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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73화 (73/147)

73화

충동은 곧 결심이 됐다.

테베트가 뭔가를 찾고 있다고 했다.

저를 찾고 있는 걸까?

아마 그럴 것이다. 기억을 잃고서도 그는 에슬린에게 묘하게 집착하곤 했으니까.

‘그때 그렇게 사라져서 미안하다고 해야겠어. 어떻게 지내는지도 궁금하고…….’

에슬린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가방을 대충 정리하고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마차를 잡아타고 리페리우스 공작저 앞에서 내렸다.

꽉 닫힌 거대한 문이 그녀를 반겼다. 문지기조차 없었다.

어떡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찰나, 누군가 다가왔다.

“거기 누구야?”

젊은 기사의 경계 어린 목소리였다.

“제롬 경?”

에슬린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수상한 자의 정체를 확인한 제롬이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헉! 넌 그때 그 하녀…….”

“때마침 잘됐네요.”

“뭐, 뭐가?”

에슬린은 멈춰 선 제롬에게로 다가갔다.

공작저는 높고 아득한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대저택.

에슬린은 테베트가 있을 것 같은 본채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공작님을 만나러 왔는데, 말씀 좀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하녀가 감히 각하를 뵙겠다고?”

제롬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씀만 전해 주세요.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하!”

제롬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하지만 에슬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로즈벨이라고 하면 아실 거예요.”

보란 듯이 이름까지 가르쳐 주었다.

제롬은 당장 내쫓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저 하녀를 찾아오라고 말하던 테베트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후로 다시 말씀은 없으셨지만.’

이대로 하녀를 보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일단 보고라도 드리자, 보고라도.

“그, 뭐냐. 일단…… 기다려!”

제롬은 담벼락 밑에 에슬린을 세워 두고 안으로 사라졌다.

제롬이 다시 나타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묵직한 정문 옆 샛문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난처한 표정이었다.

“저기…….”

에슬린은 담벼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안 만나시겠다는데.”

“네?”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기사의 표정은 조금 전 말이 사실이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그가 떨떠름하게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 그냥 돌아가라고…….”

에슬린은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왜요?”

“이유까지는 나도 모르지.”

“…….”

“근데 생각해 보니까, 솔직히 각하처럼 바쁘신 분께서 굳이 널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나?”

제롬이 빠르게 지껄였다. 그는 어느새 난처한 표정을 지운 채였다.

“그러니까 그만 돌아……”

“거기 누구냐?”

나직한 여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랜 세월이 묻은 단단하고도 엄숙한 목소리였다.

“아, 사티나 님.”

살짝 열린 샛문 앞에 백발의 여인이 서 있었다.

사티나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제롬 경, 무슨 일입니까?”

“아, 이 여자가 각하를 뵙게 해 달라고 해서…….”

“여자?”

사티나의 눈동자가 슥 에슬린을 향해 굴렀다. 에슬린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흐음. 사티나는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사람을 해체해 보듯 날카롭고도 예리한 시선이었다.

“그, 뭐냐. 레비브의 산에서 각하를 보필했던 하녀라고 합니다.”

“각하께서 행방불명되셨을 때 말입니까?”

“예. 아마 황궁 하녀…… 황궁 하녀 맞지?”

제롬이 불쑥 물었다. 에슬린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입궁 전이긴 했으나, 굳이 따지자면 황궁 하녀가 맞았다.

“네.”

하녀라. 사티나는 하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우리 공작저 하녀도 아닌데 가주님을 뵈어야 할 이유가 있나?”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하녀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 깨끗한 음성을 들으며 사티나는 잠시 침묵했다. 다시 입을 연 건 제롬을 향해서였다.

“가주님께 보고는 드리셨습니까?”

“그게…… 만나지 않으시겠다고.”

제롬이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흠.”

사티나의 입술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웃으니 의외로 인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중요한 용건이라면 아무리 하녀라도 뵈어야지. 내가 다시 가서 말씀드려 보마.”

에슬린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사티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제롬이 그녀와 함께 사라졌다.

에슬린은 다시 담벼락에 몸을 기댔다.

리페리우스 공작저에 저런 집사가 있었던가?

공작저엔 거의 들른 적이 없어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튼 그녀가 테베트를 잘 설득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곧 현실이 되었다.

“가주님께서 내려오시겠다고 하시더구나.”

한참 뒤 홀로 나타난 사티나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정말인가요?”

“그래. 여기서 기다리거라.”

에슬린은 조금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티나가 다시 샛문으로 들어갔다.

곧 그를 만날 수 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길거리에 늘어선 가로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파리 끝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붉은색. 그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하는 색.

그녀는 붉은 잎의 숫자를 세며 테베트를 기다렸다.

아주 오래도록. 눈앞에 보이는 가로수의 이파리 숫자를 다 셀 때까지.

“…….”

테베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 * *

“널 바람 맞혔다고?”

에르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바쁜 일이 있었겠지.”

에슬린은 자료를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황자의 얼굴에서 콧김이 숭숭 뿜어 나오고 있었다.

“하! 바아쁘은 이일?”

“조용히 해. 네가 여기 있다는 걸 다 소문낼 셈이야?”

낡은 주점은 벽이 얇았다.

황자가 몰래 이런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이 들키면 곤란해지는 건 에르단이었다.

그러나 그는 딱히 에슬린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어이가 없네. 아무리 기억이 없다기로서니 사람을 그렇게 오래 밖에 세워 놔?”

괜히 말했나.

에슬린은 조금 후회했다.

“됐어! 때려치워. 역시 그 악마 공작, 난 처음부터 맘에 안 들었어.”

그가 휘휘 손을 내저었다. 에슬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료를 툭툭 정리했다.

그날은 결국 테베트를 만나지 못한 채 돌아왔다.

실망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의기소침해지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지. 기다리는 수밖에.’

기억이 없었을 때의 불안함과 혼란스러움은 에슬린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에슬린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기다릴 것이다.

북부 공작저에서의 테베트처럼.

‘잘 지낸다고 했으니…… 일단 됐어.’

만나지 못한 대신, 세피아를 통해 타운 하우스 소식을 들었다. 테베트는 멀쩡히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난 내가 할 일을 해야지.”

“응?”

에르단이 고개를 기울였다. 에슬린은 빙긋 웃었다.

“펠리서스 마법석이 있으면 테베트 경은 돌아올 거라는 소리야.”

그녀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매끄러운 입술에서 고요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니면 그전에 내가 성배를 찾거나.”

에르단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에슬린은 방 한켠에 놓인 짐가방을 바라보았다.

에르단과 이곳에서 만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성배에 대해선 좀 알아봤어?”

“그러곤 있는데…… 솔직히 혼자선 버거워. 네가 빨리 와야겠어.”

에르단이 징징대듯 말했다. 에슬린은 피식 웃으며 자료를 가방에 넣었다.

“그럼 다음엔 황궁에서 만나.”

* * *

“가주님께서는?”

“초상화가 있는 복도에 계십니다.”

사티나는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선 테베트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얼마 전 찾아왔던 하녀가 생각났다.

‘꽤 오래 버티고 있었지.’

사티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여자였다.

‘감히 하녀 주제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테베트가 롭시온에서 찾던 여자라는 걸.

‘제롬 경을 미리 발견해서 다행이지.’

테베트에게 달려가던 제롬을 막은 건 그의 시종이었다. 사티나의 오랜 수족이기도 한.

아마 테베트에겐 에슬린이 왔다는 사실조차 닿지 않았을 것이다.

‘가소롭군.’

사티나는 걸음을 옮기며 웃었다.

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저 테베트 리페리우스를 흔들었는가?

‘하지만 이제 상관없지.’

어차피 모든 건 제 손바닥 안이다.

“가주님, 여기 계셨습니까?”

사티나는 표정을 감추고 허리를 낮추었다.

테베트는 복도에 걸린 가주들의 초상화를 응시하고 있었다.

“황후 폐하의 부름이 벌써 두 번째입니다. 이번에도 거절하시는 건 옳지 않습니다.”

은퇴했던 사티나는 어째서인지 이곳의 집사장 역할을 다시 자처하고 있었다.

그녀가 대꾸 없는 넓은 등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생각하던 사티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주님, 기억이 아직도 혼란스러우신 겁니까?”

“……기억?”

미동 없이 서 있던 남자에게서 그제야 반응이 돌아왔다.

“아. 기억.”

테베트는 아주 오래된 물건을 꺼내 든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 기억을 잃었지…….

그 사실조차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게 자네에게 중요하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티나는 공손히 말을 이었다.

“가주님께서 리페리우스의 의무를 다하시는 데 문제가 없으시니 말입니다. 다만 불편하시다면 신전에 연락을 넣어 마법사를……”

“됐어.”

단호한 거절이 튀어나왔다.

노집사는 잠시 테베트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얼굴.

그 얼굴을 날카롭게 응시하다 다시 허리를 숙였다.

“황후 폐하를 찾아뵈시지요. 황제 폐하의 병환이 더욱 악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황궁에 자주 들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사티나는 정중하게 말을 끝맺었다.

한참의 침묵 뒤, 테베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준비해. 황궁으로 가겠다.”

“예, 가주님.”

사티나는 한 번 더 깊이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근처 하녀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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