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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76화 (76/147)

76화

“이번에도 대승을 거두셨다 들었습니다.”

기사단장이 말했다. 그는 흘끔 옆에 선 남자를 훔쳐보았다.

막 전장에서 돌아와 그런가?

왠지 더 커다랗고, 위협적이시고 막 그런 것 같은데…….

“하하.”

기사단장은 땀을 닦았다.

병사들이 훈련하는 소리가 연무장에 우렁차게 울렸다.

“각하께서 훈련을 봐주시니 애들 기합이 더 확! 들어간 것 같습니다.”

껄껄, 기사단장이 연무장을 바라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바위처럼 선 남자에게선 당연히 웃음 한 자락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테베트를 훔쳐보았다.

‘조각상도 이보다 완벽하지는 않겠네.’

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빚어낸 듯한 얼굴과 빈틈없이 단련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인함. 조금 낯이 어두운 듯 보였으나…… 그마저도 묘한 분위기로 느껴질 뿐.

‘저러니 하녀들이고 시녀들이고 너 나 할 거 없이 훔쳐보려고 줄을 섰지.’

기사단장은 속으로 끌끌 혀를 찼다. 반쯤은 부러움이었다.

“종종 와 주시면 좋겠지만…… 뭐어, 어려우시겠죠?”

그는 어색하게 질문을 던졌다. 답은 의외로 금방 돌아왔다.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오도록 하지, 기사단장.”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말씀만이라도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수도엔 얼마나 머무실 생각이십니까? 역시 승전 연회가 끝나면 돌아가시는 겁니까?”

“그건 잘 모르겠군.”

잠시 침묵하던 테베트가 덧붙였다.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르지.”

기사단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호. 그것참. 혹시 또 전쟁이 있을 예정입니까? 아직 신전에서는 아무런 예측도 나오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테베트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연무장 한켠에 가서 멈추었다.

하인들이 번들번들 빛나는 갑옷을 들고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기사들도 새로 들어왔나?”

“예. 꽤 우수한 놈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기사단장이 이를 드러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너무나 만족스러운 나머지, 붙이지 말아야 할 사족을 붙여 버렸지만.

“역시 제일 큰 수확은 젝스 에티우드가 돌아온 겁니다.”

“젝스 에티우드?”

“예. 뛰어난 실력자이자, 황녀님의 호위 기사였던…….”

기사단장의 안색이 퍼렇게 물들었다.

미쳤구나. 아무리 상대가 말을 받아 주었기로서니.

방정맞은 주둥이가 결국 일을 치고 말았다.

“황녀?”

테베트가 되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어조였다.

하지만 당황한 기사단장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 잊어 주십시오, 각하. 실언했습니다.”

죽은 황녀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가 꺼리는 주제였다. 1황자가 건재한 이상, 조심해야 했다. 아직은.

그건 기사단장이 이를 악물고 젝스 에티우드에게 말단 견습 직위를 내준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렇게 조심해 놓고. 이 미친놈아.

하물며 황녀를 직접 죽인 남자의 앞이었다.

“……황녀?”

그가 재차 중얼거렸다. 아주 생소한 것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참 분별없이…… 죄송합니다, 각하!”

테베트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기사단장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에슬린 베르타니아 황녀, 그대가 마실 독배를 가져왔다.’

섬광 같은 기억이 스쳤다.

아, 에슬린 베르타니아 황녀.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제 손으로 죽인 여자인데.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뭐지?

‘이번엔 안 돼요. 당신이 또 그런 짐을 지는 건 사양이니까.’

그 순간 뇌 속에 번개가 치는 듯했다.

윽. 그가 짧게 신음을 삼켰다.

“각하?”

제가 기억하는 황녀의 얼굴이 아닌, 다른 얼굴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하녀.

그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에슬린 로즈벨.

‘이번엔……이라고?’

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동시에 잊었던 충격이 온몸을 뒤덮었다.

‘그러고 보니 왜 그녀를 잊고 있었지?’

그 하녀를. 에슬린을. 언제부터?

마치 처음부터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기억해선 안 되는 것처럼.

어디선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제 심장에서, 중요한 조각이 빠진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때였다.

“……!”

그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벌어졌다.

연무장 가장 끝 울타리 너머.

하늘하늘 흔들리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각하?”

테베트는 자기도 모르게 달려 나갔다.

“각하!”

무작정 그녀를 쫓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강렬한 충동이 그를 움직였다.

모든 세상이 흑백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저 멀리, 유일한 색을 가진 무언가의 존재를.

그는 멈추지 않았다.

연무장 바깥으로 허겁지겁 달려가 그녀가 있던 울타리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

그러나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환영이었던 것처럼.

손 닿으면 사라지는 신기루와도 같이.

“하.”

그는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쿵쿵쿵. 사라진 줄 알았던 심장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날뛰었다.

“……드디어 미쳤나 보군.”

빈손을 내려다보던 테베트가 그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젠 헛것을 보고 달려 나가는 지경이라니.

그는 비식비식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잊은 게 뭘까?

‘생각하지 마, 떠올리지 마!’

발버둥 칠수록 진창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마음은 끊임없이 추락했다.

* * *

에슬린은 돼지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하는 돼지를.

“그래서 말입니다! 그 레비브의 산에서 왜 전하께 추적 마법을 걸 수 없었는지 알았지 뭡니까! 그걸 알았을 때의 제 기분을…… 전하께서는 아마, 절대, 결단코 이해하실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절 다짜고짜 남부로 보내신 거겠죠. 일언반구도 없이!”

돼지는 한시도 쉬지 않고 말했다.

“하여튼 여기 분위기는 그렇게 썩 좋은 편은 아닙니다. 하긴. 열병이 기승인데 분위기가 좋을 수 있겠습니까? 가끔 멍청한 남부 놈들이 제게 달려와 병을 고쳐 달라고 하는데. 하! 제가 마법사지, 의원입니까? 치유 마법의 근본은 응급 처치와 고통 경감인데, 그 기본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발상에 정말…….”

에슬린은 이마를 짚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에르단이 데굴데굴 눈동자만 굴렸다.

“……그렇게 사흘 밤낮을 기다린 끝에 재료를 구할 수 있었죠. ……흠. 제가 얘기를 너무 생략한 것 같은데,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드디어 본론!

“연구는 끝나 간다는 겁니다. 펠리서스 마법석에 대한 재생 연구요.”

순식간에 모든 걸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흑마법에 대한 추적은 솔직히 큰 수확이 없었습니다만…….”

돼지의 목소리가 조금 풀 죽은 듯 가라앉았다.

“어쨌든 조만간 한번 돌아가겠습니다.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드릴 겸 해서요.”

지금까지 한 것은 보고가 아니란 말인가!

에슬린은 참담한 마음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그보다 성배에 대한 조사는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이제 그 악마가, 큼. 공작이 돌아왔으니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나저나 이 소통 수단은 정말 괜찮군. 전서구 마법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어. 다음엔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꽥. 에슬린은 돼지를 흐트러뜨렸다. 푸르게 빛나던 환영은 곧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차라리 전서구 마법이 낫겠어, 디에리안.

에슬린은 먹먹한 귀를 붙들고 생각했다.

“돼지 목청 한번…… 좋네. 근데 왜 돼지……?”

마찬가지로 혼이 다 빠진 듯한 에르단이 중얼거렸다.

그의 안색이 까매 보이는 건 비단 어슴푸레한 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뭐냐…… 정리하자면.”

“펠리서스를 고쳐서 조만간 돌아오겠다는 소리네. 흑마법은 아직이고.”

에슬린이 간단히 정리했다.

다른 말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기억할 필요가 있을까?)

펠리서스에 대한 연구가 순조롭다는 그의(정확히는 돼지의) 목소리만이 맴돌았다.

다시 온전한 펠리서스를 그에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에슬린의 눈이 크게 일렁였다.

‘계속 함께할 수 있어.’

어쩐지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리페리우스 공작에게 성배에 대해 물어볼 거야?”

에르단이 말했다. 에슬린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러게.”

정면 돌파를 할 것인가?

에슬린은 고민했다.

테베트는 성배를 찾기 위해 마물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적어도 기억을 잃기 전에는.

디에리안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남부로 떠나기 전 이를 에슬린에게 알려 주었다.

‘성배를 찾겠답시고 마물 서식지를 뒤지던 건 그 인간이었습니다. 뭐, 어디까지 확신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테베트는 만날 수 없었다. 심지어 곧 전쟁터로 떠나 버렸다.

그리고 지금.

에슬린은 에르단과 황궁 도서관을 뒤지며 마물에 대한 기록을 살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고대 서적까지 손대게 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계속 생각하던 건데.”

에슬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테베트 경은 어디서 그 정보를 얻은 걸까?”

“무슨 소리야?”

에슬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내를 돌아다니며 입술을 뜯었다.

“왜냐면…… 우리가 황궁 도서관을 모두 뒤졌잖아. 그런데도 성배가 마물 서식지에 있다는 정보는 없었어.”

“…….”

“그런데 테베트 경은 뭘 보고 확신을 얻은 거지?”

그건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에슬린이 내내 품고 있던.

“테베트 경에게 성배를 찾으라고 한 건 나야. 내가 죽던 날.”

에르단이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 이상 알려 준 기억은 없어. 나도 몰랐으니까.”

“공작만 갖고 있는 다른 정보가 있단 소리네.”

에르단은 길쭉한 손가락으로 턱을 문질렀다. 생각에 빠진 얼굴이었다.

“……역시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를 것 같은데.”

“누구한테? 디엘?”

“아니.”

그가 허리를 바르게 세웠다.

짙푸른 눈동자가 흐린 달빛에 은은하게 빛났다.

“테베트 리페리우스 공작.”

“…….”

“때마침 돌아왔잖아.”

에르단이 선택한 건 정면 돌파였다.

쌍둥이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 대부분 의견이 일치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연회가 바로 내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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