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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81화 (81/147)

81화

“말하라고!”

길길이 날뛰는 카르단을 앞에 두고 에슬린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오늘은 정말이지 정신없고, 너무나 피로한 하루다.

테베트를 만나 기뻤는데, 마지막이 카르단이라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디엘을 측근 마법사로 삼아 뭐 하게?”

에슬린이 심문하듯 물었다.

“어떻게든 끌어들여서, 그걸 찾게 해야지!”

“그거?”

“성……!”

흥분한 카르단은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에슬린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타툴란이 성배로 카르단을 꼬드겼나 보네.’

거짓 충성을 맹세하고, 성배를 바치겠다고 했겠지.

카르단은 그게 제 목을 옭아매는 덫인 줄도 모르고 걸려들었을 것이다.

“하여튼 넌 예전부터 욕심이 많았어…….”

“뭐?”

카르단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에슬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네 뜻대로는 어려울 거란 소리야, 카르단.”

“이게 미쳤나!”

카르단은 손을 치켜들었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가득 찼다.

검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혼신의 자제력을 발휘해 내려치진 않았다.

아무리 하녀라지만 함부로 죽여선 안 된다. 차라리 쥐도 새도 모르는 곳에서…….

카르단의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빛이 스쳤다.

“어디, 내 궁에서도 건방 떨 수 있다고 보느냐? 팔다리 중 하나라도 잘리면 그땐 말할 생각이 들겠지.”

에슬린은 속으로 웃었다. 바라던 바였다. 카르단이 저를 데리고 나가 주면 그녀로서는 최고의 전개였다.

밖에는 젝스가 있다. 제 호위 기사라면 어렵지 않게 에슬린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일어나!”

카르단은 에슬린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대로 팔을 꺾어 한 손으로 포박했다. 거친 손길에 절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그 순간 에슬린은 카르단에게서 묘한 향기를 맡았다.

‘뭐지?’

달콤하고 매혹적인 향이었다.

‘향료인데. 레실리아 건 아니잖아.’

아하…… 그녀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참 부지런하시네.’

이 난장판에도 한눈팔 여유가 있다니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르단은 당당히 문가로 걸어갔다.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음?”

카르단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손잡이에 손도 안 댔는데, 왜 문이 열리지?

끼이익, 문은 아주 천천히 열렸다.

검고 매끈한 신발이 문틈으로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지금 설마 납치 현장을 보고 있는 겁니까?”

그렇게 말한 남자는 넓은 보폭으로 문턱을 넘었다.

“그런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카르단 전하.”

달칵. 응접실 문이 닫혔다.

“리……페리우스 공작? 돌아간 게 아니었나?”

카르단은 갑작스레 등장한 남자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남자의 시선은 카르단을 향해 있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가 에슬린을 붙든 팔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 손부터.”

검은 그림자가 카르단 위에 쏟아졌다. 카르단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놓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 이건! 그러니까 심문이야! 공작이 상관할 일이 아니란 말이지!”

“아하, 심문.”

테베트는 서늘하게 뇌까렸다.

“방금 음독이 아니라고 결론 났습니다. 그러니 심문은 여기서 끝입니다.”

“……결론 났다고?”

벌써? 카르단이 작게 덧붙였다.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카르단의 시종이었다.

“황자 전하! 폐하께선 음독이…… 어라?”

한발 늦은 시종이 고장 난 듯 버벅댔다. 제가 맞닥뜨린 상황을 이해해 보고자 잠시 눈만 데룩데룩 굴렸다.

“독살이 아니라더냐? 그럼 왜 쓰러지신 건데?”

신경질적인 물음에 시종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게 의원 말로는…… 약해지신 몸 때문에 위장 운동 능력이 급격히 저하해 산이 충분히 분비되지 못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식도까지 자극받아 역류를…….”

“뭐? 좀 간단히 말해 봐!”

“한마디로 과식하다 죽을 뻔했단 소립니다.”

테베트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시종은 땀을 삐질 흘리면서도 부인하지 못했다.

“……크흠.”

카르단이 괜스레 입술을 훑으며 헛기침했다.

대충 예상은 했으나 막상 들으니 에슬린 또한 어처구니가 없었다.

“부황께서…… 컨디션이 안 좋으셨나 보군.”

카르단이 혼잣말했다.

탁, 테베트가 다가와 카르단의 손을 떼어 냈다.

“이제 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 공작.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너무 무례하군.”

“무례라니. 도와드리는 겁니다.”

테베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웃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냉기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좋은 일이 있으셔야 할 텐데…… 나쁜 소문이라도 나면 큰일 아닙니까.”

그가 말하는 좋은 일이란 명백했다.

황태자가 되는 것. 황제가 저렇게 골골대니 아마 머지않았으리라.

“흥. 위선은.”

카르단은 투덜거렸으나 어쩔 수 없이 입매가 조금 풀어졌다.

“내가 자네한테도 할 말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

테베트는 딱히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저 제 옆에 서 있는 에슬린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내 편지를 그렇게나 무시해 대더니…… 뭐? 인제 와서 기억이 혼란스러워?”

카르단은 하! 하고 커다랗게 소리를 냈다. 그러곤 테베트 앞에 다가섰다.

그의 입매가 재미있는 것을 떠올리듯 비스듬히 말려 올라갔다.

“난 잊지 않았다고, 공작. 내 앞에 무릎 꿇고, 죽은 황녀의……”

꿈틀, 테베트가 처음으로 동요를 내비쳤다.

그 동요를 본 카르단의 입매가 더욱 가파른 경사를 그렸다. 그는 광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에슬린의 사형 집행인이 되게 해 달라고 빌던 자네 모습을!”

하하하! 카르단은 떠올리기만 해도 즐거운지 커다랗게 웃었다.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그의 웃음소리만이 그 공백을 기이하게 메웠다.

테베트는 좀처럼 표정을 풀지 못했다.

“……내가 뭘 했다고?”

혼란 섞인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왜! 그것까지 모르는 척할 셈인가? 내 수족이라도 될 것처럼 머리를 조아려 놓고, 이제 와 발뺌이라니!”

“…….”

“뭐, 좋아. 어차피 자네보다 더 유능한 패를 손에 넣을 거니까. 내 일에 방해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카르단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그의 시선은 다시 에슬린을 향해 움직였다.

“너! 날 따라와라.”

카르단의 커다란 손이 다시 에슬린의 어깨를 쥐었다.

그 순간 번뜩이는 은빛 광채가 허공을 갈랐다.

“미친 건가! 공작! 감히!”

“공작 각하!”

카르단이 고함을 내지르고, 그의 시종이 기겁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내가 정말 미쳤다면 당신 손목은 이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을 것입니다.”

“감…… 감히!”

“아님 그냥 목이든지.”

그의 목소리는 아주 어둡고 음산했다. 등골을 타고 오싹한 소름이 내달렸다.

어느새 뽑아 든 테베트의 검 끝은 카르단의 손목을 겨누고 있었다.

“감히…… 내게 검을…….”

카르단은 그러나 그 서슬에 옴짝달싹 못 한 채 얼어붙어 버렸다.

테베트가 으득 이를 갈았다. 그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였다.

“말이 안 통하는군.”

휙, 검이 움직였다.

무언가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으아악!”

카르단이 비명을 내질렀다. 정신없이 제 손목을 살피는데. 뎅그르르, 바닥을 금빛 빛나는 무언가가 가로질렀다.

카르단의 소매에 달려 있던, 음식물이 말라붙어 있던 금단추였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테베트가 피식 웃었다.

“농담입니다, 전하.”

다리에 힘이 풀려 카르단이 털썩 주저앉았다. 전하! 시종이 기함하며 다가가 그를 살폈다.

테베트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검을 갈무리했다. 싸늘한 눈동자가 그를 짓누르듯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피곤하신 듯하니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군요.”

“공, 공작…… 이게 지금……”

“황자를 모셔라.”

“예, 예예!”

시종은 사색이 된 표정으로 카르단을 부축했다. 카르단은 넋이 빠진 채로 걸음을 옮겼다.

덜그럭. 무언가가 거슬려 내려다보니 그제야 제 한 손에도 검이 쥐어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뒤늦게 수치심이 몰려왔다.

“오, 오늘의 무례를 용서치 않겠다! 공작.”

그는 벌게진 낯으로 소리쳤다. 당장 날뛰고 싶은 걸 간신히 눌러 참았다.

피에 미친 악마가 맞군! 천지 분간도 못 하는! 젠장! 제기랄!

카르단은 온갖 종류의 욕을 삼켰다.

“가시죠…… 전하.”

시종이 달달 떨며 카르단을 부축했고, 그는 별수 없이 끌려가는 척 몸을 내뺐다.

달칵. 응접실 문이 닫혔다.

실내는 짧은 정적에 빠져들었다.

“다친 곳은?”

테베트가 몸을 돌렸다.

어느새 에슬린은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쯧, 그가 사납게 혀를 찼다.

“다친 건가? 어디 봐.”

“무릎을 꿇었어요?”

“뭐?”

그녀의 눈동자가 어딘지 모르게 젖어 있었다. 테베트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구겼다.

메마른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보다 못한 그는 탁자 근처에 나뒹굴고 있는 제 망토를 집어다 감싸 주었다.

에슬린은 그때까지도 그저 망연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카르단 앞에서…… 정말 당신이 무릎을 꿇었어요?”

고장 난 인형처럼 그녀가 반복해서 물었다.

테베트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나지 않는 일이야.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군.”

“…….”

“그 황녀를 죽이기 위해서라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지 그의 얼굴에 자조적인 빛이 스쳤다.

에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죽이기 위해서? 아니다.

‘날 살리기 위해서.’

이 자존심 강한 남자가 저 카르단 앞에 무릎을 꿇고 빈 것이었다.

뭐라고 말했을까? 표정은 어땠을까? 분위기는? 공기는? 카르단이 보란 듯이 빈정거렸을 텐데, 그때의 기분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에슬린도 카르단 앞에 무릎 꿇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개처럼 엎드려 빌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힘을 주자 옷자락이 와락 밀려들었다.

그런데도 쑤시는 심장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봐.”

테베트가 고개 숙인 에슬린의 턱을 조심스레 감쌌다. 천천히 들어 올려 안색을 살폈다.

“갑자기 왜 그러지? 정말 어디 다친…….”

그는 벼락 맞은 사람처럼 굳어 버렸다.

호수 같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왜 우는 거야?”

테베트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짜냈다.

턱을 쥔 손가락에 미지근한 물이 닿았다. 그 감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젠장…… 제발.”

그는 허겁지겁 에슬린의 상태를 살폈다.

대체 어디를 얼마나 다친 거지?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상처의 흔적은 없었다.

눈물이 자꾸만 흰 볼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갔다.

자신도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리 없이 우는 에슬린의 모습은 그에게 충분히 파괴적이었다.

“울지 마. 손수건을…….”

테베트가 다급히 품을 더듬었다.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대로 그녀의 얼굴을 닦으려는데, 문득 어떤 장면이 스쳤다.

‘너에게 내줄 손수건은 없다.’

“…….”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는 알 수 있었다.

에슬린의 눈물을 보는 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잠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리페리우스의 문장이 새겨진 손수건.

그걸 건네지 않았던 건, 그때 제게 이 눈물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테베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천이 금세 젖어 들었다. 그가 정성 들여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오늘은 손수건을 빌려주고 싶은데.”

에슬린은 그런 그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눈에 새겼다.

“받아 줄 건가?”

씁쓸하게 웃는 그 미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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