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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78화 (78/147)

78화

“그럼…… 가 볼까.”

에슬린은 모든 마차가 떠나는 걸 지켜본 뒤 몸을 돌렸다.

황자비궁 뒤편, 인적이 드문 길에 소박한 마차 한 대가 있었다.

“야, 타.”

마차와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차림을 한 황족이 불량하게 말했다.

“너 뭐 해?”

“그거 알아? 젝스 경네 나라에서 전해 내려오는 얘긴데.”

에르단은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계모와 언니들에게 괴롭힘 받던 막내가 정체 싹 숨기고 호박 마차로 파티에 가거든. 거기서 왕자님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뭔 헛소리야. 여기서 뭐 하냐니까?”

에슬린은 참지 못하고 역정을 냈다. 에르단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젝스 경, 황자랑 여기서 뭐 해?”

이번엔 화살이 마부석에 앉은 젝스에게 향했다.

“죄송합니다, 주군. 에르단 전하께서 막무가내로…….”

“젝스 경 노려보지 말고 그냥 타. 데려다줄 테니까. 연회장까지 걸어서 가려면 너 늦어. 알잖아?”

에슬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탈 마차는 따로 있어.”

“엥?”

에르단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궁내부 마차 탈 거라고. 연회장에서 일할 하녀들은 그 마차 타고 간단 말이야.”

에르단은 창틀에 기댔던 고개를 그제야 떼어 냈다.

“그 말을 왜 이제 해!”

“내가 어제 했는데, 취해서 못 들은 거 아니야?”

어젯밤 느닷없이 황녀궁에서 와인 나발을 불던 에르단이 떠올랐다.

에슬린이 레실리아의 수행 하녀가 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이었다.

“당연히 몰래 잠입하는 줄 알았는데!”

으아아. 에르단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려다 말았다. 완벽하게 세팅한 머리를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나 젝스 경이랑 뭐 한 거야 그럼?”

“글쎄. 삽질?”

에슬린은 싸늘하게 대꾸하곤 마차를 스쳐 지나갔다.

“젝스 경은…… 나중에 궁에서 보자.”

얼음처럼 굳은 젝스의 안색이 퍼레졌다.

쿵짝 잘 맞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에슬린은 궁내부로 향했다.

거기엔 짐수레와 비슷한 마차가 있었다. 하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는데, 에슬린 또한 거기에 섞여 들었다.

“다 탔느냐?”

관리가 말하자 하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에슬린은 그 짐수레에 실려 연회장으로 향했다.

방법이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지.

하녀여서 좋은 점은 황녀보다 자유롭다는 점이었다.

탈탈탈. 마차가 굴러갔다.

‘계모와 언니들에게 괴롭힘받던 막내가 정체 싹 숨기고 호박 마차로 파티에 가거든. 거기서 왕자님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문득 에르단이 말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제야 참았던 웃음이 터졌다.

결말이라도 들어 둘 걸 그랬나?

그래서 그 막내는 왕자님에게 정체를 밝혔는지.

왕자님은 정체를 숨긴 막내를 용서했는지.

그래서 결국 둘은 무사히 이어졌는지…….

* * *

황궁 제1 연회장은 벌써 북적거렸다.

이르게 도착한 레실리아는 연회장 입구부터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폐하!”

연회장 가장 안쪽에는 높은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황족들의 자리였다.

그 가운데에 앉은 것은 로텐 베르타니아.

베르타니아 제국의 황제였다.

“오, 나의 며느리가 왔구나! 어서 오너라!”

황제는 겨울나무처럼 바싹 마른 손으로 그녀를 반겼다.

그의 오른쪽에는 황후가, 왼쪽에는 카르단이 앉아 있었다. 레실리아가 웃는 낯으로 다가가 살짝 무릎을 굽혔다.

“이렇게 나와 계셔도 되는 것입니까? 오랜만에 뵈어 전 너무 기쁘지만…… 걱정됩니다.”

“하하! 날 걱정해 주는 건 너뿐이구나!”

황제가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정말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듯, 목소리만큼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과연, 과거 천하를 호령했던 남자의 기세는 쉽게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투병 탓에 바싹 마른 몸과 거무죽죽한 안색은 쉽게 감출 수 없었다. 그 위에 걸친 화려한 황궁 연회복이 그에겐 무거워 보일 정도였다.

“오늘은 상태가 좋아! 게다가 오랜만에 승전 연회라니. 몸에 좋은 것들이 많이 들어올 것 아니냐?”

“아버지께 말씀드려 모리어스 영지에서 나는 귀한 음식과 약재들을 가져왔습니다.”

“하하하하! 역시 내 며느리뿐이로다! 당장 가져와 보거라! 당장!”

“예.”

푸른 눈동자가 탐욕스럽게 번들거렸다.

그는 몸이 아프고 난 뒤, 광적일 정도로 건강한 음식과 비약 같은 것에 집착하곤 했다.

건강만 되찾으면 과거의 영광이 다시 오기라도 할 것처럼.

황제의 야욕은 기이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앉아라, 앉아! 다리 아프게 서 있지 말고!”

“예, 폐하.”

레실리아는 방긋 웃으며 카르단 옆에 가 앉았다.

하녀들이 간단한 식전주를 내왔다.

“어? 너…….”

레실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식전주를 가져다 놓는 하녀의 얼굴이 어쩐지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궁내부에서 일손이 부족하다고 연락이 와서요.”

황자비궁의 하녀, 에슬린 로즈벨이 작게 속삭였다.

레실리아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뒤에서 시중을 들던 메리사와 하녀들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슬린은 잔과 술을 내려놓고 재빠르게 사라졌다.

황제와 황후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게, 아무리 배포 큰 하녀라도 진짜 호랑이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2황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동시에 에르단이 도착했다.

“에르단, 늦었구나.”

잠자코 있던 황후만이 에르단을 반겼다. 그러나 그는 황후도 본체만체하며 자리에 앉았다.

“음, 이 술은 어디에 좋은 거지?”

황제는 에르단 쪽엔 눈길도 주지 않고 술잔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근처 시종들이 뭐라고 속삭이자 껄껄 웃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리페리우스 공작은? 만찬은 언제야?”

황제가 고함처럼 물었다.

그러자 황금으로 장식된 아치문이 열렸다.

화려한 연회 음식이 들어왔다.

황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귀한 음식들이 한데 모였구나!”

그는 접시까지 씹어 먹을 기세였다. 잠자코 있던 황후가 결국 한마디를 보탰다.

“과한 건 좋지 않습니다, 폐하. 위장을 자극하지 않는 것만……”

“과하기는!”

탕! 그가 별안간 쥐고 있던 포크를 내던졌다.

“내가 잘 먹고 잘 마시겠다는데, 황후는 뭐가 과하단 말이오?”

이해할 수 없는 노성이었다.

웃고 떠들던 귀족들이 동작을 멈추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황제 노릇을 좀 하시더니, 이젠 나도 우습게 보이시나 보오.”

“폐하!”

그렇게 소리친 건 근처에 있던 황제의 측근들이었다. 황후는 처음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황제가 입술을 말아 올렸다.

“아니면 혹시…… 황후께선 내가 영영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셨소?”

“…….”

황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넓은 연회장에 숨 막히는 정적이 깔렸다. 그 누구도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했다.

“하하하하!”

그때 황제가 벼락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겁먹긴! 농담 좀 한 것 가지고!”

그는 바싹 마른 손을 들어 황후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황후, 부인. 농담이오, 농담. 그렇게 얼어붙어선…… 오늘처럼 좋은 날에 잔소리를 들으니 서운해서 말이야. 오랜만에 내 아들들과 며느리가 함께하는 기쁜 자리지 않소.”

다정을 가장한 말투였다.

황후는 황제의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얼음 같던 얼굴에 그제야 우아한 미소가 걸렸다.

“서운하셨다니 마음이 아픕니다. 제가 폐하의 기분을 고려하지 못했군요.”

그러자 황제가 더 크게 웃었다.

“갑자기 소리를 쳐 미안하오.”

황제의 얼굴이 풀리자 연회장의 공기 또한 부드럽게 풀렸다.

눈치껏 악사들이 들어왔다.

음악이 시작되자 분위기는 금방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부황께서는…… 너무 오래 앓으셨군.’

기둥 뒤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에슬린은 착잡하게 생각했다.

아주 어린 시절, 그녀에게 아버지는 태산보다 크고 바위보다 단단한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저 모습은 어떤가?

물론 아프게 된 게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더 이상의 현명함도 총명함도 느껴지지 않는 군주의 맨얼굴 앞에서 에슬린은 이유 모를 씁쓸함을 느꼈다.

그때 문지기가 크게 외쳤다.

“리페리우스 공작께서 드십니다!”

재잘대던 음성들이 거짓말처럼 뚝 멈추었다.

크고 웅장한 정문이 천천히 열렸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깨끗한 바람이 내부를 크게 휘돌고, 후덥지근하던 연회장의 공기가 삽시간에 상쾌해졌다.

그 청량함을 몰고 테베트가 등장했다.

‘테베트 경……!’

에슬린은 기둥 뒤 그림자에 더욱 몸을 묻었다. 어차피 수많은 하녀에게 가려 보이지 않겠지만, 아직 테베트에게 모습을 들킬 수는 없었다.

그와 만나는 건, 이 연회가 모두 끝난 후였으니까.

“세상에.”

“오늘도 참 완벽하시네…….”

“금가루라도 뿌린 것 같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올려 넘겨 매끈한 이마가 모두 드러나 있었다. 짙은 눈썹과 날카롭고 긴 눈매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깎아지른 듯한 콧날과 왼쪽 눈 밑에 난 작은 점. 그 끝이 살짝 올라간 모양 좋은 입술까지.

저벅, 저벅.

그가 넓은 홀을 가로지를 때마다 모든 사람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건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정작 화제의 중심에 있는 남자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

테베트는 황족의 단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검붉은 눈동자가 단상 위의 인물들을 느리게 훑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

검은 망토 자락이 허공에 나부끼며 리페리우스의 문장이 펄럭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하하! 리페리우스 공작! 이거 참, 오랜만일세.”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잠시 휘청이던 그는 시종의 부축을 받아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자네가 전장에서 세운 공을 치하해야지! 아무렴! 치하하고말고!”

황제는 껄껄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훈장! 훈장을 가져와라!”

“예, 폐하.”

황제의 손짓에 시종이 허겁지겁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벨벳보에 감싸인 귀한 상자 안은 번쩍번쩍한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내 직접 달아 주지!”

말과 달리 자꾸만 손이 헛돌아 결국 근처에 서 있던 시종이 대신 달아야만 했다.

황제는 호탕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우리 베르타니아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길 바라네!”

그러자 내내 무감하던 테베트의 얼굴에 희미한 조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황제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테베트 또한 귀족 자리 중 가장 상석에 가 앉았다.

“좋아! 귀한 음식을 더 내와라! 술도! 움직였더니 배가 고프구나.”

진짜 만찬이 시작되었다.

에슬린은 테베트가 앉은 자리를 몰래 흘끔거렸다. 사람들 틈에 가려 테베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에게 어깨가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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