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며칠 전 승전 연회에서 소란이 있었다며?”
“그건 기밀에 부쳤는데…… 뭐,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게 무의미하겠네요.”
달그림자는 베르타니아 최고의 정보 길드였다. 콧잔등에 긴 상처가 있는 이 남자는 그 길드의 엄연한 부길드장이었다.
에슬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뜨거운 차로 몸을 녹였다.
“자.”
남자가 테이블 위로 종이를 내밀었다.
“최신 버전이야.”
에슬린은 종이를 집어 눈으로 훑었다. 그새 또 화려하게 늘어 있었다.
카르단의 정부 목록.
이번엔 종이를 씹어 넘기지 않았다. 겉옷 안쪽에 소중히 밀어 넣고, 대신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수고했어요. 여기, 대가요. 나머지는 일이 끝나는 대로 드릴게요.”
“오호. 2황자께서는 통이 크시군.”
정보상이 주머니 안을 확인하며 코를 씰룩거렸다. 번쩍번쩍 빛나는 금화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빈틈없이 준비하도록 하지. 그거 알아? 나 이제 이 정보 조사하는 거 꽤 즐기고 있어.”
캘 때마다 새롭거든. 정보상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에슬린은 살짝 웃곤 겉옷을 집어 들었다. 용건이 끝났으니 돌아갈 생각이었다.
“길드장은 아직 부재중인가요?”
여전히 고요한 안쪽 방을 보며 에슬린이 문득 물었다.
이곳을 드나든 지가 꽤 되었는데도 그 유명하신 길드장은 코빼기조차 보지 못했다.
“그래……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지, 그 인간.”
“연락이 닿으면 저에게도 알려 주세요.”
“엥? 왜?”
에슬린은 대충 떠오르는 대로 둘러댔다.
“황자 전하께서 만나 보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뭐, 전해는 놓지. 그 똥고집이 순순히 응할지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코끝을 문지르며 밖으로 나갔다. 거칠게 마차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고집이 센가? 에슬린은 마차를 기다리며 막연하게 생각했다.
* * *
중심지에는 사람이 많았다.
마차에서 내린 에슬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았다.
처음 와 보는 거리라 그런지 익숙지 않았다.
“비켜, 비켜!”
마차 한 대가 쌩하니 스쳐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그녀가 크게 비틀거렸다.
“……!”
“조심.”
제 어깨를 단단히 말아 쥐는 손이 있었다.
“해야지.”
등에 딱딱한 벽이 닿았나 싶었는데 누군가의 품 안이었다.
짙은 향기. 귓가를 울리는 기분 좋은 저음.
“테베트 경? 왜 여기에 있어요?”
에슬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젖혔다.
남자가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시간 개념이 없군. 기다리다 나온 거잖아.”
늦었나? 에슬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다. 길을 헤매서 그렇지 약속 시간은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아직 약속 시간 안 됐는데.”
“가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테베트가 에슬린을 이끌었다.
그는 아무런 무늬 없는 기다란 겨울용 로브를 입고 있었다. 키가 커서 로브 끝단이 발목에도 미치지 못했다. 한쪽에 찬 검이 툭 튀어나와 존재감을 드러냈다.
‘또 용병 기사 행세네.’
에슬린은 예전을 떠올리며 조금 웃었다.
“뭘 좀 먹는 건 어때?”
뜬금없는 말에 에슬린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느샌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배고파요?”
“아니, 당신 얼굴이 영.”
“제 얼굴이 왜요?”
에슬린은 더듬더듬 볼을 만졌다.
뭐가 묻었나? 그러나 얼굴은 깨끗하기만 했다.
“일단 식사부터 해.”
결국 그가 앞장섰다.
원래는 이 근처 카페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그게 식당으로 바뀌는 것뿐이니 에슬린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저기는 어때요?”
뒤따라 걷던 에슬린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테베트는 그 손끝을 바라보다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저런 데로 괜찮겠어?”
“사람이 많으면 맛있는 데인 거 아니에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평민들이 오며 가며 들르는, 허름한 거리 식당이었다.
이런 곳을 좋아하는 건가? 테베트는 살짝 상기한 에슬린의 뺨을 응시했다.
“아. 혹시 싫어해요?”
에슬린이 갑자기 떠오른 듯 물었다.
“상관없어.”
더 화려하고 좋은 식사를 떠올렸던 테베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저 푸른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게 어쩐지 기분 좋았다.
“어서 오십쇼!”
두 사람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많았지만, 다행히 인파와 조금 떨어진 안쪽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복작거리는 소음에 어떤 대화를 나누어도 다 묻혀 버릴 것 같았다.
테베트는 주문을 하고 돌아와 앉았다.
“여기, 자료.”
종이 묶음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직접 보는 게 도움이 될 거야.”
“고마워요.”
에슬린은 그 자료를 잘 집어넣었다.
“그럼 그동안 떠오른 기억이 있는지……”
말하려는데, 점원이 음식 접시를 가지고 등장했다.
견과류를 올린 빵과 버터, 몇 종류의 잼, 샐러드 파스타, 생선과 야채 구이, 토마토스튜, 달걀 요리 같은 것들이 두서없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뭘 이렇게 많이 주문했어요?”
“여기선 이 정도로 주문하는 게 규칙이거든.”
그런 거야? 에슬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테이블을 둘러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테베트가 슬쩍 웃으며 에슬린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었다.
“그때도 느낀 거지만 당신은 이런 식당에 익숙지 않아. 그렇지?”
“그럴 리가요.”
에슬린은 빵을 뜯으며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속으로는 몹시 뜨끔한 중이었다. 하녀들의 식사에는 이제 익숙했으나, 평민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는 건 여전히 낯설었다.
“전 귀족이신 분이 여기에 익숙하신 게 더 이상한데요.”
“전쟁터를 뒹굴다 보면 익숙해지지 않는 게 없어. 뭐, 어렸을 땐 여기서 친구도 많이 만났고.”
어렸을 때?
제가 모르는 얘기에 에슬린이 씹는 걸 멈췄다.
“평민 친구들이 있어요?”
“있었지.”
의외였다. 친구라는 말조차도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순간 드는 위화감에 에슬린의 그의 말을 곱씹었다.
“있‘었’다?”
그러자 테베트가 아, 하고 눈을 들었다. 검은 동공 안쪽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덤덤한 기색이었다.
“죽었거든.”
“…….”
에슬린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오믈렛을 잘라 주던 테베트가 의아한 듯 왜 그래? 하고 물었다.
“어쩌다가……?”
“글쎄. 솔직히 잘 기억 안 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에슬린은 어쩐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 호기심을 이유로 남의 상처를 들추는 취미는 없었다.
“슬픈 일을 떠올리게 해서 미안해요.”
에슬린이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그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예전 일이야. 친구라곤 했지만, 얼굴도 기억 안 나고.”
“그래도요. 잊는다고 상처가 덮이는 건 아니니까.”
에슬린이 손을 뻗었다. 위로하듯 그의 잔에 과실주를 채워 주었다.
테베트는 뽀글뽀글 올라오는 기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많이 힘들었죠? 그동안 애써서 잘 견뎠네요.”
에슬린의 말에 그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힘들었냐고? 제국 최강자인 그에게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견디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한마디에 목구멍이 간지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뜨거운 건가……?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과실주를 벌컥 들이켰다.
“목말랐어요?”
에슬린이 웃으며 빈 잔에 다시 음료를 채워 주었다. 그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서 어쩐지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 말대로 자꾸 목이 말랐다. 조금 전 갈증과는 달랐다.
* * *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거리를 걸었다.
날은 여전히 추웠지만, 든든히 배를 채운 탓인지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허브 가판을 들여다보던 에슬린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기억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 할 건가요?”
테베트는 글쎄, 하고 말을 망설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기억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쇼핑에 질릴 때쯤?”
“……이제 다 샀으니 가요.”
에슬린은 조금 민망해진 얼굴로 상인에게 허브 꾸러미를 받았다.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뒷모습을 테베트가 재빨리 따라잡았다.
그녀의 손에서 짐을 빼앗아 들며 포장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무슨 허브지?”
“허브는 아니고, 감국이에요.”
“감국?”
“산에서 내려오면 감국차를 마시기로 했잖아요. 늦었지만.”
에슬린이 휙 고개를 들었다. 살짝 미소 짓는 얼굴이 반짝거렸다.
“레비브 산에서 했던 말인데, 잊었어요?”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과거를 되짚는 테베트의 눈앞에 불쑥 하얀 손가락이 나타났다.
“그거, 가져가서 차로 드세요.”
당당히 감국을 가리키는 모습에 테베트의 입에서 허탈한 숨이 터졌다.
“내 말뜻은 같이 마시자는…….”
테베트는 순간 멈칫했다.
“…….”
그는 강렬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건 기억이기도 했고, 강한 확신이기도 했다.
“혹시 나였어?”
테베트가 낮게 물었다.
“네?”
“그 말, 내가 먼저 한 말이었나?”
에슬린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테베트는 물끄러미 에슬린을 바라보았다.
이것 봐. 역시 당신이 물약보다 낫잖아.
매끄러운 입술이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
“다음엔 역시 카페에서 만나도록 하지.”
그는 손안에 든 꾸러미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 차를 대접해야 하는 건 나였군.”
에슬린은 조금 곤란한 낯으로 웃었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기억을 찾아 준 셈이었다.
곧 디에리안이 돌아올 테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하는데.
그의 기억을 자극할 만한 행동은 자제해야겠다고 에슬린은 다짐했다.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쏟아지는 인파 속에서 에슬린을 보호하며 테베트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일순 매서운 빛을 띠었다.
‘그보다 아까부터…….’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쥐새끼가 있는데.’
어쩔까? 그는 망설임 없이 검에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