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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87화 (87/147)

87화

“아,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난 사람처럼 식기를 내려놓았다.

가볍게 손짓하자 근처에 서 있던 에르단의 시종이 다가섰다.

널따란 테이블 위에 와인 병이 놓였다.

“벨레인산 와인입니다. 식사에 곁들이시면 어떻겠습니까?”

에르단은 눈을 접어 웃었다.

레실리아 또한 식기를 내려놓으며 입가를 닦았다. 와인을 보는 눈동자에 어쩔 수 없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어머. 이건 남편이 좋아하는 와인이군요.”

“형수님.”

에르단이 살살 고개를 저었다.

“형님이 아니라, 형수님께 드리는 겁니다.”

허를 찌르는 듯한 말에 레실리아가 도톰한 입술을 서서히 다물었다.

‘에슬린이 여기에 있는 이상, 당신하곤 싸울 이유가 없지.’

에르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물을 마셨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지났다.

레실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완벽한 미소를 걸친 채였다.

“그렇네요.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굳이 모든 걸 공유할 필요는 없겠죠.”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 사람 또한 내게 그러니까.”

마지막 말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바로 뒤에 서 있던 에슬린에게만 들릴 정도의.

레실리아가 하녀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가서 좋은 와인 잔을 가져오너라.”

그 말에 하녀 하나가 어딘가로 사라지더니 곧 고급스러운 잔을 가지고 나타났다.

레실리아의 눈동자가 벨레인 와인의 라벨을 집요하게 훑었다.

잔이 오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어색한 식사는 나쁘지 않게 마무리되는가 싶었다.

황자가 제 옷에 와인을 쏟기 전까지는 말이다.

에르단은 얼룩이 진 상의를 울적하게 내려다보았다.

“아끼는 옷인데.”

“그러게 왜 입고 와?”

“아끼는 옷이니까 입은 거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에슬린이 고개를 저었다.

멀쩡히 식사하던 황자가 와인을 쏟았다. 그의 하녀들은 부랴부랴 옷을 준비하러 떠났고, 에르단은 별도의 공간에서 옷을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그 시중을 들겠다고 나선 건 당연히 에슬린이었다.

“그나저나 넌 오랜만인데 반갑지도 않나 봐? 황녀궁에서 못 만난 지가 얼만데.”

“며칠 안 됐는데 무슨……. 그래도 뭐, 잘 왔어. 마침 줄 게 있었거든.”

에슬린이 품에 넣고 있던 자료를 건넸다.

“이게 뭐야?”

“테베트 경에게 받은 자료야. 도서관에 없던 성배에 대한 기록.”

“오.”

“가서 훑어봐. 잘 보면 100년 전과 달리 마물 포털의 상태가 조금 달라진 게 단서인데…….”

에슬린은 그간 파악한 정보들을 간략히 읊었다. 테베트가 건넨 것들은 간결했지만 하나같이 의미 있는 것들이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에르단이 턱을 괸 채 웃었다.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며칠 전에 휴가라더니, 밖에서 리페리우스 공작을 만났어? 그래서 네 기분이 좋은 거구나?”

“누가 기분이 좋아?”

“너. 싱글벙글하잖아.”

에슬린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내 말은 안 듣고…… 그런 거 아니야.”

짧은 타박에 에르단은 흐흐 웃을 뿐이었다.

“악마 공작이라고 부르던 것도 슬슬 그만둬야겠네…….”

놀리는 듯한 말에 결국 등짝을 한 대 치고야 말았다.

“기억이 돌아올까 봐 정보만 받고 요리조리 피하려던 생각 아니었나?”

에르단이 등을 문지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디엘이 곧 돌아오잖아. 게다가 그렇게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고.”

“변명은.”

제가 들어도 변명처럼 느껴졌기에 에슬린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에르단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그래! 됐어, 됐어! 그냥 너 내키는 대로 해. 뭐 막말로, 기억 좀 돌아오면 어때?”

“뭐라는 거야.”

“네가 기억 잃으면 이번엔 그 악마…… 흠, 공작? 매제? 어쨌든 그 남자가 또 어떻게든 하겠지. 나도 뭐, 손 놓고 구경만 하겠어?”

에르단은 가볍게 지껄였다. 결국 또 등짝을 얻어맞고 말았지만.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영원히 반복되는 굴레? 반복되려면 반복되라지. 잊으면 알려 주고, 또 잊으면 또 알려 주면 될 일이다.

어쨌든 그는 죽다 살아난 제 쌍둥이가 지금 당장 행복했으면 했다.

아, 공작저에서 바람맞힌 건…….

‘그건 나중에 책임을 물어야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에르단의 눈이 악마처럼 빛났다.

“너 이상한 표정 지을 거면 그냥 가.”

귀신같이 속내를 알아차린 에슬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에르단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료를 대충 훑어보는 척했다. 긴 손가락이 삐딱하게 턱을 짚었다.

“그나저나 요즘 젝스 경이 안 보여.”

그러자 에슬린이 대답했다.

“아, 젝스 경은 궁 밖에 있어.”

“궁 밖?”

응, 에슬린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휴가거든.”

“기사단장이 젝스 경에게 휴가를 줬어? 그럴 리 없을 텐데…….”

영문 모르겠다는 듯 에르단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니. 내가 줬어.”

“무슨 소리야?”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르단의 하녀들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에슬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출입문으로 몸을 돌리며 그녀가 대꾸했다.

“내 궁을 뒤진 범인을 찾아오라고 했거든.”

* * *

어두운 밤, 수도 외곽.

그곳엔 아는 사람만 들르는 낡은 주점이 있었다.

젝스 에티우드는 기척을 죽인 채 골목에 몸을 묻었다. 흐릿한 불빛이 주점 창문 바깥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런…….”

그는 낭패감을 느꼈다. 커튼 뒤에서 흔들리는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살랑, 살랑. 부드러운 손짓이 저를 부르듯 움직이고 있었다.

끼이익. 젝스는 기척도 지우지 않고 주점 문을 열었다.

“짜자잔!”

가장 안쪽 방, 그 한가운데에 선 남자가 양팔을 쫙 벌렸다.

“언제 오나 두근두근하며 기다렸잖아!”

“……로하르트 님.”

“오랜만이야, 젝스. 한 200년 만인가?”

남자, 로하르트 젤킨스의 입매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200년은 아니고, 2년 정도는 됩니다.”

“하여튼 농담을 몰라.”

그는 아주 유쾌한 동작으로 젝스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곤 과장한 몸짓으로 뒤돌아 장식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구불거리는 레몬빛 머리카락이 그의 움직임에 맞춰 경쾌하게 흔들렸다.

“뭘 마시겠어? 서부 켈렉에서 들여온 브랜디가 있는데 어때?”

“저는……”

“자, 한잔해.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로하르트는 투명한 잔에 졸졸졸 술을 따랐다.

젝스의 어깨에 한쪽 팔을 걸치자, 커다란 덩치가 엉거주춤 몸을 굽혔다.

그가 젝스의 얼굴 앞에 잔을 들이밀었다.

“이거 비싼 거야. 그 말인즉슨 아주아주 귀하고 맛있다는 말이지.”

“…….”

“아, 혹시 바다 건너에서 가져온 술을 원하나? 역시 고향의 맛이 그리워?”

젝스가 땀을 삐질 흘렸다.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은,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왜?”

로하르트의 살짝 처진 눈꼬리에 느슨한 웃음이 걸렸다.

그가 입은 흰 셔츠의 단추는 고작 절반만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신발은 어디다 갖다 팔아먹었는지 맨발이었다.

건들거리는 몸짓. 흐트러진 머리.

누가 봐도 취객의 모양새였다.

하지만 젝스는 그에게서 미약한 술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 못 마시는데?”

“그건…….”

“에슬린이 화낼까 봐?”

밝은 청록색 눈동자에 순간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순식간에 드러난 싸늘한 얼굴. 그러나 로하르트는 금세 제 표정을 갈무리했다.

“역시…… 황녀궁을 수색한 건 로하르트 님이셨습니까?”

“하하. 황녀궁만 뒤진 건 아니야. 에르단 궁도 한참 뒤졌는데, 그건 몰랐나 봐?”

젝스는 할 말을 잃었다. 에르단에게 별말이 없어서 솔직히 그것까진 몰랐다.

“너희를 그 연회장에 가둬 놓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 이빨 빠진 호랑,”

로하르트는 달콤하게 웃으며 말을 고쳤다.

“돼지 새끼가 먼저 쓰러져 줘서 다행이었지. 덕분에 일이 뚝딱 풀렸지 뭐야?”

“로하르트 님!”

“아, 실례. 방금 건 돼지한테 미안한 말이었어.”

흐흐흥, 로하르트가 콧노래를 부르며 의자에 앉았다.

긴 두 다리가 테이블 위에 올라갔다.

“그래서 젝스. 날 데려가려 왔어? 우리 에슬린 명령으로?”

로하르트는 술잔을 기울였다.

살짝 내려간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휘었다.

하지만 젝스는 알 수 있었다.

그를 둘러싼 공기가 점점 사납게 벼려지고 있다는 걸.

“예, 그러니 함께 가시죠. 주군께서 기다리십니다.”

“하하, 주군!”

로하르트가 술잔을 탁 내려놓았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리일까…….”

문득 불안감이 등골을 내달렸다. 젝스가 검 자루에 손을 얹었다.

“난 에슬린을 주군으로 삼은 기억이 없는데.”

퍽! 무언가가 젝스의 목을 내리쳤다.

커다란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 * *

에슬린은 황자비궁 정원을 걷고 있었다.

며칠 내내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레실리아를 따라나선 것이었다.

레실리아는 메리사와 몇몇 하녀들을 뒤꽁무니에 단 채,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 정원을 산책했다.

“오늘은 좀 날이 따뜻하구나.”

“그러게요.”

털옷에 푹 잠긴 레실리아는 어쩐지 수심 깊은 얼굴이었다.

“그보다 곧 황자 전하 생신인데, 무슨 선물을 해 드려야 할지 고민이야.”

“음. 뭘 드려도 좋아하지 않으시겠어요?”

메리사가 짧게 대꾸했다. 그녀로선 사실 별 관심 없는 주제였다.

“그럴까? 그래도 가장 기뻐하실 만한 선물을 드리고 싶어.”

“함께 고민해 볼게요. 여쭤보면 좋겠지만…….”

메리사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연회 이후로 한 번도 못 뵈신 거죠?”

“그래…….”

쓸쓸한 레실리아의 목소리가 겨울바람과 함께 잦아들었다.

메리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인의 뒤를 따랐다.

할 수만 있다면, 사실 소리 내어 말하고 싶었다.

카르단 베르타니아는 황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제 부인에게조차 애정과 책임을 다하지 않는 남자가 과연 백성을 위해서라고 다를까?

점점 커지는 그 무엄한 생각을, 메리사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아직 고민 중이었다.

“음? 저기 사람들이 왜 저렇게 몰려다니지?”

조용히 걷던 레실리아가 물었다. 저 멀리 앞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 시선을 따라간 메리사가 풉 웃었다.

“오늘 그분께서 오셨거든요.”

“그분?”

“리페리우스 공작님 말이에요.”

“아아.”

조용히 걷던 에슬린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귀족 마차가 다니는 길에 사용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쑥덕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는데 황후 폐하를 뵙는다고 하셨지, 아마.”

그 말을 들은 메리사의 고개가 갸웃 움직였다.

“황후 폐하요? 무슨 일이실까요? 설마, 또 전쟁?”

“아니. 그렇다기보단…….”

레실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결혼 얘기가 아닐까?”

우뚝. 에슬린의 걸음이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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