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에슬린은 그 차가운 감촉을 쥐고서도 한참 동안 실감하지 못했다.
펠리서스.
조각난 그 형태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멀쩡해졌어…….”
“제가 해낸 거죠.”
스스로를 추켜세운 뒤 그는 조그맣게 덧붙였다.
“물론 그 여자의 도움이 조금 있긴 했습니다. 한, 지네 다리 정도만큼?”
“많았다는 거네?”
디에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불빛에 에슬린은 마법석을 비추어 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내부가 흐리고 탁했다.
“근데 뭔가 이상한데? 이 마법석.”
“흠. 아시는군요. 사실 모양만 멀쩡해졌을 뿐…… 미완성입니다.”
“응?”
에슬린은 디에리안을 돌아보았다.
마법사가 성의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신전 마법 화로가 필요해요. 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
에슬린은 다시 펠리서스를 디에리안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펠리서스를 쥐고 한참을 남은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대부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었으므로, 에슬린은 거의 귀담아듣지 않았다.
“근데 펠리서스는 이제 필요 없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엔 귀가 반응했다.
“무슨 소리야?”
에슬린이 물었다. 디에리안의 한쪽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아까 보니 전하를 보는 그 남자 눈빛이 여전히 변태 같던데요. 소름 끼칠 만큼.”
“…….”
“정말 기억 잃은 거 맞습니까?”
디에리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에슬린은 민망함에 살짝 볼을 긁었다.
“기억이 멀쩡하면 이 고생을 안 했지.”
“네. 그건 저도 마찬가지겠고요.”
디에리안이 읏차, 몸을 일으켰다.
짊어지고 온 커다란 자루를 뒤지기 시작했다.
온갖 책과 약병, 꿈틀거리는 주머니(정체를 알고 싶지 않았다.) 등이 튀어나왔다.
“여기 이것도 개량을……”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카르단 궁으로 가는 지하 통로를 파자!”
두 사람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거기엔 제국의 2황자가 악동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갑자기 뭔 소리야?”
에슬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 디에리안.”
에르단은 디에리안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디에리안 또한 대충 목만 까닥여 알은체했다.
“오늘도 황궁 정원에 라일락이 피었거든. 가지 하나뿐이지만.”
아하, 에슬린은 잔뜩 신이 난 에르단을 그제야 이해했다.
“카르단 표정이 궁금해 죽을 것 같아.”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에르단이 키들거렸다.
“듣자 하니, 성공하셨나 보군요?”
잠자코 있던 디에리안이 물었다.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나무 전체에 피워 내진 못했어. 피어 있는 시간도 10분 정도고.”
“뭐, 일전에 보낸 건 그런 마법이었으니까요.”
디에리안은 냉정하게 평가했다.
“아무튼 이게 개량품입니다. 씨앗 자체에 마력을 담았어요.”
탁. 그가 아까 꺼내려던 것을 마저 꺼내 놓았다. 작은 씨앗들이었다.
“겨울 포도 재배하던 것에서 힌트를 얻은 건데 그 원리에 대해 궁금하십니까? 궁금하시겠죠?”
“아니, 나중에.”
마법사는 순식간에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다. 마지못한 표정으로 그가 덧붙였다.
“심으면 순식간에 자랄 겁니다.”
오오, 에르단이 씨앗 한줌을 집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근데 씨앗을 들키지 않고 심을 사람은 있고?”
“적격인 인물들이 있지.”
에슬린이 자신 있게 웃었다. 그러곤 그녀 또한 씨앗 하나를 집어 그 감촉을 느꼈다.
봄에만 피는 꽃.
매년 봄마다 황녀궁 정원에 만개하던 라일락.
제 침실 발코니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보랏빛 물결을 보는 것은, 에슬린이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근데 이걸로 될까?”
씨앗을 구경하던 에르단이 고개를 들었다.
“봄꽃이 겨울에 피는 게 아주 신기하긴 하지만…… 사실 그뿐이거든.”
에슬린은 에르단을 응시했다.
“이걸로 뭘 하려는 생각은 없어.”
“응?”
“이건 그냥 지나가는 해프닝일 뿐이야.”
씨앗을 손에 말아 쥐며 그녀가 씩 웃었다.
“누군가에겐 아닐 수도 있겠지만.”
* * *
카르단은 고함을 내질렀다.
“태워라! 태워!”
화르륵, 마른 나무에 불이 붙었다. 황궁 곳곳에 있던 라일락 나무였다.
“다 태워 버려!”
“예, 예! 전하!”
광기 어린 그 목소리에 하인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불을 질렀다. 날름거리는 불꽃이 나무를 휩싸고 까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젠장…… 불길하게.”
카르단은 으득 이를 갈았다.
계절에 맞지 않는 라일락은 어느 샌가부터 황궁 정원에, 산책길에, 분수대에, 조각상 근처에 한 송이씩 피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모두가 그걸 신기하게 여기고 말았으나, 카르단은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의 오싹함을 잊을 수 없었다.
“전하께서 점점 더 이상해지시는 것 같아…….”
“그러게. 왜 멀쩡한 나무에 화풀이이신 거지?”
어린 하인들이 재가 되어 버린 나무를 보며 속삭였다.
“내 눈에 절대 띄지 않게 해!”
물론 카르단에겐 닿지 않았다.
* * *
테베트는 분주히 움직였다. 에슬린을 만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주님.”
널찍한 복도를 걷는데, 사티나가 다가왔다. 반듯한 얼굴이 저절로 차가워졌다.
그대로 멈춰 사티나를 바라보았다. 노집사는 올곧은 자세로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가 바로 세웠다.
“남작 영애께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남작 영애?”
듣도 보도 못한 이름에 테베트의 미간에 금이 갔다. 사티나는 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잊으셨습니까? 황후 폐하께서 혼담을 꺼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테베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명 모든 결혼 얘기는 잠시 미뤄 두겠다고 선언했던 것 같은데.
“내 명령을 듣지 못했나?”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도 사티나는 그저 잔잔한 표정이었다.
“가주님, 리페리우스의 결혼은 중요한 일입니다. 게다가 황후 폐하의 권유를 마음대로 미룰 수는 없지요.”
테베트는 헛숨을 내쉬었다. 결국 또 사티나가 제멋대로 군 것이었다. 그의 입술에 냉소가 머물렀다.
“그래서 지금 남작 영애가 내 약혼 상대라는 건가?”
“후보 중 한 명입니다. 천천히 만나 보시면서 좋은 상대를 고르셔야죠.”
“고른다, 라.”
그는 짧게 비웃으며 몸을 돌렸다.
“물건이라도 대하는 말투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 이상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에슬린이 기다릴 것이다.
“가주님, 남작 영애를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황후 폐하께도 폐가 되고요.”
일단 함께 식사해야겠다. 볼 때마다 말라 가는 것 같아 이상하게 초조했다.
혹시 어디 몸이 안 좋나? 그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다 곧 그 생각을 지웠다. 먹는 걸 보면 단순히 입이 짧은 것일 수도. 무엇보다 그 눈은 아픈 사람이라기엔 지나치게 반짝이고 생동감이 넘쳤다.
그래. 일단 배불리 먹이고, 함께 차를 마시는 게 좋겠어.
테베트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가주님! 부디 리페리우스로서 책임을 다해 주십시오.”
뚝. 그 말에 테베트의 걸음이 멈추었다. 잠시 뒤처졌던 사티나가 정갈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테베트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때가 오면 다시 부를 테니 일단 그 이야기는 미뤄 둬. 이 저택엔 그보다 중요한 것들이 더 많지 않나?”
“혹시…….”
테베트의 말이 채 끝맺기도 전에 사티나가 입을 열었다.
“마음에 두신 다른 영애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러자 얼음장 같던 얼굴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우스운 말이군.”
테베트의 얼굴을 꿰뚫듯 살피던 사티나가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무언가를 안타깝고 애달프게 여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가주님, 송구한 말씀이지만…… 리페리우스의 피에는 저주가 흐릅니다.”
“…….”
“소중한 사람일수록 끊어 내셔야지요. 끌어들이면 함께 저주를 맞이하자는 꼴밖에 더 됩니까?”
집사의 말은 나직하게 흘렀다.
테베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단 한마디. 사티나는 그의 여린 살을 헤집을 수 있는 한마디 말을 알고 있었다.
“가주님의 모친을…… 큰 마님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테베트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너 또한 진정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리페리우스를 증오하게 된 어머니는 저주 같은 말들만 남기고 떠났다. 사실은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그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어쨌든 화살을 맞은 건 그였다.
아직 여렸던 살에 팬 상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 가끔씩 건드리면, 그야말로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팠다.
“사티나.”
테베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노집사를 불렀다.
사티나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머릿속으로는 남작 영애를 어느 응접실로 데려올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들먹이는 것도 정도껏 해.”
“…….”
사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동자는 거친 바다 위 나룻배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가볍게 말아 쥔 주먹도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가끔은 자네가 아직도 나를 자네 품에서 울던 어린애로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주님.”
“내가 리페리우스의 주인이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집사는 부디 걱정하지 말길.”
테베트는 싸늘하게 일갈하곤 다시 몸을 돌렸다.
“물러가. 외출 중이었으니.”
오후 태양 빛으로 인해 사티나의 그림자가 복도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저벅, 저벅.
테베트는 그 그림자 위를 천천히 밟고 나아갔다. 소년의 등이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