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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92화 (92/147)

92화

그의 눈빛이 두려움과 살기로 뒤엉켰다.

“저, 전하…….”

씩씩대는 카르단의 눈치를 살피던 시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커, 컨디션이 좋지 않으시면, 오늘 아침 예정된 훈련은 취, 취소할까요?”

시종은 더듬더듬 말을 끝맺었다.

“아니, 가겠다!”

카르단은 거칠게 소리쳤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사냥이었는데, 겨울엔 사냥을 나갈 수 없었다. 그 대신 가끔 황궁 기사단의 궁술 훈련에 참석하곤 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기분 전환이 필요해.’

카르단은 씩씩대며 걸음을 옮겼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머리가 몹시 멍했다.

‘몸이라도 움직여야지.’

그러면 이 찜찜한 기분도 떨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랫것들을 재촉해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조금 이르게 연무장에 도착했다. 아침이었으나 기사들이며 병사들이 벌써 모여 훈련 중이었다.

그는 활을 잡았다.

쉬익, 탁!

화살이 거침없이 과녁을 꿰뚫었다.

“이야, 역시나시군요.”

기사단장이 박수를 뻑뻑 쳤다.

근처에서 훈련하던 병사와 기사들도 감탄을 보냈다.

카르단은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걸 느꼈다.

다시 시위를 당겼고, 화살이 명중했다.

“어머나, 또 명중이네요.”

“……레실리아?”

카르단이 휙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황자비, 레실리아 베르타니아가 달콤한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이런 추운 날에도 밖에서 훈련하신다길래요. 따뜻한 식사를 좀 챙겨 왔어요.”

카르단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어요. 못 뵌 지도 꽤 되었고…….”

레실리아가 속삭였다. 카르단은 작게 혀를 차며 다시 화살을 집었다.

“고맙소, 부인. 하지만 보다시피 아직 훈련이 한창이오. 이건 노는 게 아니야.”

“그럼 구경하며 기다릴게요.”

레실리아가 방긋 웃었다.

갑자기 찾아온 황자비로 인해 연무장엔 높다란 의자와 간이 천막, 화로가 부랴부랴 준비됐다.

하녀가 레실리아의 어깨에 털로 된 겉옷을 걸쳤다.

“…….”

카르단은 말없이 레실리아의 하녀를 응시했다. 의미심장한 눈빛이 오고 갔다.

어젯밤 찾아온 수석 하녀였다. 이름이, 세피아였던가.

‘로즈벨이…… 밤마다 폐쇄된 황녀궁을 들락거리고 있었어요!’

카르단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쉬익, 탁!

“명중입니다!”

멀리서 병사가 깃발을 흔들었다.

“모리어스 후작이 요새 통 소식이 없던데.”

카르단은 화살촉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근처에 앉아 박수를 치던 레실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께서요? 왜 그러시지?”

“그것도 모르셨소? 부인은 대체.”

온종일 황자비궁에서 무얼 하시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카르단은 꾹 참았다.

어찌 됐건 귀족 세력의 중심인 모리어스 후작의 딸이다.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

“흥. 아무튼 시간이 남는 것 같으니 후작에게 연락 좀 해 보시오.”

“그럴게요.”

레실리아가 빙긋 웃었다.

쉬익, 탁!

“명중입니다!”

또다시 깃발이 흔들렸다.

레실리아가 까르르 웃더니 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와인을 따뜻하게 데워 왔는데, 좀 어떠세요?”

“훈련 중에 술이라니.”

카르단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에르단 황자께 모처럼 받은 와인인데요…….”

“뭐라고?”

그의 눈에 번뜩이는 이채가 스쳤다. 레실리아 앞에 번개처럼 다가갔다.

“에르단을 만났어?”

“네? 네. 며칠 전에 함께 식사를…… 전하, 아픕니다.”

레실리아가 고운 눈썹을 찡그렸다. 카르단은 꽉 쥐고 있던 레실리아의 팔을 놓았다.

“제가, 뭔갈 잘못했나요?”

겁먹은 얼굴로 레실리아가 조금 울먹였다.

카르단은 이를 꽉 깨물었다.

에르단이 레실리아를 찾아갔다고?

‘갑자기? 왜?’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 에르단의 돌발 행동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에르단 전하께서 그동안 빌려 가셨던 책 목록입니다.’

마법사의 말대로 에르단의 뒤를 캐니 그가 최근 도서관을 열심히 드나들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목록들이 하나같이…….

‘에르단 그놈이 성배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니.’

“화살! 화살을 이리 내!”

카르단은 거칠게 소리쳤다. 레실리아가 두려운 얼굴로 몸을 물렸다.

“젠장.”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그대로 과녁을 조준하는데.

“……!”

그 앞에 익숙한 꽃가지가 떨어져 있었다.

“라일락…….”

그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툭. 화살이 손에서 떨어졌다. 뒷목을 타고 불안감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뭐지? 대체 뭐야?

“황자 전하?”

“전하?”

레실리아와 기사단장이 차례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카르단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어이쿠, 저런 데 방해물이.”

기사단장은 눈치껏 과녁 앞에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근처 병사에게 눈짓하자 병사가 잽싸게 떨어진 라일락을 치웠다.

카르단의 라일락 혐오는 유명했다.

그것은 최근 며칠간 닥치는 대로 라일락 나무를 태우던 그의 행동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었다.

“전, 전하…… 화살을 떨어뜨리셨습니다.”

병사가 주춤주춤 다가와 그에게 화살을 건넸다. 카르단은 화살을 꾹 쥐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채 그는 과녁을 조준했다. 두 눈이 온통 벌겠다.

꽈아악.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화살촉 끝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온갖 생각으로 인해 머릿속은 이미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라일락. 황녀궁. 에르단. 도서관. 성배. 하녀. 하녀…….

황녀궁을 들락거리는 하녀…….

저 빌어먹을 라일락 빛을 닮은.

‘하여튼 넌 예전부터 욕심이 많았어.’

“하…….”

그 순간 카르단의 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그래, 어디서 많이 들은 말투라고 생각했지.

“하하…….”

툭. 카르단의 손에서 다시 화살이 떨어졌다. 기사단장과 기사들이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말도 안 돼.’

그는 약한 구역감을 느꼈다.

제 가설이 너무나 말이 안 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은 자꾸 한 방향으로만 폭주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일이?

아, 카르단이 짧게 신음했다.

‘디에리안 프레이.’

그 마법사라면, 어떻게든.

황자비궁에서 보았던 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였어. 그래서 디에리안 프레이가 거기 있었던 거야.

조각난 퍼즐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에르단 베르타니아가 뜬금없이 성배를 조사하던 이유도…….’

모두 에슬린을 위해서라면.

카르단은 조금 뒷걸음쳤다. 몸이 비틀거렸다.

“전하, 화살을 떨어뜨리셨어요.”

누군가 화살을 건넸다. 그는 머리를 짚은 채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그만……”

그러나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

“화살을 놓치시면 어떡해요.”

망령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망령이 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쏘셨어야죠.”

하녀가, 에슬린이, 죽은 황녀가 속삭였다.

“과녁이 아직 멀쩡하잖아요.”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이…… 이……!”

퍽! 그는 하녀를 밀쳤다.

꺄아악! 비명이 터졌다. 다른 하녀들과 레실리아로부터였다.

“전하!”

기사단장이 기함하며 다가왔다.

“사람에게 활을 겨누시다니……!”

“닥쳐! 닥쳐!”

꽈아악. 시위를 당긴 카르단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화살 끝은 에슬린에게로 향해 있었다.

짙푸른 눈동자는 아무런 동요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그래…… 저 눈을 왜 지금껏 몰라봤을까?

카르단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레실리아가 놀라 소리쳤다.

“전하!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제 하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제가!”

“너였어. 너였다고!”

카르단은 악귀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악몽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1황자 전하!”

병사들이고 기사들이고 할 것 없이 폭주하는 황자로 인해 모두가 혼비백산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는 조금만 힘을 빼도 그대로 하녀를 향해 돌진할 것이었다.

카르단은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호흡조차 잘되지 않았다. 바닥이 무너진다고 느껴지는 순간.

‘오랜만이야, 카르단.’

하녀가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에슬린! 에슬리인!”

탕. 결국 화살이 활시위를 떠났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난무했다. 피가 바닥에 점점이 흩뿌려졌다.

“허억, 허억…….”

죽인 건가? 이번에야말로?

카르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좁아져 있던 시야가 비로소 돌아왔다.

“전하, 제발. 제발 진정하십시오. 왜 이러시는 겁니까?”

기사단장이 간절하게 속삭였다. 제 양팔을 거세게 붙든 채였다.

그제야 카르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악에 물든 얼굴로 저를 보는 기사들과 병사들, 레실리아, 시종과 하인들…….

“전하…….”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의 하녀까지.

“제 이름은 에슬린이 맞지만…… 그건 돌, 돌아가신 황녀님의 이름입니다.”

하녀가 덜덜 떠는 입술로 말했다.

“전 감히 그 이름을 쓸 수 없어 로즈벨이라고 불리는데…….”

하녀는 결국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화살을 떨어뜨리셔서 주워 드린 것뿐인데 뭘…… 제가 뭘…….”

하녀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창백한 볼은 화살촉이 스쳐 빨간 금이 가 있었다.

“황자 전하,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기사단장이 차분하게 말했다.

카르단은 멍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이게 뭐지?

그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제 화살과 활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놀란 누군가가 떨어뜨린 라일락 꽃가지.

“…….”

다시 울고 있는 하녀.

그 주변에 선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들.

“이만 돌아가셔요, 전하.”

레실리아가 다가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의 손에서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내가 뭘 한 거지?’

레실리아에게 이끌려 연무장을 떠나며 카르단은 생각했다.

뭔가……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이름을 듣는 건 오랜만이네…….”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카르단은 발작처럼 몸을 돌렸다. 하인이며 하녀들이 줄줄이 따르고 있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가늘게 입술을 떨었다.

에슬린.

그 이름은 베르타니아 제국에서 흔하디흔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 황궁에서 가리키는 건 오직 한 명.

그러니 그 흔한 이름을 가진 자조차 이곳에서는 제 이름을 숨기며 살아야 했다.

‘에슬린! 에슬리인!’

황자는 왜 그랬을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덕에 모두가 죽은 황녀의 이름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어디선가 라일락 향기가 났다.

그곳에 모여 있던 하녀와 하인과 시녀와 시종과 병사와 기사들 모두 그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 보니 매해 봄마다 황녀궁엔 라일락이 피었지.

그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속삭였다.

단순한 해프닝일 거라고 생각했던 그 일이, 사실은 더 큰 이변의 예고인 걸까?

어떤 이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어떤 이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모두에게 씨앗은 뿌려졌다.

“…….”

그리고 그 광경을 테베트 리페리우스 공작이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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