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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79화 (79/147)

79화

“여기서 뭘 놀고 있는 거야? 음식과 술을 준비해, 어서.”

연회장의 하녀장이 다그치듯 속삭였다.

“네.”

에슬린은 연회장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수상해 보이지 않으려면 일을 해야 했다.

‘일단 들키지 않게…….’

그녀는 최대한 테베트와 떨어진 곳에서 움직였다.

부지런히 술을 나르고 음식을 가져다 놓았다.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에슬린은 주변을 정리하는 척 그 내용을 엿들었다.

“쯧쯔. 폐하께서 저렇게 드시다 탈 나시는 거 아니야?”

“그러게. 아무리 건강을 위해서라지만, 걱정되는군.”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황제는 게걸스럽게 음식 접시를 해치우고 있었다. 병자일 게 분명한데 저런 식욕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에슬린은 빈 접시를 겹쳐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짙푸른 눈동자가 주변을 길게 훑었다.

‘모리어스 후작과 프레이 백작이 안 보이네.’

“근데 거물급 두 사람이 안 보이는군?”

에슬린의 귀가 절로 쫑긋했다.

“누구?”

“모리어스 후작과 프레이 백작 말이야.”

제 속마음을 그대로 옮긴 듯한 말이었다.

“모리어스 후작은 영지에 바쁜 일이 있다며 오지 않았고, 프레이 백작은…… 어, 저기 있군.”

에슬린은 와인을 교체하며 슥 눈을 들었다.

‘카르단?’

어느새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카르단이 프레이 백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카르단은 그동안 왜 은둔한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카르단을 보는 건 엄청 오랜만인데…… 프레이 백작과는 무슨 용건이지?’

두 사람이 언제부터 접점을 가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안 들리네.’

자세히 듣기 위해 가까이 가려는 순간이었다.

쨍그랑!

“뭐야?”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접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간 에슬린 근처로 시선이 모였다.

“죄, 죄, 죄송합니다!”

접시를 놓친 어린 하녀가 연신 사과했다. 귀족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파티에 집중했다.

“…….”

에슬린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쪽을 바라보던 테베트도 눈을 깜빡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시선 교환은 아주 찰나였다.

혹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는 은잔에 담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답답했는지 맨 위의 단추를 가볍게 푼 차림이었다. 옷깃 사이로 굵고 강인한 목선이 드러나 있었다. 술을 마실 때마다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

먼저 고개를 돌린 건 테베트였다.

그는 무감한 얼굴로 다시 제게 말을 걸어온 사람들에게 파묻혀 버렸다.

“……모른 척한 거야, 지금?”

에슬린은 가만히 멈춰 섰다.

분주히 움직이는 하녀들도 지금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 허탈했다.

왜 여태껏 저 남자의 눈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어차피 아무 관심도 없는데.

‘뭘 기대한 거야?’

공작저에서도 바람맞아 놓고.

어쩌면 마음 한구석엔 직접 얼굴을 보면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갑게 맞아 주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외면도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완전한 투명 인간 취급…….’

눈앞에서 막상 겪으니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기억이 돌아오면, 감정도 돌아오는 게 맞는 걸까?

불쑥 위기감이 차올랐다.

에슬린은 터덜터덜 연회장 뒤로 들어갔다.

유령처럼 주변을 서성이고 있자 요리장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뭘 멍하니 있어? 할 일 없으면 창고에서 과실주나 가져와! 어서!”

그대로 연회장 샛문을 통해 바깥으로 내몰렸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바람이라도 맞으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 차려야 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갈까? ……성배 이야기를 물어봐야 하는데.’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심란한 기분과는 다르게 몸은 착실히 과실주 창고로 움직였다.

달그락, 달그락.

적당한 것들을 집어 바구니에 담았다.

“이제 어쩐다……?”

돌아오는 길은 아주 어둡고 추웠다. 연회장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등대 삼아 에슬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묵직하던 양손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

에슬린은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덤덤한 잿빛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깜짝이야…… 여기 와 있었어?”

젝스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받지 않은 기사는 안에 들어올 수도 없었을 텐데…….”

에슬린은 휘이잉 몰아치는 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설마 계속 밖에서?”

“주군께서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에슬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

“감기…… 귀여운 단어입니다.”

젝스가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가 감기에 걸린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듯했다.

“주군이야말로 그런 차림이면 감기 걸리십니다.”

넋이 빠진 채 나와 버려 겉옷조차 챙기지 못했다. 에슬린은 얇은 옷자락을 최대한 여미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이 좀 없어서.”

“그렇게 바쁘셨습니까?”

“그냥…… 좀 그랬어.”

빨리 가자, 에슬린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길은 어둑했다. 간간이 걸려 있는 가로등이 흐리게 앞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눈이 올 것 같아.”

에슬린이 중얼거렸다. 차라리 눈이라도 펑펑 내리면 이 기분이 좀 괜찮아질 것도 같았다.

코끝에 싸늘함이 맴돌았다. 에취, 작게 재채기하자 젝스가 제 망토 끈을 풀었다.

곧 어깨에 두껍고, 따뜻한 망토가 내려앉았다.

“이제 다 와서 괜찮아, 젝……”

……스 경.

그러나 에슬린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렇군.”

남자가 먼 하늘을 보며 긍정했다.

에슬린은 무심코 제 어깨에 내려앉은 망토를 바라보았다. 사실 볼 것도 없었다. 이 향기는 그립고도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눈이 오겠어.”

나직한 목소리가 허공을 메웠다.

어둠과 핏빛이 뒤섞인 듯한 검붉은 눈동자.

그 눈동자가 천천히, 굳어 버린 에슬린의 흰 얼굴에 닿았다.

“왜……?”

에슬린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탁. 테베트가 다급하게 그녀를 붙들었다.

“하.”

그에게서 탄식을 닮은 숨이 하얗게 터져 나왔다.

그는 제 망토 자락을 양손에 쥐었다. 그대로 끌어당기자, 에슬린이 훅 가까워졌다.

“……환영이 아니군.”

나직한 혼잣말에 에슬린의 정신이 돌아왔다. 젝스는 어느샌가 모습을 감춘 채였다.

남자는 화살 같은 시선을 에슬린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정말 테베트였다.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던 남자.

“여긴, 어떻게……?”

“당신 머리카락.”

남자는 뜬금없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눈에 띄어.”

“…….”

“어디 숨어도 다 보이거든.”

그 말은 처음부터 에슬린을 알아봤다는 말인가?

“그런데…… 왜 모른 척했어요?”

에슬린이 속삭였다.

“모르는 척하면 안 사라지니까.”

영문 모를 소리였다.

“하지만 늘 쫓아가게 돼.”

에슬린은 그 말뜻을 가늠해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테베트가 한 번 더 양손에 힘을 주었다. 에슬린이 속절없이 그와 더 가까워졌다.

“이제 진짜로군.”

어쩐지 갇혀 버린 기분이었다.

* * *

“그래서. 그렇게 떠나서 온 곳이 겨우 여기였나?”

그가 허리를 굽혀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대꾸를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잊힌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너무 가까웠다.

테베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을 만나면 물어볼 것들이 많았어.”

“…….”

“그날 왜 그렇게 떠난 건지, 그 마법은 무엇이었는지, 진짜 당신 정체는 무엇인 건지…….”

“테베트 경.”

“그래, 그 호칭.”

테베트가 눈썹을 구기며 웃었다.

“당신이 그 호칭에 익숙한 이유도 말이야.”

“저는…….”

“하지만 이제 됐어.”

그가 망토 자락을 내려놓았다.

바람을 막아 주던 돌벽 같던 몸이 멀어지자 찬 바람이 몰아닥쳤다. 에슬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어차피 대충 둘러대며 피할 테니까. 당신은 줄곧 그랬어. 그 산에서부터…….”

테베트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담담히 에슬린의 얼굴을 훑었다. 표정은 고요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에슬린의 모든 걸 파헤치겠다는 듯 날카로웠다.

“이것만 묻지. 당신은 내 기억에 대해 알고 있어. 맞나?”

“……맞아요.”

“내가 잃은 기억은 모두 당신과 관련한 거야. 이건?”

에슬린의 동공이 순간 떨렸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 동요는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에슬린의 모든 걸 주시하던 테베트는 금세 그 변화를 감지해 냈다.

“그 표정이 답이군.”

그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에슬린은 잠시 호흡을 고르고 천천히 입을 뗐다.

테베트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라면 때마침 그녀도 할 말이 있었다.

“테베트 경, 안 그래도 이야기하려던 참이었어요. 기억은……”

그때였다.

“거기 누구냐!”

얼굴 위로 노란 빛이 확 달려들었다.

“뭐야?”

에슬린은 눈썹을 찡그리고 팔을 들었다. 테베트가 본능적으로 그녀의 앞을 가리고 섰다.

착, 착, 착. 묵직한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횃불을 든 병사들이었다.

“무슨 일이냐?”

불쾌함을 담은 낮은 음성이 흘렀다. 에슬린은 제 앞에 선 커다란 등을 응시했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병사들이 술렁였다.

“리, 리페리우스 각하! 여기 계셨습니까?”

기사 한 명이 후다닥 달려왔다.

“대체 무슨 소란들이지?”

“크크큰일 났습니다!”

남자는 몹시 허둥대는 말투로 다급히 외쳤다.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음독 추정입니다!”

“뭐?”

테베트가 되물었다. 그러나 그는 딱히 당황하지 않은 듯했다.

어쩔 줄 모르는 것은 오직 저 기사와 병사들뿐이었다.

“이 근방을 통제하고 연회장을 봉쇄하라는 지시입니다!”

그때 병사 중 한 명이 주변을 들쑤시다 에슬린을 발견했다. 에슬린의 복장을 확인한 뒤 거칠게 혀를 찼다.

“넌 연회장에서 일하던 하녀냐?”

“그렇습니다만. ……읏, 왜 이래요?”

순식간에 그는 에슬린을 포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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