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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91화 (91/147)

91화 [S공금]

“원래 이렇게 휴가가 잦나?”

테베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요?”

에슬린은 그의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향기로운 차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향만 맡아도 최고급 찻잎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처럼 이렇게 자주 궁 밖을 오가는 하녀는 없는 것 같아서 말이지.”

그 말에 에슬린이 풋 웃고야 말았다. 테베트의 시선이 에슬린의 휘어진 눈매에 잠시 머물렀다.

“아는 하녀라도 있나 봐요?”

“음.”

그는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쪼르르. 에슬린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유일하군.”

따사로운 겨울 햇살이 창가로 스며들어 왔다. 며칠간 매서운 추위가 이어지더니 오늘은 비교적 포근했다.

에슬린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제 옆에 놓인 꾸러미를 눈짓했다.

테베트가 건넨 성배와 관련한 자료 옆에, 작은 상자가 하나 더 놓여 있었다.

“오늘 나온 건 휴가가 아니라 다른 볼일이 있어서였어요.”

“볼일?”

“레실리아 님의 레이스를 좀 보고 왔거든요.”

테베트의 매끈한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내가 아무리 아는 하녀가 없다지만, 하녀가 그런 일까지 하는 건 처음 보는데.”

“뭐…….”

에슬린은 잠시 말을 골랐다. 잔을 내려놓고 그녀가 장난스레 콧잔등을 찡긋했다.

“제가 우수하다 보니.”

돌아온 건 싸늘한 침묵이었다.

하다못해 썩은 웃음이라도 지으라는 의미였는데, 이런 정적이라니.

“농담인데…….”

에슬린은 왠지 부끄러워져 머쓱하게 볼만 긁었다.

“사실 그냥 제가 심부름 담당이라 그래요. 뭘 그렇게 봐요?”

테베트는 그러고도 얼마가 더 지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이야.”

“네.”

그는 에슬린에게 고정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이목구비를 눈동자에 새겨 넣듯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

‘황녀와 관계가 있나?’

테베트는 그 말을 삼켰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들으면…….

이렇게 차를 마시고 있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대로도 괜찮지 않나?’

테베트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

요즘만큼 숨 쉬기 편했던 적은 없었다. 그 이유를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시간 덕분이다.

언제나 제 숨구멍을 막고 있는 리페리우스를, 그 저주를, 이 시간만큼은 조금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 뚜껑을 열 바엔, 그냥 이대로…….

“저 뭐요?”

에슬린이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테베트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아니야. 당신 우수한 거 맞는다고.”

“나 참…….”

그녀는 영문 모르겠다는 듯 눈을 흘겼다.

드르륵. 테베트가 몸을 일으켰다.

“음? 왜 와요?”

그는 테이블을 돌아 에슬린 옆자리에 가 앉았다.

푹신한 벨벳 천으로 둘러싼 의자는 원래부터 2인용인 것처럼 자리가 넓었다.

“가만히 있어 봐.”

가까이에 앉으니 가느다란 속눈썹이 더욱 잘 보였다.

사람 특유의 체향과 따스한 체온에서 이유 모를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는 진작 이렇게 앉을 걸 그랬다고 조금 후회했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감싸 쥐었다.

향기가 진해지고, 마주 보는 숨결이 뒤섞였다. 커다란 손이 작은 뒤통수를 헤집었다.

“대체 뭐 하는……!”

놀란 에슬린이 그를 밀어내려는데.

“라일락이군.”

그가 에슬린의 목깃 근처에서 작은 꽃 하나를 꺼내 들었다.

깜빡, 깜빡. 에슬린의 속눈썹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녀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그냥 말로 해 줘도 되지 않아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테베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응, 안 돼.”

뻔뻔한 건지, 능글맞은 건지.

에슬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몸을 뒤로 물려 그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테베트는 제 손에 놓인 여리고 작은 연보라색 꽃을 들여다보았다.

“요새 황궁에 봄꽃이 핀다더니, 사실이었나 보군.”

“네, 이상한 일이죠. 마법사들이 장난이라도 치나…….”

에슬린이 차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테베트는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손안의 라일락으로 향했다.

왜일까?

만개한 라일락에 파묻힌 에슬린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공작저에서 일할 때.”

그는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에슬린이 고개를 돌렸다.

“그땐 내가 당신을 어떻게 대했지?”

달그락. 에슬린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음…….”

시선을 살짝 위로 올린 채, 그녀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무엇을 떠올렸는지 단정한 얼굴에서 짧은 웃음이 흘렀다. 보는 이의 마음을 덜컹거리게 하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다정했어요.”

그는 홀린 듯 에슬린의 눈을 바라보았다.

“상냥하고.”

깨끗한 첫눈 같은 눈동자.

“조금 서툴렀지만.”

“…….”

“그래서 사랑스러웠어요.”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창문에서 햇살이 비쳐 들었다. 그건 이 추운 계절, 유일한 온기를 가진 것이었다.

그는 손발이 따끈하게 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당신은 늘 그랬어요.”

보석처럼 흐르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하나하나 소중히 주워 담고 마는 자신.

이 시간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봄이 오면…….”

테베트는 홀린 듯 중얼거렸다. 오늘도 투명한 푸른 눈동자에 갇힌 남자가 보였다.

“라일락을 선물할게.”

테베트는 굳이 헤어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신 머리카락을 닮은 선명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그는 제가 에슬린에게 라일락을 이미 선물한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기대할게요.”

그때는 이렇게 웃어 주지 않았지만.

제가 어떤 기분으로 그 꽃을 건넸는지.

그 간절했던 마음과 함께.

며칠이 흘렀다.

테베트는 자료를 그러모아 책상에 툭툭 두드렸다. 오늘 새벽 공작저에서 도착한 것들이었다.

문득 웃음이 흘렀다.

‘참 열심히도 모아 놨군.’

기묘함까지 느껴지는 집착이다.

과거의 저는 왜 이렇게 성배에 몰두했던 걸까?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이제 이 자료는 그저 수단에 불과한 종이 뭉치라는 것이다.

에슬린을 만나기 위한 수단.

“각하, 오늘도 황궁에 가십니까?”

노크를 하고 들어온 제롬이 물었다. 테베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지?”

“아, 별건 아니고…… 새벽에 도착한 자료 중에 누락된 게 있어서 말입니다.”

“누락된 것?”

“예. 편지 같은데, 전령이 빠뜨린 모양입니다.”

그가 아무런 무늬 없는 편지를 건넸다.

“그럼, 전 훈련 가 보겠습니다!”

제롬이 꾸벅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테베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그는 봉투를 열었다. 인장조차 찍혀 있지 않았다.

「그날 구해 줘서 고마워요. 당분간 황궁을 나가긴 어려우니, 시간 날 때 황녀궁으로 와요. 그때 못 보여 준 겨울 포도를 대접할게요.

에슬린 베르타니아」

유려한 글씨체로 쓴 편지를 그는 읽고 또 읽었다.

에슬린 베르타니아. 그 이름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렀다.

그는 죽은 황녀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처음엔 희미했던 그 얼굴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왜일까? 분명 아무런 접점 없는 여자였을 텐데.

편지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에슬린…….’

그 이름을 가진 하녀가 떠올랐다. 분명 다른 얼굴인 두 사람.

하지만 왜 자꾸 두 얼굴이 겹쳐 보이는 거지?

‘아니야.’

그는 다소 거친 동작으로 편지를 접었다. 그대로 휴지통에 넣으려다 잠시 멈칫했다. 결국 편지는 그의 서랍으로 들어갔다.

테베트는 다시 자료를 집어 들었다. 이것을 기다리고 있을 하녀의 얼굴만을 생각했다.

‘그럴 리 없다.’

제 손으로 죽인 황녀가 에슬린일 리 없어.

테베트는 이를 악물었다.

실마리는 제 손에 있었다. 그것을 당기면, 꼬여 있던 실타래는 풀릴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외면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맑은 공기가 온몸을 크게 휘돌고 빠져나갔다.

비로소 호흡하는 기분. 살아 있다는 실감이 그를 감쌌다.

어렵게 찾은 안식처였다. 그는 제 손으로 그 낙원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 * *

“전하, 말씀하신 대로 로즈벨의 뒤를 밟았습니다.”

수석 하녀가 속삭였다. 어두운 밤, 카르단의 침실에 선 그녀는 조금 두려운 얼굴이었다.

카르단이 몸을 기울였다. 요 며칠 제대로 잠들지 못한 듯 그의 얼굴이 까칠했다.

“그래. 어디로 가더냐?”

“그게, 그러니까……”

탕! 카르단이 참지 못하고 팔걸이를 내리쳤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수석 하녀가 놀라 무릎을 꿇었다.

“사, 사실 로즈벨이…… 밤마다 폐쇄된 황녀궁을 들락거리고 있었어요!”

카르단의 얼굴이 굳었다.

“뭐라고……?”

그는 미간을 바짝 구겼다. 불안한 눈동자가 갈팡질팡 흔들렸다.

“왜?”

카르단이 중얼거렸다.

왜 그 하녀가 에슬린 베르타니아의 궁을 들락거리는가?

거기에 무엇이 있기에?

“전하?”

하녀가 조심스레 카르단의 눈치를 살폈다. 대충 손짓해 내쫓았다.

혼자 남은 그는 침실 안을 배회하다 창문 앞에 섰다.

까맣게 그을린 자국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라일락 나무가 탄 자리였다.

“황녀궁을 드나든다고……?”

그가 중얼거렸다. 무언가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

하지만 누가? 누가 감히 저를 쫓는단 말인가?

이제 쫓아올 사람도 없는데.

카르단은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전하, 밤이 늦었는데 이만 주무시지요.”

쭈뼛쭈뼛 다가온 시종이 말했다.

카르단은 생각에 잠긴 채 잠자리에 들었다.

“허어억!”

카르단은 번쩍 눈을 떴다.

식은땀이 그의 얼굴을 흠뻑 적셨다.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빌어먹을!”

악몽에서 깨어난 얼굴이 창백했다. 그는 물을 마시려다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컵을 집어 던졌다.

“젠장!”

쨍그랑! 파열음에 밖에 있던 시종이 달려왔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냐고?

또 꿈에 그 계집이 나왔다.

에슬린 베르타니아.

꿈에서 에슬린은 죽여도 죽지 않는 몸으로 제 목을 졸랐다.

벌써 며칠째였다.

“라일락…….”

이 한겨울에 저 빌어먹을 라일락 향기가 날 때부터.

“황궁의 라일락 나무를 모두 태우라고 하지 않았느냐!”

카르단이 창밖을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시종이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태웠, 태웠습니다! 전하!”

“그런데 왜 자꾸……!”

카르단은 이를 으득 물었다.

“마법사는 어디에 있느냐!”

“연락을 넣어 두었으니 곧 오실 겁니다. 일단 진정하시고.”

시종이 뭐라 뭐라 말했으나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제기랄.”

불안했다. 이 불안이 무엇에서 비롯하고 있는지 그는 알았다.

“에슬린 베르타니아…….”

기어코 망령이 되어서까지 날 괴롭히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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