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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83화 (83/147)

83화

에슬린은 그의 반응을 살피며 덧붙였다.

“전 에르단 전하의 사람이거든요.”

“지금 내가 2황자를 위해 성배를 찾고 있었다고 말하는 건가?”

테베트의 눈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성배를 찾아와 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에슬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성배에 관한 정보만 주세요. 그러면 기억을 찾는 데 협력할게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에슬린을 응시했다.

테베트는 여자의 말버릇을 알고 있었다.

불리한 화제는 교묘하게 말을 돌리며 빠져나가는 버릇.

레비브의 산에서부터 느껴 왔던 것이었다.

‘더 숨기는 게 있어.’

그는 손을 들어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묻는다 한들, 이 여자가 사실대로 말할까?

그리고 그것을 자신은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테베트는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있는 건 저 자신뿐이었다. 그러니 결국 모든 건 제 기억에 달려 있었다.

“내가 리페리우스라는 건 알고 있나?”

그러자 에슬린이 피식 웃었다.

“모를 리가…….”

“그런데도 2황자의 편을 들라?”

“1황자가 성배를 찾고 있어요.”

짙푸른 눈동자에 벽난로 불빛이 일렁였다. 그것은 푸른 불꽃처럼 보였다.

“그래서?”

“카르단 황자가 황제가 되어도 괜찮은가요?”

“누가 되어도 큰 상관은 없지.”

냉정한 대꾸에 에슬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겁쟁이…….”

“뭐?”

테베트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숨을 흘렸다.

겁쟁이라니. 그런 말을 들어 보는 건 처음이라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누구도 제국 최강자인 리페리우스를 두고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그야말로 신선하기 그지없는 표현이었다.

아니, 잠깐만. 정말 처음인가?

“리페리우스에서 한 발짝 나와 보는 건 어때요?”

에슬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살짝 턱을 치켜들고 여유로운 미소까지 띤 모습에 테베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롭시온에서 리페리우스를 증오한다고 말하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반사적으로 제 검을 꾹 움켜쥐었다. 장식이 부딪치며 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감히…….”

“리페리우스의 천칭이라.”

에슬린이 그 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살짝 내리깐 속눈썹이 팔랑, 팔랑 느리게 움직였다.

“그 의미를 알아요, 테베트 경?”

휙, 그녀가 예고도 없이 눈을 들었다. 테베트는 자기도 모르게 검을 쥔 손을 움찔 떨었다.

“서로 다른 무게를 가진 것들을 올리고 빼면서, 올바른 균형을 맞추는 게 천칭의 역할이래요.”

에슬린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테베트는 어쩐지 정신이 멍해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덫에 빠진 기분이었다.

멍해진 그를 깨우듯 에슬린이 새벽 공기 같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알겠어요? 균형을 맞추려면 뭘 올려야 한다고요. 비워 두는 게 아니라.”

“…….”

“안 그러면 뭐, 낡고 녹슬기밖에 더 해요?”

테베트는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여 불빛이 일렁이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짝 기울인 턱, 느슨한 것 같지만 빈틈없는 자세, 나른하게 치켜 올라간 입매, 푸른 불꽃이 잠들어 있는 눈동자…….

어느샌가 검을 움켜쥐었던 손에서 힘이 풀려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궤변이군.”

그는 아주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풋, 여자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변한 게 없네.”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타이밍을 놓쳤다.

“그래서 어떡하실래요?”

에슬린이 덧붙였다. 부드러운 낯이 테베트를 향해 있었다.

“2황자에게 충성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 편을 들라는 말도 아니고요. 이건 그냥…… 거래일 뿐이에요.”

말투가 그를 달래듯 다정했다.

“당신이 가진 정보만 알려 줘요.”

“그럼 기억을 찾게 해 주겠다?”

“네.”

테베트는 다시 침묵했다. 에슬린은 얌전히 그가 생각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그는 양손을 맞잡았다. 잠시 그 손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들고 에슬린을 바라보았다. 검붉은 눈동자가 불빛을 받아 기이하게 일렁였다.

“기억을 찾게 해 줄 방법은?”

나직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에슬린은 준비했던 말을 꺼내 놓았다.

“물약이 있어요. 기억 찾는 데 도움을 주는……. 그걸 마시면……”

“아니, 아니야.”

나른한 대답이 돌아왔다. 테베트는 비스듬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이 알려 줘야지.”

그가 몸을 일으켰다. 다시 에슬린 앞에 가 한쪽 무릎을 접은 채 앉았다.

“물약 같은 수상한 걸 내가 왜 먹어야 해?”

그의 매끈한 턱이 슬쩍 기울었다. 올려다본 얼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직접 알려 줘.”

벽난로 불빛에 환히 드러난 에슬린의 얼굴을 보며 테베트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에슬린이 한쪽 눈매를 찌푸렸다.

이해가 안 갈 땐 이런 표정을 짓는군.

테베트는 그녀 무릎에 얹힌 흐트러진 망토 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 말 그대로야. 내가 뭘 믿고 남이 주는 약을 먹지? 당신이 2황자 사람이라면, 더더욱.”

툭툭. 무릎을 두드리는 손길에 그녀가 흠칫 몸을 굳혔다.

“같이 있으면 조금씩 기억이 돌아와. 오늘처럼.”

그는 눈을 내리깐 채 망토 자락을 쥔 에슬린의 손가락을 응시했다.

“그러니 당신이 직접 내 기억에 대해 알려 주는 걸로 해. 그럼 난 성배와 관련한 정보를 넘겨주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붉은 눈동자가 어둠에 잠겨 더더욱 검게 일렁이는 듯했다.

에슬린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테베트의 기억은 되찾게 할 생각이었으니, 이 거래는 사실 구실에 불과했다.

일단 지금 테베트에게서 성배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낼 구실.

그녀의 계획은 정보를 먼저 얻고, 기억은 가짜 물약을 만들어 디에리안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피해 보려는 것이었는데.

‘감이 좋은 건지 뭔지…….’

어쨌든 호락호락한 남자가 아니었다.

“물약도 없이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할 수도 없고.”

천 페이지짜리 책을 잘 요약해 설명한다 한들, 한 번 보는 것에 비할까?

테베트도 그 사실은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상관없어. 그냥 내가 물어보는 말에만 대답해도. 하지만.”

“하지만?”

“더 이상 거짓말은 안 돼. 그때처럼 피하거나 숨기지도 마.”

단호한 말투였다. 에슬린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듣자 하니 이제 완전히 거짓말쟁이 취급이었다.

‘뭐, 아닌 건 아니지만.’

조용한 에슬린을 보며 테베트가 픽 웃었다.

“혹시 알아? 그렇게 믿음이 생기면 그 물약도 마시고 싶어질지 모르지.”

“…….”

“진짜 독약이라 해도 말이야.”

그가 재촉하듯 에슬린의 무릎을 두드렸다.

“그래서? 어떡할 거지?”

제 말을 그대로 빼다 박은 물음이었다. 에슬린은 잠시 고민했다.

이건 분명 제 예상과는 다른 전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가진 정보를 이대로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변명이지.’

에슬린은 쓴웃음을 삼켰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려면 얼마든지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변명이 맞았다. 그녀는 스스로에게만큼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라도 테베트와 함께 있고 싶다.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미래를 무릅쓰고서라도, 이 무릎에 닿은 온기를 이젠 포기하고 싶지 않다.

에슬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와 제 주변과 관련한 중요한 건 말할 수 없어요. 정말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할 거고요.”

“좋아.”

테베트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에슬린은 그의 얼굴을 깊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테베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에슬린의 몸이 앞으로 조금 기울어졌다.

“그럼 바로 묻겠는데, 왜 마물들 틈에서 성배를 찾고 있었던 거죠?”

“글쎄. 모르겠군.”

에슬린은 잠시 눈만 깜빡였다.

지금 당당하게…… 모르겠다고 한 거야?

여태까지 했던 고민이 하얗게 날아가는 걸 느끼며 에슬린은 벙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지금?”

그 반응에 테베트가 모처럼 눈을 접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나도 내가 성배를 찾고 있었다는 걸 며칠 전에 떠올렸어. 아직 뒤죽박죽이란 소리야.”

“…….”

왠지 낚인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사기…….”

“사기꾼이라니. 자료는 북부 공작저에 확실히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는 제 북부 공작저 서재를 떠올렸다.

왜 지금껏 잊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한창 틀어박혀 있던 곳이었다.

거기엔 병적일 정도로 수집해 온 성배에 대한 자료가 있었다. 사람을 보내 그것을 가져오게 할 참이었다.

“자료는 사람을 시켜 가져오라고 하지. 받는 대로 연락할 테니 기다려.”

“……알겠어요.”

에슬린은 작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창밖을 보니 언젠가부터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에슬린은 고개를 돌려 그 소리 없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에슬린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가 어둡게 침잠했다.

‘정말 2황자를 위해 성배를 찾고 있었을까?’

글쎄. 제 동물 같은 직감은 ‘아니다’ 쪽에 가까웠다.

‘이 여자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그러나 그는 이전처럼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기억은 돌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의 정체에 대해서도 곧 알게 되겠지.

많은 조각들이 부유했다.

그것이 어떤 연결 고리로 이어질지, 테베트는 조금 두려워졌다. 한 걸음만 더 떼면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이 쌓이겠네요. 길이 거칠어지기 전에 돌아가야겠어요.”

어수선하던 바깥은 어느새 고요했다. 병사들의 말소리도 사라진 걸 보니 상황이 일단락된 모양이었다.

에슬린은 무릎에 덮인 망토를 걷어 냈다.

“그럼, 나중에 봐요.”

팔걸이를 짚고 일어서려는데, 테베트가 그녀를 붙잡았다. 어딘지 조금 다급한 몸짓이었다.

부드럽게 손목을 감싸는 온기에 에슬린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하나만 더.”

“오늘 말이 많으시네요.”

피식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테베트는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을 골랐다.

강인한 목울대가 몇 번이나 움직였다. 그답지 않게 초조하고 긴장한 모습이었다.

일자로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이 한참 뒤에야 겨우 열렸다.

“……흉터는?”

“네?”

에슬린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흉터는 남지 않았나?”

“아…….”

그제야 에슬린은 남자가 아까부터 왼쪽 목덜미를 빤히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목을 감싸 쥐었다.

“괜찮아요. 애초에 깊게 베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서늘한 칼날의 감촉은 여전히 생생했지만, 어찌 됐건 상처는 남지 않았다.

남자가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잡힌 손목에 움찔 힘이 들어갔다.

“만약 다음에 또 그런 상황이 생기면.”

에슬린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땐 그냥 당신이 날 찔러.”

차라리 그게 낫겠어. 테베트가 중얼거렸다.

검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진심이다 못해 간절함까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반드시 그렇게 해.”

그가 재차 말했다. 에슬린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침묵했다.

제 손으로 만든 악몽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남자가 결국 무거운 고개를 떨구었다.

* * *

겨울은 점점 더 기세를 더해 갔다.

황궁 내 모든 연못이며 호수가 얼어붙었다. 어린 정원사들은 수목에 짚을 덧대고, 앙상한 가지들을 손질했다.

창문을 꼼꼼히 닫아도 시린 바람이 새어 들었다.

하인들은 앞다퉈 장작을 확보하려 애썼으며, 하녀들은 벽난로며 화로의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온종일 분주히 움직였다.

황궁 하녀들의 일상은 공작저 하녀들의 일상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다만 휴가를 맞은 하녀들은 따듯한 처소에만 머물렀는데, 단순히 밖에 나가 놀 만큼 호락호락한 날씨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러나 황궁 하녀, 에슬린 로즈벨은 예외였다.

그녀는 이 추위에도 황궁 문을 넘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이야.”

정보상은 뜨거운 차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가 무색하게 낡은 주점 내부는 조금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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