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결혼 얘기요?”
“그래. 예전에 한 번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는데, 이런저런 일로 흐지부지되었다고 들었거든.”
“어머나…….”
메리사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흘렀다.
“여럿 앓아눕겠네요.”
벌써부터 애달파할 인물들이 수두룩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레실리아에게 바짝 붙었다.
“그래서 상대는요?”
“글쎄, 그것까지는 잘. 동부의 남작 영애라는 소문도 있고, 어딘가의 준남작 영애라는 소문도 있고.”
“그렇군요.”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건 없다는 소리였다. 메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문득 옆이 휑했다. 돌아보니, 지금껏 묵묵히 걷던 에슬린이 보이지 않았다.
“뭐 해, 로즈벨?”
“아, 죄송해요.”
에슬린이 서둘러 쫓아왔다. 시선은 여전히 마차길에 못 박힌 듯 향해 있었다.
메리사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앓아누울 인물이 바로 옆에 있었네.’
담담한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조금 굳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메리사는 에슬린을 향해 속삭였다.
“로즈벨, 너무 상심…… 음?”
위로하듯 뻗어 나간 손이 딱 멈추었다.
“이게 뭐지?”
에슬린의 바로 뒤에 지금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
레실리아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황량한 겨울 정원. 앙상한 가지만이 남은 나무들.
그 틈에 나 홀로 피어난 화사한 연보라색 꽃.
“라일락?”
레실리아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한겨울에 웬 봄꽃이죠?”
메리사가 나뭇가지를 매만졌다.
“오늘 좀 따뜻하다지만 별일이 다 있네요.”
“계절을 착각한 걸까? 귀여워라.”
레실리아가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모처럼이니 침실에 장식해 두고 싶구나.”
“그럴까요? 로즈벨.”
메리사가 에슬린에게 가볍게 눈짓했다. 두 사람은 다시 산책로를 따라 멀어졌다.
에슬린은 라일락 꽃가지에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가지 하나에 작은 꽃들이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있었다.
“…….”
에슬린은 그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바람이 불자 라일락 향기가 훅 풍겼다.
‘결혼한다고?’
북부 공작저에서 제게 라일락을 선물하던 남자가 떠올랐다.
에슬린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가녀린 꽃잎 한 장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어이없네.’
에슬린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가지는 꺾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어쩐지 꺾을 수 없었다.
* * *
한밤중이었다.
세피아 레나드는 1황자궁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뭐? 그 하녀가 야밤에 밖을 나돌아 다닌다고?”
“예, 전하.”
세피아는 공손히 대답했다. 카르단이 몸을 기울였다.
“어딜 가더냐?”
“그것까지는…….”
“이런 쓸모없는!”
탕! 팔걸이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거친 노성이 터졌다. 세피아의 몸이 들썩였다.
“뒤, 뒤를 쫓는 건 좀…….”
“받아라.”
발치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금실 자수가 새겨진 금화 주머니였다. 고개를 드니 눈을 부라리는 카르단이 보였다.
“이제 끝까지 따라가 볼 마음이 생겼느냐?”
세피아는 주머니를 주워 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탐욕스러워 보이길 바라면서 입술을 말아 올렸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이대로 연극배우나 되는 게 낫지 않을까? 세피아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당연히 이 이야기는 에슬린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좋은 기회네.”
“엥?”
“내 뒤를 밟아, 세피아. 한 내일모레쯤.”
“진짜?”
에슬린은 금화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들을 볼 수 있을 거야.”
“…….”
세피아는 에슬린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도 없는데 애가 헛소리하네.
그 의도를 읽었는지 에슬린은 그저 고요히 웃을 뿐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좋아. 지금까지 어딜 그렇게 다녔나 한번 보자고.’
에슬린이 시킨 대로, 세피아는 한밤중에 그녀의 뒤를 밟았다.
놀랍게도 에슬린이 향한 곳은 오래전에 폐쇄된 황녀궁이었다.
‘황녀궁에 숨어들다니. 얘가 미쳤어!’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 세피아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숨죽여 고민했다.
‘그냥 도망칠까?’
이건 정말이지 보통 일에 휘말린 게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이걸 카르단 황자에게 말하라고?
세피아는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역시 그냥 돌아가자.’
에슬린을 만나서 확실히 물어보고, 그냥 같이 궁을 나가자고 해야겠어.
세피아는 초조한 표정으로 손끝을 물었다.
돌아가자고 마음먹었으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풀숲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저…… 정말 여기가 맞는 거야?”
“그래. 누님이 말한 곳이 여기야.”
“나 무서운데. 황궁 들어오자마자 이게 무슨 일이야……?”
“쉿. 조용하고 발소리나 조심…… 어?”
속닥거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세피아는 천천히 굽히고 있던 몸을 폈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얼굴들과 눈이 마주쳤다.
“세피아 누님?”
이제 막 소년티를 벗은 정원사 둘이 동시에 말했다. 달빛이 환하게 그들을 비추었다.
‘그리운 얼굴들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런 의미였나.
“휴고, 헤즐턴…….”
북부 리페리우스 공작저의 어린 정원사들.
문득 하녀장 아델을 통해 하인장에게 전달했던 편지가 떠올랐다. 그 편지만큼은 에슬린이 쓴 것이었다.
“…….”
세 사람의 눈동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방향으로 이동했다.
녹슨 쇠사슬로 굳게 잠긴 황녀궁.
바람조차 머물지 않는 이 황량한 유령궁.
이 안에 있는 건, 도대체 누구인 걸까?
* * *
레실리아는 집착처럼 몰두했던 향유 목욕을 어느 날부터인가 그만두었다.
그 탓에 에슬린의 향유 심부름 또한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도 바빴다.
“엇.”
급하게 모퉁이를 돌던 걸음이 멈추었다.
에슬린은 품에 안고 있던 책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먼저 확인했다.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
기분 좋은 저음이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고개가 홱 치켜 올라갔다.
상대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였다.
“여긴 웬일이에요?”
“내가 할 말인데.”
테베트가 속삭였다. 높고 화려한 도서관 천장을 배경으로 한 그의 얼굴이 몹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저 멀리 나이 든 사서가 고개를 빼 들었다. 다행히 거리가 멀어 목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요즘은 하녀가 도서관도 다니나?”
피식 웃음을 머금은 그가 물었다.
“전 황자비 전하의 심부름으로…….”
“아하, 심부름. 제법 하녀다운 발언이야.”
“하녀라니까요.”
……그는 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에슬린은 조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사서와 자꾸 눈이 마주쳤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별안간 테베트가 품에 안은 책 꾸러미를 휙 빼앗아 갔다.
툭.
그 탓에 책 사이에 끼워 둔 종이 뭉치가 떨어졌다.
“소식지?”
“황자비 전하께서 빌려 오라 하셔서.”
에슬린은 대수롭지 않게 소식지를 주워 들었다. 옆구리에 소식지를 낀 채 그대로 출입문을 넘는다.
테베트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황자비가 남부 소식지를 읽는다고?’
그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눈이 오네요.”
한발 늦게 그녀를 따라 나가니, 에슬린이 입구에 서서 하늘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흐리더니 기어코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먹어 버린 듯, 사박사박 내리는 눈에 사위가 고요했다.
“쌓이려나?”
에슬린이 손을 내밀어 눈을 맞이했다.
“그때 준 자료는 도움이 됐나?”
테베트가 에슬린의 손끝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얀 눈은 손바닥 온기에 금세 녹아내렸다.
“네. 제법이요.”
에슬린이 손을 털며 말했다.
긴 소매 안쪽으로 하얀 손이 사라지자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마물에 대한 정보를 그렇게 상세하게 본 건 처음이었어요. 역시 공작가에만 내려오는 자료들인가요? 성배가 사라지던 시기의 포털의 상태 변화도 흥미로웠는데…….”
자료 내용을 복기하듯 에슬린이 중얼거렸다.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테베트는 딱히 그녀의 말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그 입술을 보며 서 있었다.
“아무튼 그 자료를 통해 마물이 성배를 훔쳐 간 게 맞는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
“성배는 사라진 게 아니라 도둑맞은 거예요. 제 결론이 맞죠?”
휙, 에슬린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테베트는 어울리지 않게 조금 움찔하고 말았다.
어쩐지 몰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기분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래…… 맞아.”
그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에슬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검지로 턱을 짚었다. 다시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물이 소지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포털로 인해 서식지화한 장소에 나타나는 형태? 음……. 테베트 경은 어떻게 생각하…….”
중얼거리던 에슬린의 입이 딱 멈추었다.
얼어붙은 뺨에 크고 단단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커다란 손에 감싸인 볼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런 그녀를 달래듯 두꺼운 엄지가 눈 밑을 살살 쓸었다.
“눈이 묻었길래.”
그는 턱을 기울인 채 에슬린의 흰 뺨에 몰두해 있었다.
눈을 깜빡이자 엄지에 속눈썹이 닿았다 떨어졌다.
팔랑, 팔랑. 바쁘게 움직이는 기다란 속눈썹이 그의 엄지를 간지럽혔다. 그 감각에 테베트는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당신은 여기마저 참 바쁘군.”
그제야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