 앞에 더 이상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각하.”

제롬이 꾸물꾸물 다가왔다.

집무실에 앉아 있던 테베트는 미동조차 없었다.

“말씀하신 그 하녀의 행방 말입니다. 롭시온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

그는 슥 눈을 들어 제롬을 바라보았다.

베일 듯한 시선에 제롬이 움찔 몸을 떨었다. 아, 심기가 불편하시군.

“그, 근처 다른 지역까지 더 찾아보겠습니다!”

“됐다.”

“예! 물론 수도까지 샅샅이 뒤져서…… 네, 네?”

테베트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제롬이 눈썹을 구겼다. 반드시 찾으라고 길길이 날뛰실 땐 언제고.

“지금 됐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오늘은 그만 물러가.”

“각하?”

제롬이 우물쭈물하다 결국 아무 말도 붙이지 못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테베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들어 창밖을 응시했다.

에슬린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벌써 흐릿한 것 같기도 했다.

‘그 여잘 찾아서 뭘 할 건데?’

머릿속에서 누군가 물었다.

‘어차피 네 곁에 있으면 모든 게 망가질 뿐이야. 그 여자도 어머니처럼 만들 셈이야?’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지. 잊고 있었어.”

테베트는 독한 술을 들이켰다. 두통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거 봐, 넌 리페리우스에서 벗어날 수 없다니까.’

저주 같은 피가 조롱하듯 그의 혈관을 따라 흘렀다.

‘겁쟁이, 겁쟁이, 겁쟁이.’

증오스러웠다.

* * *

그해 여름, 베르타니아 황궁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유서 깊은 프레이 가문의 장남이 황궁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프레이 영식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괴짜 천재 마법사 디에리안 프레이.

그것이 모두가 기억하던 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멀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뚜벅뚜벅 황궁 문턱을 넘은 그가 황후 앞에 읍소했다.

‘억을합니다! 황자비 시해요? 제가 그딴 모략을 꾸몄단 증거 있습니까? 아니, 불면증 완화 마법을 해 달라고 하셔서 마법을 쓴 것뿐인데. 그걸로 뭐요? 황자비 전하의…… 뭐라고요? 어휴. 입에 담기도 소름 끼치네. 하여튼! 억울해서 잠도 안 오길래 결백을 증명하러 왔습니다!’

무뢰배 같은 말투에 황후가 이마를 짚은 건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든 황후는 해당 사건에 대한 전면 재수사를 명했다.

애초에 1황자의 억지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황자비 시해 따위 꾸민 적이 없으니, 증거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무엇보다 디에리안의 마법을 감지한 카르단의 마법사가 행방불명이었다.

‘증인 없음, 증거 없음, 피해자 없음. 프레이 영식이 억울할 만했겠군. 카르단이 억지를 부렸어.’

카르단은 불똥이 튈까 숨을 죽였다.

결국 황궁은 디에리안에게 죄가 없음을 인정했다. 함께 휘말린 하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판결이 끝나고 화제의 프레이 영식은 다시 은둔했다.

그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던 사람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사교계 활동이라도 시작해 보시려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러게. 그냥…… 진짜 그냥, 너무 억울하셨던 걸까?’

그렇게 작은 소란과 함께 지루한 여름이 지났다.

스치는 바람에 청량함이 더하고, 낙엽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오랜만에 뵙네요, 레실리아 님.”

에슬린 로즈벨이 황궁으로 돌아왔다.

* * *

‘기다려!’

“…….”

에슬린은 고개를 들었다. 한낮의 뙤약볕이 창문을 향해 흘러들었다.

방 안은 조금 어수선했다.

그녀가 한창 짐을 꾸리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면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네.’

에슬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실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테베트 경.”

여태까지 누명을 벗고, 황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세피아의 말은 뇌리 한구석에 화살촉처럼 콱 박혀 있었다.

‘테베트 경이 타운 하우스에 있어.’

짐을 싸던 에슬린의 손이 멈추었다.

‘그렇게 헤어진 게 마음에 걸려.’

마지막으로 보았던 눈이 잊히지 않았다.

경악과 공포, 절박함이 한데 얽혀 있던 눈빛. 에슬린을 떠나보낼 수 없다는 다급하던 손길.

또다시 그런 경험을 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에슬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에슬린이 떠날까 불안에 떨던 남자였다.

‘이제 쫓기는 신세도 아니고…….’

문득 어떤 충동이 일었다.

‘이번엔 내가 만나러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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