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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82화 (82/147)

82화

“제기랄! 빌어먹을!”

카르단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궁으로 돌아와서도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겁먹은 시종들조차 가까이 오지 못했다.

잡히는 대로 깨고 부수어 침실이 온통 엉망이었다.

“당장 모후께 이 사실을 일러서……!”

분이 풀리지 않은 그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감히 리페리우스가 황자를 농락해? 그의 눈이 분노로 일렁였다.

그때 침실 문이 열렸다.

“전하.”

“뭐야! 방해하지…….”

술잔을 집어 던지려던 카르단이 멈칫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몸을 낮추며 들어왔다. 카르단은 술잔을 치켜든 채 그대로 굳었다.

상황 파악이 된 건 달칵, 문이 닫히고 나서였다.

“네 이놈…… 감히 내게 말도 없이 자리를 그렇게나 오래 비우다니!”

쨍그랑! 결국 술잔은 벽을 맞힌 후 나뒹굴었다.

마법사는 그러나 전혀 겁먹지 않고 카르단에게 다가섰다.

카르단이 씩씩거리면서도 마법사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살짝 주름진 중년의 얼굴. 둥글게 휜 눈매는 온화하기 그지없는 현인의 분위기를 풍겼다. 가느다란 눈매에 뱀 같은 노란 눈동자가 번들거렸으나, 그는 웃음으로 그것을 감추고 있었다.

흑마법으로 얼굴을 바꾼 타툴란이었다. 그는 카르단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동안 내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무슨 생각까지 한 줄 알아?”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설마 빈손으로 돌아왔겠습니까?”

타툴란의 말에 카르단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성배가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카르단이 숨을 집어삼켰다.

마법사는 길게 웃으며 그의 반응을 충분히 즐겼다.

“그, 그게 사실이냐?”

“예, 전하.”

“하! 허! 흠!”

카르단이 어쩔 줄 모르고 잠시 실내를 돌았다. 그러더니 휙 몸을 돌려 소파에 가 앉았다.

다리를 꼰 채 다소 거만한 자세로 그가 마법사를 응시했다.

“나의 측근 마법사여, 널 의심한 것은 아니다.”

카르단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마법사가 더욱 깊숙이 몸을 숙였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알고 있습니다.”

“성배를 당장 찾아와.”

마법사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늘 웃는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어렵습니다, 전하.”

“뭐? 뭔 헛소리야?”

마법사는 눈썹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성배를 손에 넣으려면 더 강한 마력이 필요하거든요.”

“나 참. 골골대는 개새끼였군.”

맹렬한 비난에도 마법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카르단이 몸을 확 숙였다. 그가 방금과 다르게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흑마법사라며? 그 디에리안 프레이보다 어째 더 약해 보이는데 내 착각인가?”

꿈틀, 마법사의 웃는 얼굴에 실금이 갔다. 늘어뜨려 놓은 손가락에 검은 기운이 일렁였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카르단은 그저 구시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참아…… 아직은 아니야.

마법사는 간신히 충동을 억눌렀다.

“잠시 바깥에 다녀오겠습니다.”

“바깥? 궁 밖? 굳이 왜?”

카르단이 있는 대로 인상을 구겼다.

“필요한 게 있어서 말입니다.”

“필요한 거? 뭔데? 내가 기꺼이 구해다……”

“숨 쉬는 인간의 피.”

“…….”

“입니다만.”

그제야 카르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법사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그는 선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제가 그 피를 좀 모으고자 하는데. 궁 안이 좋겠습니까, 궁 밖이 좋겠습니까?”

카르단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내 다시 눈동자를 들어 흑마법사를 바라보았다.

“황궁에서 소란은 자제하는 게 좋겠어.”

흑마법사가 씩 웃음 지었다.

“반드시 전하께 성배를 바치겠습니다.”

그는 정중한 어투로 카르단에게 맹세했다.

“좋아. 반드시 찾아서…….”

카르단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잠시 두려워하던 눈동자엔 어느새 탐욕만이 가득했다.

“흔적도 없이 파괴하라.”

흑마법사는 재차 허리를 굽혔다.

끅, 희열에 찬 웃음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야만 했다.

그래…… 멍청한 인형도 나쁘지 않아.

타툴란은 비식비식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눌렀다.

“에르단 전하를 감시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주변에 재미있는 것들이 많거든요.”

“에르단?”

카르단이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타툴란은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말해 주지 않았다.

아, 즐거워라.

모든 것은 그의 각본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는 이 체스 판 같은 황궁이 진심으로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황녀님은 결국 내 뜻대로 움직이게 될 거야.

내가 선택한 최고의 체스 말! 그게 아니라면 죽여 버리면 될 뿐.

상상만으로도 짜릿해 빙글빙글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황녀님, 힘내라고.’

다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목을 후려치는 게 이 게임의 백미이니까 말이야.

* * *

에슬린은 조금 민망했다.

남 앞에서, 그것도 테베트 앞에서 이렇게까지 울어 본 적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좀 진정이 됐나?”

테베트가 물었다. 그는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 앞에 에슬린을 데려다 놓은 참이었다.

“네. 미안해요, 갑자기.”

후끈거리는 볼이 벽난로의 열기 때문인지 민망함 때문인지 모르겠다. 에슬린은 빨개진 코끝을 매만지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정작 테베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당신도 우는 일이 다 있군.”

그렇게 말하며 에슬린의 무릎에 망토를 덮어 줄 뿐.

“놀랐나 봐요.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쳐서.”

“놀라서 울 만한 일들은 레비브 산에서 더 많지 않았나?”

그가 피식 웃은 뒤 몸을 일으켰다. 벽난로에 장작을 좀 더 집어넣고 돌아와 에슬린이 앉은 소파의 등받이를 짚었다.

“됐어. 오늘은 지쳤을 테니 좀 쉬다가 돌아가도록 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잠시만요, 테…… 공작님.”

에슬린은 황급히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소파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그녀를 테베트가 삐딱하게 내려다보았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썹이 어쩐지 못마땅해 보였다.

“이제 와서 뭘 숨기지? 그냥 이름을 불러.”

에슬린은 손을 내려놓았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테베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에슬린 앞에 놓인 소파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벽난로의 불빛이 차단되며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가 에슬린을 덮었다. 다리가 슬쩍 부딪혔다.

“그러고 보니 그 호칭…….”

테베트가 잠시 말을 골랐다.

“내가 당신에게 존댓말을 하던 것과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그래?”

에슬린에게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동요하지 않으려는 하얀 얼굴을 보자 문득 짓궂은 마음이 일었다.

그는 훅 에슬린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술을 말아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요?”

냉소나 비웃음이 섞이지 않은 다정한 미소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순간 에슬린은 북부 공작저 정원으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 들었다.

혹은 공작저 침실이던가, 혹은 깊은 숲속 오두막이던가, 혹은 레비브 거리, 그 예전 황궁…….

‘또 생각에 빠졌군.’

테베트는 제 허벅지에 팔을 기댄 채 턱을 괴었다. 생각에 잠긴 그녀를 보는 건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얼굴이…….’

잘 안 보였다. 제 그림자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일인용 소파를 끌어와 대각선에 놓고 앉았다. 일렁이는 불빛이 흰 낯 위로 어른거렸다.

테베트의 움직임으로 인해 에슬린은 짧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할 말이 있어요.”

에슬린이 입술을 움직였다.

“사실 테베트 경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제가 먼저 찾아갔을 거예요.”

에슬린은 그냥 편한 호칭을 택했다. 테베트가 다시 입술을 끌어 올렸다.

“무엇 때문에?”

“당신 기억 때문에요.”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기억이라.

에슬린이 허리를 바로 세웠다.

“당신이 기억을 찾을 수 있게 해 줄게요.”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과도 같은 말이었다. 테베트는 그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갑자기 날 돕겠다는 건가? 왜?”

의심 어린 시선이 에슬린을 향했다.

목숨을 위협받던 순간에도 입을 다물던 여자가 아닌가?

그는 가느스름하게 눈을 좁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한테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재미있군.”

깊은 호수 같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테베트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가볍게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뭘 원해?”

“정보요.”

“정보?”

반듯한 미간이 꿈틀 움직였다.

에슬린은 느리지만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당신이 가진, 성배에 대한 정보.”

“…….”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타다닥. 불씨가 튀는 소리가 실내를 메웠다. 창밖으로부터 희미하게 두런거리는 병사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창문이 덜컹대는 소리. 이따금씩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

그 외엔 온통 정적이었다.

테베트는 몸을 바로 세웠다. 팔짱을 풀고, 몸을 비스듬히 돌려 에슬린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손이 습관처럼 검으로 향했다. 음각된 천칭을 만지작거렸다.

“성배가 나타났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검붉은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스치고,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뾰족하게 벼려졌다.

그는 더 이상 작은 미소조차 짓고 있지 않았다.

에슬린은 차분하게 테베트를 마주 보았다. 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그저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성배가 나타났다는 건 기밀 중의 기밀이야. 그런데 그걸 하녀가 알고 있다니.”

테베트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

“내가 성배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고?”

에슬린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켰다.

따듯한 공기가 크게 폐를 한 바퀴 돌고 남김없이 빠져나왔다. 머리는 명료했고, 심장은 적당히 두근거렸다.

기분 좋은 긴장감. 그 아슬아슬한 감각을 느끼며 에슬린은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당신에게 성배를 찾으라고 한 게, 나였기 때문이에요.”

테베트의 사고가 정지했다. 무서울 정도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한참이 지나서야 테베트가 입술을 움직였다.

“……뭐라고?”

고작 그렇게 묻는 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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