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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75화 (75/147)

75화

“메, 메리사 님.”

주황빛 머리의 시녀, 메리사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이쪽을 삐딱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으로 슥 하녀들을 훑었다.

“다들 할 일이 없나 봐? 연회가 코앞인데.”

못마땅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에 하녀들이 당황했다.

“그게 아니라 로즈벨이…….”

“이것들이.”

결국 메리사의 눈썹이 비쭉 치켜 올라갔다.

“빨리 하던 일들 안 해? 하녀장한테 이른다?”

그러자 하녀들이 생쥐처럼 후다닥 흩어졌다.

메리사는 하녀들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한참을 씩씩대고 서 있었다.

에슬린 또한 그 뒤를 따르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너!”

뾰족한 목소리가 다시 허공을 갈랐다.

“넌 나 안 따라오고 뭐 해?”

까닥, 까닥.

고운 검지가 다소 불량한 모양으로 흔들렸다.

* * *

“적어.”

발치에 펜과 종이가 떨어졌다. 에슬린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뭘 적어요?”

“걔네들 이름.”

메리사가 씨근대는 얼굴로 말했다. 에슬린은 무슨 소리인지 잠시 생각하다 곧 웃음이 터졌다.

“구박데기 주제에…… 웃음이 나오지? 빨리 너 괴롭히는 것들 이름 적어. 혼쭐을 내 줄 테니까!”

“전 진짜 괜찮아요. 그 애들은 괴롭히는 거 아니에요.”

에슬린은 종이와 펜을 다시 메리사에게 넘겨주었다. 안심하라는 듯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게 괴롭히는 게 아니면 뭐야? 한겨울 심부름은 온통 너한테 다 떠넘기고!”

“그건…… 아무튼 진짜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와작, 메리사가 손안에 든 종이를 구겼다.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누명을 벗고 돌아온 에슬린은 어째서인지 하녀들에게 묘한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특히 수석 하녀가 유독 심했다.

‘잘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저 다시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따돌리다니.

‘사실 괴롭히는 데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메리사는 답답한 듯 가슴을 퍽퍽 쳤다.

‘저 아무렇지 않은 표정 때문에 더 약 오른 거 아니야?’

살짝 건드렸는데 타격감이 없으니 더 세게 때려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으이구!”

그녀는 에슬린의 등짝을 가볍게 쳤다.

“나도 모르겠다, 진짜!”

답답했으나 더 강요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제가 하녀들 일에 너무 간섭해도 오히려 역효과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왜 부르신 거예요?”

에슬린이 물었다.

메리사는 그제야 에슬린을 찾은 이유를 기억했다. 정신이 돌아왔다.

“아, 맞아. 드레스 때문에 말이야.”

그녀는 에슬린을 의상실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 드레스들과 장신구들이 두서없이 늘어서 있었다.

메리사는 그중 진한 푸른색 드레스를 가리켰다.

“어때? 괜찮을까?”

“좋은데요.”

에슬린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메리사의 얼굴이 그제야 환해졌다.

어쩐지 스승에게 칭찬이라도 들은 기분이다.

“드레스는 딱 알겠는데 장신구는 고민이야. 역시 다이아몬드로 할까?”

“그것보다는 진주가 좋겠어요. 너무 크지 않은 것으로요. 남부 진주를 취급하는 상인을 알아볼까요?”

아, 역시 커닝 최고.

메리사는 에슬린을 꼭 끌어안았다.

“나 네가 돌아와서 너무 좋아.”

그동안 파티가 적어서 다행이었지, 사실 막막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메리사는 에슬린이 오래오래 황자비궁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좋아. 만반의 준비는 마쳤어.”

다이아몬드를 정리하며 메리사가 중얼거렸다. 설핏 비장미까지 느껴지는 말투였다.

“근데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

“무슨 시간이요?”

“이번 연회까지 말이야! 아직도 한참 남았잖아!”

에슬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리페리우스 공작님의 승전 연회라니. 나 진짜 달력에 선 그으면서 기다리고 있다니까.”

‘리페리우스’라는 말에 에슬린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보석을 집어넣고 있던 메리사는 보지 못했다.

테베트는 그동안 한 번의 전쟁을 더 치렀다. 짧은 전쟁이었다.

그는 막 귀환한 참이었고, 이에 맞춰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야말로 온 황궁 사람들이 집중하는 초미의 관심사.

“갈 거지?”

에슬린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물론이에요. 꼭 데려가 주세요.”

“어머, 얘 좀 봐.”

메리사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 너도 공작님은 뵙고 싶은가 보지?”

“…….”

보고 싶으냐고?

답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그를 보지 못한 지 어느새 두 계절이 지나고 있었다.

“꼭 만나고 싶어요.”

적어도 먼발치에서만이라도 그를 보고 싶었다. 세피아에게 간간이 안부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마저도 그가 전장으로 떠나니 들을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알겠어, 알겠어.”

메리사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근데 그럼 레실리아 님 심기는 거스르지 마. 레실리아 님께서 안 된다고 하시면 나도 방법이 없으니까.”

“그건 걱정 마세요.”

에슬린 또한 메리사를 향해 마주 웃었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때까지는.

* * *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었다.

에슬린은 황자비궁을 빠져나왔다. 비밀 샛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어둠에 잠긴 황녀궁이었다.

스으윽. 낡은 문이 열렸다. 그녀는 주위를 경계하며 응접실로 올라갔다.

“거기까지 잘 훑어봤어?”

“예. 하지만 저는 뭐가 뭔지 잘…….”

“일단 분류라도 해 놓으라니까. 아, 거기 흐트러뜨리면 안 돼!”

“죄, 죄송합니다, 전하.”

문을 열자 두 쌍의 눈동자가 에슬린을 향했다.

“젝스 경은 학자가 될 자질이 없어.”

짧은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하소연했다.

그 뒤에는 뻘뻘 땀을 흘리고 있는 젝스가 보였다.

“훌륭한 기사가 굳이 학자가 돼서 뭐 해?”

에슬린은 피식 웃으며 응접실 가운데로 나아갔다.

“자, 네가 말했던 책들.”

에르단이 의자 위에 차곡차곡 쌓인 책을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는 온갖 책들과 자료들이 두서없이 늘어서 있었다.

잉크 냄새와 오래된 책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뒤섞였다. 밝기를 최소로 낮춘 램프의 불빛이 왠지 모를 비밀스러움을 자아냈다.

황량했던 황녀궁 응접실.

그곳은 어느새 비밀 연구실로 변모해 있었다.

“네가 말한 대로 100년 전 기록까지 뒤져 봤지만 별 소득은 없었어.”

“그래. 그럼 그보다 더 이전까지 거슬러 가 볼 수밖에.”

“이상하게 자료가 없단 말이지. 아무리 100년 전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옛날은 아닌데…….”

문득 에르단이 씩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대사 수업 좀 열심히 들을걸. 그 선생 머리카락이 가발인지 아닌지에만 몰두하지 말고. 그치?”

“그러게.”

철없던 시절의 일이 떠올라 에슬린은 피식 웃었다. 결국 가발이었던가, 아니었던가? 기억도 희미한 예전 일이었다.

의자에 걸터앉은 에슬린은 책을 집어 들었다.

“일단 살펴볼 수 있는 것부터 살펴보자. 젝스 경, 망 좀 봐 줘.”

“예, 주군.”

젝스는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사라졌다.

볼이 따끔거려 에슬린은 에르단이 가져온 연고를 발랐다. 찬 바람을 많이 쐬다 보니 피부가 금세 약해졌다.

“오늘도 향유 심부름을 다녀왔어?”

“응.”

에르단에게선 한참 말이 없었다.

“추운데…… 왜 사서 고생을 해? 그냥 내 궁 하녀가 됐으면 좋았잖아.”

“네 궁에서 편하게 먹고살라고?”

“좀 그러면 안 돼?”

에슬린은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그 반응을 예상했으면서도 에르단은 괜스레 심술이 돋았다.

“하여튼 저만 잘났지.”

그는 벽난로에 장작을 더 던져 넣고 돌아왔다.

“근데 카르단은 왜 이렇게 조용해?”

“그러게. 나도 그게 의문이야.”

카르단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황자비궁에 오지 않은 지도 오래였다.

적어도 디에리안이 결백을 주장할 때 발끈하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설마 타툴란이 곁에 없어서?”

에슬린이 중얼거렸다. 에르단의 표정이 눈에 띄게 딱딱해졌다.

“……진짜 카르단이 흑마법사를 곁에 뒀어?”

“그래.”

하, 거친 탄식이 터졌다. 흐릿한 불빛에 에르단의 눈빛이 급격히 싸늘해졌다.

“카르단이 정말 미쳤구나.”

그는 테이블 위로 확 몸을 숙였다.

“그래서? 흑마법사가 다시 언제쯤 나타나는지는?”

“디에리안이 알아보겠다고는 했지만…….”

예측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어쨌든 흑마법사를 물리쳐야 하는 건 변함없는 숙제였다. 에슬린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차라리 카르단에게 흑마법사가 붙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무슨 소리야?”

“둘을 한꺼번에 없앨 수 있잖아.”

사락, 사락. 고요한 가운데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잠시 정지했던 에르단은 에라이, 하고 펜을 내던졌다.

“나는 네가 어려운 걸 쉽게 얘기할 때가 제일 재수 없더라.”

쉽게 얘기한 건 아닌데.

그러나 에슬린은 굳이 덧붙이지 않고 웃었다. 쉽게 들렸다면 뭐, 정말로 쉽게 풀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 에슬린은 조심스레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아무도 모르는 길이라 들킬 염려는 없었다.

무사히 황자비궁으로 돌아와 사용인 별채로 들어가려는 때였다.

“로즈벨 너, 이 시간에 어딜 갔다 오는 거야?”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목뒤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천천히 몸을 돌리니 수석 하녀가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잠이 안 와서. 산책.”

“산책? 산책을 궁 밖에서 했단 말이야? 이 시간에?”

수석 하녀가 속삭였다.

기회를 포착한 눈빛이 달빛에 번들거렸다. 수석 하녀가 다시 입을 떼려는 찰나였다.

“크흠. 거기 뭐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하녀장님.”

건물 안에서 하녀장이 걸어 나왔다. 자다 깬 건지 작게 하품했다.

수석 하녀는 에슬린을 흘끔거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보기 드문 표정이었다. 맨날 무덤덤하더니. 저런 얼굴도 지을 줄 아는구나?

수석 하녀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둘 다 여기서 뭘 하고 있냐니까?”

“로즈벨이…….”

그녀는 잠시 말을 골랐다.

“낮에 잘못한 걸 혼내고 있었어요.”

스윽, 에슬린의 고개가 수석 하녀를 향해 돌아갔다.

“뭐? 이 시간에?”

“잘못은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죠.”

콧대 높은 말투에 하녀장은 조금 질린 기색이었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한밤중이지 않니.”

“네. 주무세요.”

하녀장은 다시 늘어지게 하품하며 사라졌다.

“…….”

정적이 흘렀다. 수석 하녀가 홱 에슬린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어때, 내 호의가? 너 빚진 거야, 나한테.”

에슬린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 고마우면, 그래…… 나랑 곧 있을 승전 연회 얘기나 좀 해 볼까?”

꾹, 하녀의 손이 에슬린의 어깨를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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