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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77화 (77/147)

77화

‘거봐요. 내 말이 맞았잖아요.’

‘포기하지 않고 와 보기를 잘했죠?’

“…….”

테베트는 눈을 떴다. 꿈인지 환청인지 모를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또다. 또 그 여자의 환영이다.

그는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습관처럼 엄지 끝으로 음각된 천칭을 쓰다듬었다.

푸른 새벽의 기운이 집무실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곧 태양이 떠오르겠지만, 테베트가 있는 곳까지는 닿지 않을 터다.

그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빈 복도를 걷고 있자 제롬이 다가왔다.

“각하, 또 잠을 못 주무신 겁니까? 이따 연회에 가셔야 할 텐데요.”

최근 몇 개월간 테베트의 불면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어제도, 그제도, 하물며 일주일 전에도.

테베트가 침실에 가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정말, 대체 언제 주무시는 거지?

제롬은 순간 오싹해졌다.

“보고할 게 있어서 찾아온 거 아니었나? 할 말 하고 가 봐.”

테베트가 귀찮다는 어조로 말했다.

“예? 예에…… 그럼 새벽에 공작령에서 올라온 소식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남부로 가는 지원품에 대해서 먼저…….”

웅웅. 모든 소리가 그렇게 들렸다.

테베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두통은 멈추지 않았다. 시야가 혼탁하고 귀가 먹먹했다.

‘테베트 경.’

꿈속 목소리와 제롬의 말소리가 함부로 뒤엉켰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부유하는 듯한 감각은 오래된 것이었다.

“……인데, 마물 사체는 어떡할까요?”

“뭐?”

“예?”

제롬이 토끼 눈을 하고 되물었다.

잠자코 있던 테베트에게서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무슨 소리지?”

테베트는 미간을 구겼다.

제롬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지금까지는 마물 사체를 직접 확인하고 태우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나? 테베트는 기억을 더듬었다. 제롬에게 들으니 비로소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순간부터.

그것도 꽤 필사적으로…….

“이번엔 그냥 귀환하시기에 한 번 여쭤본 것뿐입니다.”

“내가 직접 처리했다고?”

“예. 그렇습니다만…….”

테베트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제롬이 흘끔흘끔 그의 안색을 살폈다.

“왜?”

“글쎄요. 끝까지 잘 살펴야 한다고만 하시고…… 아, 설마 기억 안 나십니까?”

제롬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졌다.

역시 마법사를, 의원을, 중얼거리는 제롬의 목소리가 다시 멀어졌다.

“…….”

테베트는 과거의 제 행동이 이해되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랬지?

‘뭔가를 찾기 위해서.’

답은 어렵지 않게 튀어나왔다.

그는 마물 사체를 파헤치면서 뭔가를 끊임없이 찾고 있었다.

그런데 뭘?

‘베르타니아의 성배.’

손끝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왜 리페리우스가 베르타니아의 성배를 찾는가?’

갑자기 깨달은 사실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의문은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들어 왔다.

‘대체 누구에게 바치기 위해?’

카르단 베르타니아?

에르단 베르타니아?

하지만 그 누구와도 그럴싸한 접점은 없었다.

‘아니, 아니야.’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접점이 없는 게 아니다.

‘잊어버린 거다.’

그러니까 그 말인즉…….

잃어버린 기억 속에 자신이 성배를 찾던 이유가 있다.

‘만약 누군가…… 리페리우스를 이용하려 한 거였다면.’

테베트는 다시 검에 손을 얹었다.

리페리우스의 천칭. 그 문양을 손바닥에 새길 기세로 움켜쥐었다.

‘기억을 찾아야겠어.’

리페리우스를 위협하는 자가 있다면 죽여야 한다. 자신은 리페리우스를 위해 살아야만 하니까.

그러지 않았을 때 일어났던 일들.

사티나의 잘린 팔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악몽들. 그걸 반복할 수는 없었다.

“제롬, 마법사를…….”

“예?”

테베트는 입을 다물었다.

마법사를 부르라 하려던 말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역시 기억이 조금 돌아온 건가요?’

테베트는 마법사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에슬린 로즈벨.

그 하녀에게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젠장.’

떠올리기만 해도 숨통이 트이는 이 기분은 설명이 안 되니까.

“그 하녀.”

“하녀요?”

“롭시온에서 행방불명된 하녀는 지금 어디에 있지?”

“…….”

제롬이 물끄러미 테베트를 보았다.

“각하……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그제야 테베트의 시선이 제롬에게 향했다.

“황궁 하녀로 있는 걸, 지금까지 모르셨습니까?”

테베트는 길게 눈을 깜빡였다.

“여름에 꽤 유명했던 얘기라 알고 계셨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프레이 백작가 장남이 누명 벗은 일 말입니다. 그때 함께 휘말렸던 하녀가 그 롭시온 하녀 아닙니까?”

“…….”

“하긴. 하녀 얘기에 누가 관심 갖겠습니까마는.”

테베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제롬은 그런 테베트의 눈치를 살피다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저택에도 찾아왔었는데…….”

“뭐?”

테베트가 제롬에게 한발 다가섰다.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누가 찾아왔다고?”

“그, 하녀 말입니다. 초가을쯤에 각하를 뵙겠다고…… 저, 무섭게 왜 이러십니까……?”

하, 테베트의 입에서 헛숨 같은 바람이 새어 나왔다. 그의 표정이 졸지에 다급해졌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전 보고드렸습니다……. 각하께서 바쁘다고 만나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테베트는 숨이 막혀 그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날 사티나 님이 급한 일로 찾으셔서, 시종을 통해 보고드렸습니다. 설마, 전달 못 받으셨습니까?”

“처음 듣는 말이다.”

“……그럼 그 시종이 한 말은 뭐지?”

제롬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테베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사티나가 중간에서 분탕질을 친 모양이었다.

‘찾아왔었다고?’

순간 대각선에 있는 커튼이 펄럭였다. 하녀들이 채 닫지 못한 창문에서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다시 그곳에서 나부끼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보았다.

황궁에 있다고.

그렇다면 그건 환영이 아니었던 걸까?

그는 커튼으로 걸음을 옮겼다.

흩날리는 커튼에 손을 뻗자 환상 같던 연보랏빛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왜 찾아온 걸까?’

꽈아악. 그는 커튼을 쥐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떠난 것에 대한 변명?

아니면 목을 벤 것에 대한 원망?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거짓말?

아니면,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하고 있으니까요.’

왜일까? 그 말이 떠오른 건.

* * *

그날은 아침부터 모든 이들이 분주했다.

“드레스! 목걸이! 머리 장식!”

“네, 네!”

메리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 탓에 에슬린을 비롯한 하녀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메리사가 혼비백산할 때마다 에슬린은 제 시녀를 떠올렸다.

‘로사나도 저랬나?’

에슬린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안 저랬던 것 같은데.’

제 시녀가 분주할 때는 늘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 메리사처럼 뛰어다니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폭풍 같던 시간이 지났다.

메리사는 드레스 룸 한가운데서 구슬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레실리아 님…….”

치장을 마친 거울 속 레실리아는 우아하게 웃었다.

“고맙구나. 오랜만에 황궁 파티인데, 덕분에 기대가 아주 커.”

그녀는 제 푸른색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실루엣 자체는 화려할 게 없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심하게 세공한 보석과 촘촘히 잡은 주름이 고급스러움을 더하는 디자인이었다. 과하지 않은 데서 오는 우아함. 오늘 같은 연회에 딱 어울리는 드레스였다.

메리사가 레실리아의 목에 광택이 흐르는 진주를 걸어 주었다.

“어머, 남부 진주구나. 이토록 고급스러운 광택은 처음이야.”

“완벽한 연회가 될 거예요.”

후후, 레실리아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황제 폐하께서도 오신다니 말이야.”

잘 익은 홍옥처럼 발그레하던 볼이 기대감으로 더욱 부풀었다.

“요즘 많이 회복하셨다더니, 파티에 나오셔도 괜찮으시대요?”

“그래. 의원이 큰 무리만 하지 않으시면 문제없으실 거라고 했다더구나.”

“잘된 일이네요. 오랜만에 뵈시는 거죠?”

“그래.”

에슬린은 가만히 바닥의 무늬를 응시했다.

과연 그럴까?

황제의 병은 오래되고 깊은 것이었다. 분명 일시적으로 좋아진 것에 불과할 텐데.

‘부황이 고집을 부리셨군.’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파티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황제를, 감히 누가 말리겠는가?

“전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그래, 가자.”

레실리아는 목걸이를 걸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마차에 오르려다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저나, 수행 하녀들은?”

“아, 그게…….”

메리사가 슬쩍 에슬린을 바라보았다.

“저 뒤에 짐마차를 타고 올 거예요.”

“그렇구나. 방석 같은 거라도 좀 가져다주라고 하렴. 불편하지 않게.”

“그럴게요.”

레실리아는 빙긋 웃으며 마차 안으로 훌쩍 들어갔다.

“미안, 로즈벨.”

메리사가 눈썹을 떨어뜨리며 속삭였다. 잠시 머뭇거리다 레실리아의 마차에 올라탔다.

휙, 에슬린의 어깨 옆으로 수석 하녀가 지나갔다.

“집 잘 지켜.”

수석 하녀가 킬킬 웃으며 멀어졌다. 다른 하녀들과 함께 짐마차에 타는 모습이 보였다.

다각, 다각.

황족의 마차가 멀어졌다. 그 뒤로 온갖 진상품과 함께 사용인들이 탄 마차가 황자비궁을 떠났다.

“…….”

에슬린은 어디에도 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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