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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85화 (85/147)

85화

기척을 숨기는 데 능숙한 자였다. 테베트조차도 온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는 다시 에슬린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오똑한 콧날이 추위에 조금 빨개져 있었다.

미행을 당하는 걸까?

‘아니야. 이건 미행이라기보단…….’

“사람이 많네요. 넘어지면 다치겠어요.”

그녀를 지키는 자다.

테베트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호위가 있는 여자라니.’

당신은 정말 누구인 걸까?

당신의 정체를 알면, 당신을 완벽히 신뢰할 수 있게 될까?

“그 말은 진심이었어?”

그가 불쑥 물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거리로 접어들었다.

“뭐가요?”

“날 좋아한다고 했던 말.”

에슬린이 걸음을 멈추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잠깐 당황하는가 싶더니, 삐딱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에 어쩐지 불만이 한가득이었다.

“……내가 거짓말만 했다고 생각하나 본데.”

입술을 조금 내민 채 그녀가 툴툴거렸다.

“진짜 중요한 건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테베트 경. 믿는 건 당신 자유지만.”

에슬린은 휙 테베트를 지나쳐 걸었다. 그 뒷모습을 보던 테베트가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앞서 나갔다.

에슬린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럼 나는?”

“네?”

에슬린이 한쪽 눈꼬리를 살짝 찡그렸다.

“나는 당신을 좋아했나?”

그는 왠지 모르게 초조한 기색이었다.

“글쎄…… 어땠을까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잠시 고민하던 에슬린이 문득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따스한 태양 빛이 스며들었다. 웃음은 햇살처럼 그의 어두운 곳 구석구석을 흔들어 깨웠다.

테베트는 그 얼굴에 매달린 빛을 아득하게 응시했다.

“그건 나한테 묻기보다.”

“…….”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겁쟁이 기사님.”

짙푸른 눈동자가 테베트를 직시했다. 그 반들거리는 표면에 제 얼굴이 반사되어 보였다.

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는 누구지?

테베트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자 짙푸른 장막에 갇힌 남자도 눈썹을 찡그렸다.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벗어날 수도, 눈을 뗄 수도 없었다.

“…….”

아무래도 갇혀 버린 것 같다고 테베트는 생각했다.

* * *

에슬린은 창문 앞에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녀들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다.

‘겁쟁이.’

종종 테베트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던 게 떠올랐다.

그러니까 에슬린 베르타니아였던 시절에.

‘내게 그렇게 말하는 건 이 제국에서 당신뿐일 겁니다.’

기억 속 테베트는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에 뱃속이 뒤틀렸던 자신도 떠올랐다.

‘대체 어디가 용감하단 건지.’

‘또 뭐가 당신의 심기를 거스른 거죠? 말해 봐요. 그 마법사 놈입니까?’

에슬린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약혼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리페리우스 공작.’

‘또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름을…… 약혼?’

‘시치미 떼기는.’

‘정말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만. 그렇군요.’

하, 기어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뻔뻔스러운 태도라니.

‘그렇군요?’

‘무슨 문제라도?’

‘문제라도?’

결국 에슬린이 백기를 들었다.

‘……본인이 본인 약혼에 가장 관심이 없군.’

그러자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테베트가 말했다.

‘뭐, 안쓰러운 마음은 있습니다.’

‘누가? 내가?’

‘감히 누가 당신을 안쓰러워하죠? 상대방 말입니다.’

‘…….’

‘지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것일 테니까.’

에슬린은 감았던 눈을 떴다.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뭐야아…… 왜 안 자…….”

누군가 뒤척이다 잠꼬대처럼 말했다. 에슬린은 커튼을 치고 침대로 돌아왔다.

‘지옥…….’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는 자신이 지옥에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러고 보면 내가 죽기 전까지, 자기 감정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어.’

의도적이든, 의도적이 아니든.

감정의 자각이 빨랐던 에슬린에 비해, 테베트는 최후에 가서야 제 감정을 자각했다.

당시엔 에슬린도 서툴렀다.

제 마음에 허덕이느라 바빠, 그의 깊은 곳까지는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땐 그저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테베트가 미우면서도 좋았다.

‘무엇이 당신을 지옥에서 살게 만드는 거지?’

다시 원점에 서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에슬린은 오랫동안 테베트를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 * *

카르단 베르타니아는 불안했다.

“쯧…… 마법사 놈이 없으니 영…….”

타툴란이 곁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불안에 떨 이유는 특별히 없었으나, 그냥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역시 디에리안 프레이라도 안전하게 쥐고 있어야 하나?”

그가 중얼거렸다.

에슬린의 측근을 주워다 쓰는 게 몹시 자존심 상하기는 하였으나, 어쨌든 디에리안 프레이가 가장 뛰어난 마법사인 것은 사실이었다.

황녀가 죽은 마당에 적당히 잘 구슬리면 되지 않을까?

카르단은 턱을 긁으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 하녀.”

저절로 생각은 연보라색 머리카락의 하녀에게로 흘러갔다.

건방지기 짝이 없었지.

“흐음.”

이상하게 하녀를 떠올리자 불안감이 더욱 증폭되었다. 뭔가가 찜찜했다. 뭔가가…….

‘대체 디엘을 측근 마법사로 삼아 뭐 하게?’

카르단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디엘?’

그건 에슬린 베르타니아가 제 마법사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물론 그녀만 그렇게 부르던 것은 아니었지만…….

‘네 뜻대로는 어려울 거란 소리야, 카르단.’

뭐지, 뭘까? 이 불안함.

카르단은 정신없이 내부를 빙빙 돌았다. 결국 거칠게 시종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황자비궁의 하녀 중에,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하녀가 있다.”

“예?”

“그 하녀 주변을 살펴보고, 그 하녀를 감시하게 할 만한 자가 있는지 알아 와.”

시종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예? 갑자기 무슨……?”

하지만 카르단은 시종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뭘 서 있어? 움직여.”

“예, 예예…….”

시종이 엉거주춤 몸을 돌렸다.

“잠깐.”

잠시 생각하던 카르단이 그를 잡아 세웠다.

“그 하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는지부터 알아보는 게 좋겠어.”

“눈엣가시요?”

“그래. 평소에 싫어했다면…… 더 끌어들이기 좋을 테니까.”

적의 적은 곧 아군인 법이지.

카르단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가 봐.”

“예. 알겠습니다, 전하.”

시종은 공손히 인사하고 사라졌다.

황자비궁의 수석 하녀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움찔 몸이 떨렸다.

“네가 황자비궁 수석 하녀냐?”

군청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은 어둠에 물들어 거의 흑색으로 보였다. 위압적인 몸집, 잔인한 눈동자.

카르단 베르타니아.

제국의 1황자가 왜 이 야밤에 자신을 몰래 불러내는가.

“네, 네에…….”

수석 하녀는 차마 고개도 들지 못했다.

“흠. 네가 그 하녀와는 가장 사이가 나쁘다지?”

‘그 하녀?’

수석 하녀는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왜 대답이 없어?”

“누……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그 왜 거지 같은 연보라색 머리카락의 기분 나쁜 하녀 말이다.”

“혹시 로즈벨…… 말씀이십니까?”

“그런 이름이던가? 아무튼.”

수석 하녀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 계집을 얼마나 싫어하지?”

“그건…….”

수석 하녀는 말을 골라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이 궁에서…… 가장 증오하는 하녀이긴 합니다.”

그것이 정답이었는지 카르단이 낄낄 웃었다.

“좋군. 그럼, 날 위해 일하겠느냐?”

“예?”

수석 하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냉엄한 눈동자에 다시 자라처럼 목이 움츠러들었지만, 눈빛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 계집을 감시하고, 내게 보고하기만 하면 된다.”

카르단이 위압적으로 말했다.

“네가 눈엣가시로 여기던 계집을 내가 정리해 주겠다는 말이야.”

수석 하녀는 숨을 집어삼켰다.

“뭘, 목숨을 빼앗겠다는 것까진 아니다. 나는 그 하녀가 아무래도 꺼림칙해서 말이지. 레실리아를 정말 죽이려 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냐?”

“그건…….”

“그러니 그저 꼬투리를…… 그래. 꼬투리를 잡아서 내보내겠다는 소리다. 레실리아는 마음이 약해 그런 덴 소질이 없어.”

“…….”

수석 하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대가는 아쉽지 않을 것이다.”

수석 하녀는 로즈벨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떻게 괴롭혀도 그저 담담하던 하얀 얼굴을.

“알겠습니다.”

그녀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단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곧 축객령이 떨어지고, 수석 하녀는 몸을 일으켰다.

“아,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이 무엇이지?”

“예?”

“이름. 하녀들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않지만, 이름을 알아야 명령을 전하지.”

카르단이 선심 쓰듯 웃었다.

그제야 내내 굳어 있던 수석 하녀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무수한 하녀 중 한 명.

하지만 당연히 하녀에게도 이름은 있다.

“세피아라고 합니다.”

“뭐라고? 못 들었다.”

“세피아 레나드라고 합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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