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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74화 (74/147)

74화

“리페리우스 공작, 어서 오게.”

황후가 조금 굳은 얼굴로 그를 맞았다.

두 번이나 제 부름을 거절한 게 아무래도 못마땅한 것 같았다.

“격조했습니다, 폐하.”

테베트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예를 차렸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단도직입적인 물음이었다.

화려한 보라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도 기억에 혼란이 있는가?”

“…….”

테베트는 부채로 입가를 가린 황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또 기억 얘기로군.

테베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그동안 왜 제 부름을 무시했냐며 질책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의미일까?

테베트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예, 그 말씀대로입니다.”

황후의 손끝이 순간 움찔했다.

“그럼 자네와 나의 약속도…….”

“무슨 말씀이십니까?”

“…….”

높은 곳에 앉은 여인에게선 잠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황제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명확하지 않은 지금, 황후는 황제의 권한 대행자 노릇을 충실히 해내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자네가 마물 전쟁을 일단락하면.”

고귀한 여인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좋은 결혼 상대를 찾아 주겠다는 약속이었지.”

“…….”

“이미 좀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말이야.”

그런 약속을 했나?

테베트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납득했다.

이 또한 제가 잊은 기억 중 하나이겠지.

그는 굳이 되묻지도 않았다.

결혼 상대 따위 이제 와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 어떤 것도 테베트를 자극하지 못했다. 그는 검 자루에 새겨진 천칭을 어루만졌다.

“그 말을 하려고 부른 거였네. 그럼, 다시 연락하지.”

살랑, 살랑.

황후가 부채를 흔들었다. 그 위로 떠오른 푸른 눈동자가 저를 응시했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눈빛.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구더라? 누구였더라……?

그러나 곧 다른 목소리가 뒤덮였다.

‘기억하지 마. 생각하지 마. 욕심내지 마.’

익숙해진 저주의 목소리였다. 따라서 그는 더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이젠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 *

황궁은 여전했다.

하녀들은 언제나 바빴고, 그런 와중에도 여러 가지 것들을 궁금해했다. 에슬린 로즈벨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익숙해진 하녀들 틈에서 그녀는 많은 것들을 기다렸다.

성배의 행방, 펠리서스, 오래된 친구, 숙적,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같은 것들을.

“춥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짧은 가을이 지났다.

코끝에 싸늘한 냉기가 감돌고 하얀 입김이 부서지는 계절이 왔다.

그 계절의 초입.

에슬린 로즈벨은 장식장 뒤에 몸을 숨긴 채 서 있었다.

“어쩐다?”

이곳은 황궁 도서관. 그녀는 장식장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비밀 샛길로 여기까지 잘 온 건 좋은데.’

나이 든 관리인이 하품을 쩍 했다. 고대 서적관을 문지기처럼 지키고 있는 사서였다.

‘흠…….’

고민하던 찰나 누군가가 사서에게 다가갔다.

“사서님, 안녕하십니까.”

“오, 이게 누구야!”

“오늘도 무료하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사서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사서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술과 고기…… 이거 참. 근무 시간에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는 곳 아닙니까.”

“그건…… 그래. 흐흐. 자네 덕에 내가 요즘 출근하는 재미가 있다고.”

사서는 주섬주섬 바구니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 놓았다. 익숙한 동작이었다.

사서가 툭, 팔꿈치로 옆에 선 남자를 치며 웃었다.

“젝스 자네도 기사단장 몰래 한숨 돌릴 곳 있어서 좋지?”

짧은 고수머리의 기사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하하, 딱딱하기는. 이리 와! 한잔하세.”

젝스가 몸을 움직여 사서 앞에 앉았다. 커다란 덩치는 사서의 시야를 가리는 데 충분했다.

에슬린은 그 틈을 타 고대 서적이 있는 내부로 들어갔다.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책장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오갔다.

‘성배에 대한 구전, 마법사들의 연구서…….’

그녀의 눈과 손이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머리는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보고…… 나머지는 에르단에게 가져오라고 해야겠어.’

그녀는 서쪽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을 쌍둥이를 떠올렸다. 자신도 여기에 앉아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솔직히 하녀는 황녀보다 더 바쁜 직업이었다.

‘휴…… 이 정도면 되려나.’

에슬린은 팔랑팔랑 넘기던 책을 다시 꽂아 넣었다.

어느덧 창밖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돌아가야겠어.’

그사이 술 취한 관리인은 홀로 도롱도롱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에슬린은 조심스럽게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이번엔 궁내부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오늘의 진짜 볼일은 이것이었다.

“또 향유 심부름이냐?”

나이 든 관리인이 안경알 너머로 에슬린을 응시했다.

“네.”

“나 참. 정기적으로 가져다드리는 것도 모자라 매일 하녀를 보내시다니.”

“…….”

“황자비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향유 목욕을 즐기신다는 게 사실인가 보군.”

관리인이 투덜거렸다. 달달한 향유병을 꺼냈다. 날씨가 추운 탓에 표면이 하얗게 얼어 있었다.

“옜다. 무거울 텐데 쏟지 않게 잘 가져가거라.”

에슬린은 바구니에 병을 차곡차곡 넣었다.

밖으로 나와 황자비궁으로 향했다. 차가운 공기에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한겨울 심부름은 하녀들이 가장 꺼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슬린은 아니었다.

‘성배를 조사할 기회지, 뭐.’

물론 살을 에는 추위까지 견디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으, 추워.”

에슬린은 종종걸음을 옮겼다.

어깨가 쑤시고 발끝 감각이 마비될 것 같은 순간.

“무거우십니다.”

양손이 덜렁 비어 버렸다.

남자는 황궁 기사복을 멀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새삼 그 차림이 잘 어울린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언제 도서관을 나왔어?”

에슬린이 물었다.

“옷이…… 너무 얇은 것 아닙니까?”

동문서답이 돌아왔다.

에슬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게 하녀들의 겨울옷이야. 젝스 경 생각보다는 따뜻할걸.”

진심이었지만, 젝스는 딱히 납득한 얼굴이 아니었다.

“이거라도.”

그는 아쉬운 대로 장갑을 벗어 얼어붙은 에슬린의 손에 끼워 주었다.

둘은 인적을 피해 길을 걸었다.

황궁 구조는 에슬린에게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한 것이었다.

“도서관에서는 사서가 취해 잠들 때쯤 나왔습니다. 빈 술병과 음식 흔적을 없애야 해서요.”

“수고했어. 상대하느라 고생했겠네.”

에슬린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헐렁한 사서와 각 잡힌 기사는 아무리 봐도 상극처럼 보였다.

“의외로 괜찮은 자입니다.”

“허?”

이 요령 없는 기사가 괜찮다고?

“근무 시간에 술이나 고기를 사양하지 않고 먹는 대담함 같은 것이…… 용감한 병사에 버금가는 배포를 가진 듯합니다.”

“아니, 그건 절대 아닐걸.”

에슬린은 단칼에 그의 말을 잘랐다. 하여튼 요령은 없고, 사람만 좋은 기사였다.

“기사단은 요즘 어때?”

“딱히 별일은 없습니다.”

“젝스 경이 눈치 못 채는 건 아니고?”

그가 머쓱히 뒤통수를 긁었다.

“아무튼 무사히 기사단에 복귀해서 다행이야.”

젝스의 실력을 잘 아는 기사단장은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다.

물론 작위는 없는 견습 기사 신세로, 병사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그럼에도 젝스는 개의치 않았다.

기사로서의 명예보다 에슬린 곁에 있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보다 더 편한 것 같긴 합니다.”

“편하다고?”

“기사단장께서 덜 찾으시거든요.”

“아하. 견습 기사를 예전처럼 부리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예전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치 디에리안 님처럼…….”

젝스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무덤덤하던 안색이 삽시간에 흙빛으로 물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길래…….

에슬린이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그렇게 잠시 걷다 보니 어느새 황자비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앞에는 하인들이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고 있었으므로, 이쯤에서 헤어져야 했다.

“그럼, 젝스 경.”

에슬린이 손을 내밀었다.

젝스는 어쩔 수 없이 바구니를 건네주었다.

“이따 봐.”

에슬린은 짤막하게 속삭이며 등을 돌렸다. 젝스는 꾸벅 인사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로즈벨, 향유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수석 하녀가 다가왔다. 그녀는 아주 퉁명스러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여기 있어.”

하녀의 손에 바구니가 넘어갔다.

“큼. 뭐, 잘 가져왔네.”

수석 하녀는 성의 없는 손길로 바구니를 뒤적였다.

이내 뭘 떠올렸는지 고개를 들고 씩 웃는다. 불안한 웃음이었다.

수석 하녀는 언제나 무리를 몰고 다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수석 하녀 뒤에 서 있던 하녀가 앞으로 나섰다.

“자, 그럼 이거.”

쿵. 잔뜩 쌓인 빨랫감들.

어떤 표정일까? 수석 하녀는 흘긋 에슬린을 훔쳐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처음과 똑같이 무덤덤할 뿐이었다. 괜스레 배가 뒤틀렸다.

“혼자 끝낼 수 있지? 넌 우수하잖아.”

에슬린은 눈을 들어 수석 하녀를 응시했다.

“뭘 그렇게 봐? 난 이 궁의 수석 하녀야.”

“누가 몰라?”

“하급 하녀인 너에게 업무를 지시할 권한이 있다는 말이지.”

수석 하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슬린이 뭐라고 대꾸하려는 찰나,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그래? 언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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