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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80화 (80/147)

80화

“조용히 해라! 연회장에서 일하던 하녀는 모두 지하에 가둬 두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하.”

짧은 숨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독이라고?

에슬린은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누가 황제를 독살한단 말인가?

황제는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놔두면 떨어질 낙엽이었다.

그런 그를 이런 공개된 장소에서, 굳이?

심지어 이 파티는 리페리우스 공작이 오기로 예정된 연회였다. 그 위험을 무릅쓸 사람이 과연 어디 있단 말인가?

‘누군가 쇼를 하는군.’

에슬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따라와!”

남자가 거칠게 소리쳤다.

그때 팔을 틀어쥔 손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물러서라.”

“각하? 한시가 급합니다!”

테베트는 병사를 떼어 내고 제가 직접 에슬린을 붙들었다.

올려다본 옆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했다. 팔뚝을 쥔 손은 최대한 힘을 주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다.

“내가 데려가겠다.”

그녀는 테베트의 손길에 이끌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연회장은 전쟁 뒤 폐허처럼 고요했다.

바닥에 떨어진 음식과 깨진 접시가 당시의 아비규환을 짐작하게 했다.

황궁 내 기사들이며 병사들이 모두 차출되어 주변을 들쑤시거나 보초를 서고 있었다.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테베트의 부관이 달려왔다. 제롬은 아니었다.

“각하! 황후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다른 이들은?”

“귀족분들은 위층에 마련된 별실에, 사용인들은 지하에서 대기 중입니다.”

테베트는 널따란 연회장을 길게 훑어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폐하께서 식사 중에 갑자기 토하시더니 쓰러지셨습니다. 황후께서 그 즉시 봉쇄를 명하셨죠.”

“폐하의 상태는?”

“지금 마법사들이 모두 왔습니다. 의원들도 도착했고요.”

잠자코 듣고 있던 에슬린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지금 의원이 왔는데 어떻게 독이라는 걸 알았죠?”

“그야 폐하께서 갑자기 토하며 쓰러지셨고, 누가 독이라고 외치는 바람에…… 근데 너 하녀냐?”

누군가 독이라고 외쳤다고?

에슬린은 가느스름하게 눈매를 좁혔다.

“하녀들은 모두 지하에 대기하라는 명령이다. 따라와!”

“멈춰. 내가 데려가는 중이니.”

테베트가 비스듬히 에슬린 앞을 막아섰다. 부관은 아주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각하, 지금 당장 황후 폐하께 가 보셔야 합니다.”

“…….”

“각하!”

하아.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 다시 데리러 가지.”

그는 짧게 속삭인 뒤 황후에게로 향했다. 에슬린은 부관에 손에 넘겨져 지하로 내려갔다.

“명령이 있을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거라.”

탕! 묵직한 철문이 닫혔다.

식재료를 보관해 두는 커다란 창고였다. 내부는 몹시 추웠고, 불빛이 적어 음산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뭐야, 우리 죽는 거야?”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무서워…….”

하녀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영문 모르고 끌려온 어린 하녀들이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에슬린은 한쪽 구석으로 가 벽에 기대앉았다.

스윽. 뭔가가 흘러내려 살펴보니 테베트의 망토였다.

그녀는 리페리우스의 문장이 보이지 않도록 망토를 뒤집어 어깨에 걸쳤다. 그 덕분인지 추위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선명한 테베트의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에슬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수석 하녀와 그 무리였다.

“너, 너, 어디 있었……!”

수석 하녀가 입술을 떨었다.

“누군가 온다!”

그때 하녀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두려움에 떨던 하녀들은 일제히 출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철컥,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여기 하녀들이 모여 있다고?”

“예, 전하.”

병사들과 등장한 건 카르단이었다. 저벅, 저벅 그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창고 안을 훑어보았다.

“흐음. 어디 보자…….”

그의 걸음이 창고를 길게 돌다 어느 곳에서 멈추었다.

눈이 마주쳤다. 바닥에 앉아 있던 에슬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카르단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래. 아까 연회장에서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에슬린을 발견한 건 테베트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너부터 심문해야겠다.”

에슬린은 기꺼이 함께 웃어 주었다. 바라던 바였다.

* * *

황궁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

베르타니아 신전.

커다란 메인 홀 내부를 어린 하인 하나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인은 제단 옆에 놓인 마법 화로를 열심히 닦고 있었는데, 그가 오늘 이곳의 청소 담당이기 때문이었다.

“아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폐하께서…….”

화로 옆면에 광을 내던 하인이 불안에 떨었다.

“그나저나 마법사님들이 안 계시니 참 조용하네…….”

괜히 더 썰렁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하인은 일부러 더 씩씩하게 몸을 움직였다.

“음?”

그때 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인가?

하인은 습관적으로 제단 뒤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가운데가 뻥 뚫린 커다란 아치문이 있었다.

“착각한 건가?”

문은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고 그저 테두리만 남아 있을 뿐이었는데, 모두가 그 문을 신의 문이라고 불렀다.

다른 말로 마우시스의 문.

어쩐지 바람이 부는 듯했다.

“바람?”

창문은 모두 닫았고, 출입구도 닫아 두었는데……?

“그, 그냥 이따 청소해야겠다…….”

하인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으앗!”

재차 진동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몸이 휘청일 만큼 강력했다.

“허어억! 저게 뭐……!”

어린 소년이 숨을 집어삼켰다.

텅 비었던 아치문 안쪽으로 검은 기운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마우시스의 문이…… 신의 문이……!”

그는 당장 달려 나가 도움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누구에게?

이 이상 현상을 감지할 만한 마법사가 신전에 없었다.

“뭐야…… 넌?”

검은 안개를 찢고 남자가 나타났다.

“마…… 마우시……!”

소년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검은 어둠이 그를 머리부터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풀썩, 소년이 쓰러졌다.

남자는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웃었다.

“마우시스냐고? 하! 그깟 나부랭이 신 취급을 한다니.”

노란 눈이 번들거렸다. 그는 오랜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아, 이 공기는 좋군! 참 좋아!”

치이익. 마법 화로에 손을 댄 남자가 주문을 외웠다.

정체 모를 물약을 만들어 낸 뒤 죽은 소년에게 먹이자 시체가 크게 경련했다.

“일단 널 좀 인형으로 부려야겠다.”

남자는 다시 마력을 움직여 제 얼굴도 손보았다.

카르단의 측근 마법사였던 바로 그 얼굴.

“흐음. 그럼 먼저…… 우리 황녀님이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부터 볼까?”

그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아! 벌써 즐거워! 설렘을 감추지 못하던 남자가 결국 허리를 꺾어 가며 웃었다.

같은 시각, 황녀궁.

검은 그림자가 텅 빈 황녀궁에 잠입했다.

쇠사슬을 풀고, 응접실에 들어선 그림자는 서슴없이 내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곧 숨겨 둔 여러 가지 물건들이 튀어나왔다.

고서, 자료집, 지도, 논문, 휘갈겨 쓴 메모, 편지, 그 밖의 다양한 연구 흔적들.

그림자는 깨달았다.

황녀가 이곳에서 성배를 찾고 있다는 것을.

* * *

“전하, 정말 혼자 심문하실 겁니까?”

“그래! 얼쩡거리지 말고 꺼져.”

탁, 카르단이 거칠게 문을 닫았다.

당황에 물든 기사의 얼굴이 사라졌다.

카르단은 곧바로 뒤를 돌았다.

“하!”

헛숨이 터졌다.

작은 응접실 가운데에 놓인 탁자에 하녀가 저보다 먼저 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방지긴.”

카르단은 비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역시 너였어.”

그가 탁자 위를 짚으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에슬린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땐 용케 도망갔겠다.”

카르단이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황궁 감옥은 어떻게 빠져나갔지? 누가 널 도왔는지 말해.”

에슬린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황제 독살과 전혀 관련 없는 것을 물었다. 그녀는 카르단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음?’

잘 지낸 게 아니었나?

반드르르하던 얼굴이 조금 까칠해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 밑도 검고 흰자는 벌겋게 핏줄이 서 있었다.

“이게 꿀을 먹었나!”

탕! 카르단이 탁자 위를 내리쳤다.

“대답해! 디에리안 프레이지? 그 마법사가 널 도운 거야!”

“이건 무슨 심문이죠?”

에슬린이 입을 열었다.

깨끗하지만 나직한 그 목소리에 카르단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어쩐지 익숙한 음성인 것 같기도 했다.

“질문하는 건 나야!”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심문이 아닌 건가요?”

“흥! 독살은 무슨! 어떤 덜떨어진 놈이 호들갑을 떨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부황을 독살해?”

카르단이 중얼거렸다. 에슬린은 고개를 기울였다.

카르단이 이 쇼를 꾸민 게 아니란 말인가?

“아무튼! 대답해. 역시 넌 디에리안 프레이와 한패지? 그 감옥에서 널 꺼낸 건 그 마법사가 틀림없어!”

그는 자꾸 다 지난 일을 추궁했다.

그날 감옥을 나갈 수 있었던 건 아서스 덕분이었고, 무사히 황궁을 빠져나간 건 에슬린이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모든 걸 말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지만.

침묵이 길어지자 카르단이 쾅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에잇, 젠장! 그럼 디에리안 프레이가 어디 있는지만이라도 말해!”

“디에리안 프레이를 왜 자꾸 찾는 거죠?”

“그건!”

에슬린은 그제야 카르단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불안해하는 건가?’

흡사 궁지에 몰린 생쥐 꼴이었다.

불현듯 연회장에서 프레이 백작과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 떠올랐다.

“마법사님을 왜 찾는 건데요?”

에슬린이 차분하게 물었다. 카르단은 분한 듯 가슴을 씨근덕거렸다.

“내 측근 마법사로 삼을 생각이니까!”

“뭐?”

에슬린의 입술에서 허탈한 숨이 흘렀다.

그녀는 카르단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불안한 시선, 초조한 얼굴, 디에리안을 찾는 다급함…….

그리고 확신했다.

‘타툴란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거군.’

그러니 몸이 달아 버린 카르단이 대체제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흑마법사에 버금갈 만한 마법사는 디엘뿐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별 같잖지도 않은…….”

“뭐라고 했느냐? 응?”

그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나 좀처럼 에슬린이 입을 열지 않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답 좀 해!”

성질을 참지 못하고 그가 검을 뽑아 들었다. 차가운 칼끝이 목 한가운데에 닿았다.

말 같지도 않은 말에 굳이 대답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에슬린은 싸늘하게 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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