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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86화 (86/147)

86화

세피아는 그길로 황자비궁에 달려갔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에슬린!”

잠든 에슬린을 흔들어 깨워 밖으로 끌어냈다. 잠기운을 몰아내듯 에슬린이 고개를 몇 번 털었다.

“무슨 일이야? 이 밤중에.”

“나타났어.”

“뭐가?”

“카르단 황자……!”

그 순간 에슬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매끈한 입술이 짧은 호선을 그렸다.

세피아는 오싹한 팔을 슥슥 문질렀다.

“날 감시하래?”

“응. 자기한테 샅샅이 보고하라고…….”

“마법사는? 카르단 곁에 마법사가 있었어?”

다소 급한 목소리로 에슬린이 물었다. 세피아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 아니. 혼자던데.”

“…….”

그렇다면 정말 타툴란은 아직인 걸까?

에슬린의 푸른 눈동자가 생각으로 물들었다. 예상보다 너무 늦은 귀환이었다. 아니면 놓치고 있는 게 있을지도…….

그때 세피아의 말이 끼어들었다.

“정말 네 말대로였어. 널 적으로 여기는 사람부터 회유할 거라더니…… 나한테 너를 얼마나 싫어하냐고 묻더라니까.”

“뭐라고 대답했는데?”

“여기서 가장 증오한다고 했지.”

세피아가 참지 못하고 풉 웃음을 터뜨렸다. 에슬린 또한 어쩔 수 없이 웃어 버렸다.

“카르단에겐 네가 의심받지 않을 만큼 적당한 정보를 흘려 줘.”

“알겠어. 걱정하지 마.”

에슬린은 단호한 얼굴로 덧붙였다.

“네가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난 바로 널 궁 밖으로 빼낼 거야. 처음부터 말했던 것처럼.”

“왜? 그건 싫어. 이건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고.”

에슬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위험해지는 건 안 돼.”

“……너도 위험해지는 건 안 돼.”

세피아가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에슬린의 눈빛이 깊어졌다.

가족을 좀 도와준 게 뭐라고.

에슬린은 세피아의 손을 맞잡았다. 자신이 받기에 과분한 선의였다. 이 손을 반드시 지켜 내리라 그녀는 한 번 더 다짐했다.

세피아는 잠시 그 손을 잡고 흔들었다. 소맷자락이 팔랑팔랑 움직였다. 가벼운 잠옷 차림인 에슬린을 보며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보다 요샌 밤에 안 나가네?”

“응. 일이 좀 있었거든.”

장하다는 듯한 손길이 에슬린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좋은 생각이야. 나라고 항상 망봐 줄 순 없어.”

“하녀장이 요즘도 밤에 돌아다녀?”

“응. 아무래도 몽유병인 게 분명해.”

세피아가 엄청난 비밀을 말해 주듯 속삭였다. 에슬린이 소리 없이 웃었다.

세피아는 다소 착잡한 마음이 되어 그 얼굴을 응시했다.

도대체 저 얼굴 뒤에 뭘 숨기고 있는 건지.

잔혹한 카르단 황자의 눈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무슨 일에 휘말린 건진 말 안 해 줄 거야?”

“조만간.”

이번엔 에슬린이 비밀처럼 속삭였다.

“곧 다 말해 줄 수 있을 거야.”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세피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 *

“향유를 받으러 왔어요.”

관리가 지겹다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향유 병을 골라 그녀에게 내밀었다.

“옜다.”

에슬린은 병이 든 바구니를 쥐었다. 밖으로 나오니 시린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도서관엔 들르지 않았다.

오늘은 젝스가 없어 사서의 눈을 피하기 어렵기도 했고, 아직 테베트가 준 자료를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황녀궁을 못 쓰니 불편하네.’

에슬린은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밤마다 황녀궁에 숨어들던 건 잠시 중단했다.

그러다 보니 사용인 처소에서 몰래 자료를 훑어야 했는데, 다른 이들의 눈이 신경 쓰여 영 진도가 안 나갔다.

“휴우.”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얼마 전 내린 눈으로 인해 바닥이 미끄러웠다. 에슬린은 조심조심 길을 걸었다.

유달리 피로한 날이다.

에슬린은 제가 서 있는 곳이 살얼음판 같다고 생각했다.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떼면 그대로 잠겨 버리겠지.

그녀는 깊게 눈을 감았다 떴다. 차가운 공기가 사정없이 품을 파고들었다.

피곤해.

신발 밑창이 얇아 발이 얼어붙었다. 일순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발이 미끄러졌다. 이것 봐. 한 발자국만 잘못 떼어도…….

“조심하랬지.”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녀의 몸을 지탱한 건 익숙한 온기였다.

“테베트 경…… 여기서 뭐 해요?”

그렇게 묻자 상대방에게서 웃음이 돌아왔다.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에 가까웠다.

“이래 봬도 귀족 나부랭이쯤은 되는데.”

에슬린은 눈을 깜빡였다. 뇌가 한 템포 늦게 회전했다. 아.

기울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테베트가 아쉽다는 듯 손을 떨어뜨렸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가?”

그가 에슬린의 이마를 짚었다. 체온을 가늠해 보는 듯 그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그 뜨거운 손의 감촉에 놀라 에슬린이 화들짝 멀어졌다.

“열은 없는데.”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요.”

심각한 얼굴과는 달리 테베트는 그저 태평해 보였다.

“하녀에게 찝쩍대는 파렴치한 정도로 보겠지.”

뭐가 문제냐는 듯한 말투였다. 에슬린은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괜한 오해에 시달리는 건 사절이었다.

“어디까지 가지?”

그가 에슬린의 짐을 낚아챘다. 그녀는 다시 그 짐을 빼앗으려 했으나, 숙련된 기사 앞에서 힘자랑이라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나 참. 하녀 짐 들어 주는 귀족이 어디 있어요?”

에슬린이 질린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귀족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하녀도 없어.”

그는 태연하게 대꾸하며 걸어 나갔다.

어쩔 수 없이 함께 길을 걸었다. 그의 수행 하녀처럼 보이길 간절히 바라면서.

‘그나저나 귀족인데 왜 맨날 혼자 다니는 거야?’

에슬린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자료는 좀 도움이 됐나?”

그가 불쑥 물었다. 그는 물끄러미 에슬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하지만 아직 다 보진 못해서…….”

“…….”

“왜요?”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손에 든 향유 바구니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시 에슬린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에르단 황자의 사람인데, 왜 황자비궁의 하녀로 있는 거지?”

에슬린은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을 무슨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테베트가 피식 웃었다.

“그것도 비밀인가?”

“하녀가 어떻게 궁을 선택할 수 있겠어요.”

“그럼 어떻게 에르단 황자를 알게 된 건데?”

으음. 에슬린이 침음에 빠져들었다. 날카롭고도 당연한 질문이었다.

“에르단 황자님하곤…… 이래저래 인연이 깊거든요.”

“인연이 깊다고?”

그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게 무슨 뜻이지?”

“그러니까…….”

둘러댈 말을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로즈벨?”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수석 하녀, 세피아 레나드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에슬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슬린 옆에 선 남자의 존재를 발견한 세피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리, 리페리우스 공작님!”

이게 뭔 일이야? 그녀는 눈으로 그렇게 묻는 듯했다.

에슬린은 재빨리 바구니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가 잠시 힘을 주며 버텼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어.”

“하녀가 보고 있잖아요. 놔 주세요.”

테베트는 슥 에슬린의 뒤를 응시했다.

“저 하녀와도 인연이 깊은 건가?”

“……네?”

“그런 거겠지?”

어쩐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말투였다.

“맞아요. 아무튼 이거 놔주세요.”

대충 얼버무리며 에슬린이 다시 바구니를 잡아당겼다.

그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테베트가 이내 손에서 힘을 풀었다. 뭘까, 이 속이 뒤틀리는 기분은.

“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이만.”

“…….”

에슬린은 가볍게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가자.”

세피아를 지나쳐 빠르게 걸었다.

세피아는 바위처럼 선 테베트를 멍하게 보다가 잽싸게 인사하곤 에슬린을 쫓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우연히 떨어뜨린 걸 주워 주신 것뿐이야.”

“오…….”

세피아가 감탄을 흘리면서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에슬린은 어쩐지 뒤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황자비궁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그제야 용건이 떠오른 듯 세피아가 속삭였다.

“그보다 서둘러. 2황자 전하께서 오신대.”

“에르…… 2황자께서?”

갑작스러운 말에 에슬린이 미간을 좁혔다.

“응.”

“왜?”

“글쎄.”

세피아가 짧게 대꾸하며 앞서 나갔다. 에슬린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왜냐고 물었지만 사실 에르단이 방문한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참을성 없는 황자가 슬슬 움직일 때였다.

* * *

에르단 베르타니아가 황자비궁을 방문했다.

다소 뜬금없는 점심 식사 요청이었다.

레실리아를 비롯한 모두가 어리둥절했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제게 점심을 청하시다니, 처음 있는 일 아닌가요?”

레실리아가 우아한 얼굴로 웃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에르단이 있었다. 그는 마찬가지로 우아하게 웃으며 앞에 놓인 음식을 뒤적였다.

“그래도 가족인데 그간 너무 소원했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푸른 눈동자가 레실리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묘한 시선이 부딪쳤다.

에르단은 부슬거리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가볍게 내리고, 밝은색 의상을 입고 있었다.

선이 얇고 가늘어 무표정일 땐 유약한 미소년에 가까운 인상이었으나, 막상 입을 열면 표정이 꽤 풍부했다.

“이번 기회에 형수님과 친해져 보고자 하는 마음이었는데. 싫으십니까?”

에르단은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뭐, 싫을 것은 없지만.”

레실리아가 반듯하게 웃었다.

“우리가 굳이 친해져야 할 이유가 있을진 모르겠네요.”

꿈틀, 에르단의 매끈한 미간이 움직였다.

그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어찌 됐든 지금 아쉬운 건 자신이 아닌가?

“서운하군요, 형수님. 물론 서로의 입장도 있고…… 우리가 친해질 이유는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무슨 의미죠?”

“형수님께서 이 식사 자리가 아쉬워지실 수도 있으니까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팽팽한 침묵 속 두 사람의 시선이 겹쳤다.

“저, 전하. 메인 요리를 내오라 하겠습니다.”

침묵을 깬 건 뒤에서 땀을 흘리던 메리사였다.

기다렸다는 듯, 줄줄이 요리가 들어왔다. 다시 어색한 식사가 이어졌다.

에르단은 한 번 더 눈을 들어 레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레실리아의 뒤에 조용히 서 있는 하녀를 보았다.

‘하여튼 눈길도 안 주지.’

저를 보겠답시고 되지도 않는 말이나 지껄이며 밥을 먹고 있는데.

에르단은 갑자기 심술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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