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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89화 (89/147)

89화

화르륵 귓가가 뜨거워진 에슬린이 뒷걸음질 쳤다. 손이 떨어져 나갔다.

“사람들이 보……”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봐?”

테베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에슬린은 뒤를 흘끔거렸다.

호기심 가득한 사서가 저 문이라도 열고 나왔다면…….

아찔한 기분에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

테베트가 따라붙었다.

그는 책 꾸러미를 들어 에슬린의 머리 위를 가렸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에 눈이 쌓이자 결국 제 망토를 벗어 둘러 주었다. 후드를 푹 씌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느새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저 멀리 하녀들이 눈을 피해 건물 안으로 도망쳤다.

에슬린은 그럼에도 인적이 드문 샛길로 접어들었다. 함께 있는 모습을 들켜서 좋을 게 없었다.

“아까 궁금해하던 거 말이야.”

테베트가 불쑥 말했다.

“성배를 마물이 소지하고 있는 건지, 마물이 있는 장소에 나타나는 건지에 대해서.”

에슬린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품 안을 뒤적여 자료 한 권을 건넸다.

“그걸 살펴봐.”

에슬린의 눈이 조금 벌어졌다. 그건 그녀가 내내 궁금해하던 것이었다.

황급히 자료를 펼쳐 보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덮었다.

“어딜.”

반듯한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대가가 아직이야.”

기억에 대해 알려 달라는 건가?

에슬린은 그를 살짝 쏘아보았다.

“돌아온 기억이라도 있어요?”

테베트는 대답하지 않고 자료 위에 겹친 손을 그대로 감싸 쥐었다.

“일단 눈을 좀 피하는 게 좋겠어.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억울할 것 같군.”

“…….”

에슬린은 그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결국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얌전하던 심장이 쿵쿵 울렸다.

아무도 걷지 않은 흰 눈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뽀득, 뽀득.

고요한 가운데 그 발소리만이 남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에슬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테베트가 돌아보았으나 그녀는 정면을 응시한 채였다.

“뭐지?”

“결혼 얘기가 있다던데.”

걸음이 멈추었다.

잠시 앞을 보던 에슬린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바람 빠지듯 웃었다.

“…….”

“또 상관없다는 얼굴.”

잠시 굳어 있던 테베트가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군.”

그는 희미한 황후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아.”

에슬린이 한탄인지 감탄인지 모를 숨을 내쉬었다.

‘저 한결같음은 대단하네.’

그녀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다 좋은데, 테베트 경. 그 혼담, 기억을 찾고 난 다음에 검토하는 건 어때요?”

에슬린이 한숨처럼 말했다.

테베트의 눈가가 꿈틀 경련했다.

“……기억을 찾으면 내 결혼이 달라지기라도 한다는 말투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테베트는 가볍게 할 말을 잃었다.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 들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건, 눈앞의 여자가 제게 좋아한다고 말하던 장면이었다.

감정과 결혼. 그건 그에게 별개의 문제였지만 이 여자에겐 당연히 아닐 것이다.

“나는…… 당신을 그다지 리페리우스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저도 끌려들어 갈 생각 없는데요.”

무거운 말에 가벼운 대답이 돌아왔다. 설핏 명랑하게까지 들리는 말투였다.

에슬린은 하나도 거리낄 게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실제로도 그랬다.

끌어들인다니. 감히 누가 베르타니아 황족을 귀족가에 끌어들일 수 있단 말인가?

“무슨 뜻이지?”

하지만 에슬린은 말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아직 붙여선 안 되는 사족이었다.

대신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저와 관련한 중요한 질문이니 답변하지 않을게요. 아무튼, 제 말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 봐요.”

“제멋대로군.”

결국 피식 웃음이 터졌다.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다시 두 사람은 길을 걸었다.

길이 좁아지는 부분에서 테베트가 옆으로 걸음을 틀었다. 수풀에 가려진 울타리를 밀자 부드럽게 열렸다.

에슬린은 조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길을 알아요?”

테베트는 순간 멈칫했다.

“그러게. 왜지?”

스스로도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가 슥 고개를 돌렸다.

“내가 당신과 이 길을 걸은 적이 있나? 지금처럼?”

그러자 에슬린이 웃었다.

그녀는 함께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았다.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커다란 발자국과 조그만 발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무슨 뜻이야?”

“당신과 이 길은 수도 없이 걸었지만 이렇게…….”

에슬린은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손을 잡고 걸은 적은 없거든요.”

“…….”

테베트의 어깨가 경직했다.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에슬린을 내려다보았다.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

“어후! 추워!”

“빨리 서둘러!”

그때 하인들 몇이 거칠게 욕을 하며 장작을 들고 지나갔다.

에슬린이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기억에 관해 물어볼 게 없으면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그러더니 망토를 건네곤 짐을 빼앗아 휙 사라진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테베트는 차마 막지도 못했다.

‘뭐지?’

홀로 남은 그는 텅 비어 버린 손을 내려다보았다.

“…….”

홀린 듯 뒤돌아 그녀와 걸어온 길을 보았다. 옹기종기 찍힌 발자국.

그래, 이 길을 에슬린과 걸었다.

지금처럼, 예전에도.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다.

웃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던 기억.

‘그런데…….’

이번 기억은 이상했다.

늘 낙서한 듯 가려져 있던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테베트 경.’

그렇게 부르던 얼굴.

‘에슬린 베르타니아 황녀.’

왜 그 얼굴이 저 여자와 겹친 걸까?

달그락. 낯선 소리가 났다.

작은 조각 하나가 그의 빈 구멍 속 제자리로 파고드는 소리였다.

에슬린은 테베트와 헤어져 황자비궁으로 가고 있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문득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림 좋습디다?”

화단에 쭈그려 앉은 남자가 빈정거렸다. 까칠하기 그지없는 표정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로브를 도대체 몇 겹 껴입은 건지 툭 치면 굴러갈 것 같았다.

그와 대조되는 뾰족해진 턱선과 날카로운 눈빛, 조금 더 길어진 녹색 머리카락…….

“디에리안!”

에슬린은 돌아온 마법사를 환영했다.

* * *

디에리안은 황녀궁 벽난로 앞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코끝이 저릿하고 목이 간지러웠다.

푸엣취! 결국 그가 커다랗게 재채기했다.

“빌어먹을…… 수도가 이렇게 추울 줄이야.”

그는 코를 팽 풀며 투덜거렸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누가 보면 남부에서 나고 자란 줄 알겠어.”

소식지를 뒤적이던 에슬린이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그녀가 앉은 테이블 위엔 온갖 자료들이 첩첩산중을 이루고 있었다.

“남부는 따뜻하고 좋았는데…….”

그는 킁, 코를 들이마신 뒤 몸을 일으켰다.

근처에 굴러다니는 모포를 되는대로 끌어안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황녀궁이 아주 대단한 비밀 기지처럼 되었습니다?”

“나도 오랜만에 온 거야. 이런저런 일이 있었거든.”

“그래요?”

“응. 네가 보호 마법 걸어 줬으니 이제 안심이네.”

디에리안은 제가 건 마법은 단순한 보호 마법이 아니라 아주 복잡한 수십 겹의 고위 결계라고 어필하려다 관두었다.

“그러고 보니, 젝스 경은요?”

에슬린에게 모포를 건네며 물었다.

“심부름을 보냈는데 늦어질 것 같다더라고.”

에슬린은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그걸 본 디에리안이 미간을 희미하게 좁혔다.

“별일이군요. 그 젝스 경이 고작 편지 한 장으로 늦는다고 통보하다니…….”

“음. 나도 이상하긴 한데, 일단은 기다려야지.”

“하긴. 그 남자가 어디 쉽게 당할 인물입니까.”

탁. 마지막 문단을 마저 읽은 에슬린이 소리 나게 소식지를 접었다. 그녀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아무튼, 어서 와, 디엘. 고생 많았어.”

마법사는 머쓱한 듯 뒷목을 긁었다.

“네. 뭐…… 다녀왔습니다.”

“남부는 어땠어?”

어깨에 걸친 모포를 내려 두고 에슬린이 일어섰다. 그녀는 벽난로 앞 소파에 가 앉았다.

디에리안은 이때다 싶어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어떠냐는 질문의 의미가 애매하군요. 날씨가 어땠는지 물으시는 거라면 거긴 가히 천국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고, 분위기가 어땠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지옥이 따로 없는 곳이었습니다.”

“지옥이라니.”

에슬린의 미간이 구겨졌다.

“남부 상황이 그렇게 안 좋아?”

“남부 열병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다 보니 재정난에 식량난에…… 뭐 여러 가지가 겹쳤습니다. 남부로 가는 길목엔 도적들도 들끓고요. 에볼튼 자작령은 특히 더 상황이 심각하죠.”

“소식지에 전해지는 것보다 안 좋구나.”

“그깟 줄글로 어떻게 이 모든 걸 다 전하겠습니까?”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황궁과 각 귀족이 남부에 지속적인 지원을 보내고 있었지만 궁여지책이었다.

“그건 그렇고, 제 위대한 마법 성과에 대해선 안 궁금하신 겁니까?”

불빛에 손을 쬐던 디에리안이 까칠하게 물었다. 에슬린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럴 리가. 제일 궁금하던 거였는데.”

씨익, 그의 입꼬리가 다소 음침하게 올라갔다. 그는 품을 뒤적거렸다.

“받으십시오.”

손안에 붉은 마법석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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