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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93화 (93/147)

93화

사람들이 모두 빠진 텅 빈 연무장.

에슬린은 그곳에 홀로 남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고자 팔을 짚었다. 어쩐지 힘이 쭉 빠져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하아.”

그녀는 긴 숨을 내뱉었다. 귀신 같은 얼굴로 제 이름을 고함치던 카르단이 자꾸만 생각났다.

기운은 없는데 왠지 웃음이 났다.

카르단의 궁까지 지하 통로를 파자던 에르단의 말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카르단이 지금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이건 시작이야, 카르단.’

에슬린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까만 재에서 다시 태어나는 새처럼 부활은 화려할 것이다.

‘일단 돌아가야지…….’

다시 팔에 힘을 주었다. 마음만큼 몸이 잘 움직이진 않았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흙바닥을 짚은 손이 조금 떨렸다.

그때 손가락 근처로 까만 그림자가 졌다.

“……?”

에슬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긴…… 언제부터?”

테베트는 말없이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에슬린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이 당황스러웠다.

어디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무언가를 눈치챘을까?

이번엔 다른 의미로 손이 떨렸다.

“황궁에 있는 줄은 몰랐어요.”

에슬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테베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가만히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쓸었다.

“피가 나는군.”

그의 손에 연한 피가 묻어났다. 하지만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에슬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치료를 먼저 받는 게 좋겠어.”

테베트가 부드럽게 그녀를 이끌었다. 그러나 에슬린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슥, 그의 고개가 에슬린을 향해 돌아갔다.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요.”

에슬린은 각오를 마친 얼굴이었다. 어떤 질문이 나오든 그녀는 숨김없이 답해 줄 생각이었다.

테베트는 물끄러미 그런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눈은 어둠에 푹 잠겨 있었다.

“없어.”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에게 물어볼 건 더 이상 없어.”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잠시 할 말을 잃은 에슬린이 겨우 입술을 뗐다.

“기억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에요?”

한동안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전에 내가 물었지.”

단단한 굳은살 박인 엄지가 그녀의 볼을 쓸었다. 유리 세공품이라도 대하듯 몹시 부드럽고 섬세한 손길이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 내가 당신을 좋아했냐고.”

‘나는 당신을 좋아했나?’

‘그건 나한테 묻기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과거를 떠올리며 테베트가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서 생각해 봤어.”

“결론은?”

“모르겠더군.”

반듯한 입꼬리가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모르겠다고 당당히 말한 사람치고는 그 눈빛이 이상하리만치 다정했다.

“과거의 감정은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은 알아.”

에슬린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당신이 소중해. 이런 게 좋아한다는 감각이라면.”

“…….”

“난 지금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기의 흐름도, 호흡도, 간간이 들려오던 작은 소음들까지.

모든 게 사라진 공간 속에서 오직 단둘이 마주 보고 선 느낌이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에슬린은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손톱의 감각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테베트 경, 난……”

“그러니까 기억은 이제 됐어.”

“네?”

에슬린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과거는 됐어. 지금 나한텐 지금의 당신만 있으면 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당신도 과거는 잊어.”

에슬린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기억을 찾지 않고, 당신도 성배를 찾지 않고.”

테베트가 더욱 가까이 몸을 붙였다. 볼에 닿은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당신과 나 사이를 방해하는 것들은 이제 다 필요 없다는 소리야.”

그제야 잔잔한 붉은색 눈동자에 숨겨져 있던 묘한 광기가 드러났다.

에슬린은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려 했으나 한쪽 어깨마저 붙잡히는 탓에 그럴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물론 당신을 영원히 하녀로 두진 않을 거야. 지금부터 어떻게든 후계자를 찾고, 황실과 협상해 가주 자리에서 물러나면 당신을……”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에슬린이 그의 말을 잘랐다. 테베트의 매끈한 턱이 모로 기울었다. 그는 입을 다물었지만, 에슬린의 말을 딱히 들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도대체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거죠?”

에슬린이 고요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에슬린을 그저 응시했다.

“기억을 찾고 싶어 했잖아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그딴 건 기억이 아니야.”

그가 짓씹듯 중얼거렸다.

“그건 추접한 쓰레기일 뿐이야.”

지금 이 순간조차, 저를 바라보는 에슬린의 얼굴에 황녀의 얼굴이 자꾸만 겹쳤다.

그는 고개를 털고 이를 악물었다.

에슬린이 황녀일 리 없다.

만약 황녀라면, 저를 죽인 남자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리가 없다.

만약 황녀라면,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조차 제 손으로 죽여 버린, 그야말로 저주받은 인간인 셈이다.

그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냥 이 달콤한 꿈에 영원히 녹아 있고 싶었다.

“테베트 경.”

그때 제 품을 파고드는 따스한 온기가 있었다.

양손이 툭 떨어지고, 바짝 긴장해 있던 몸에 힘이 풀렸다.

그녀의 팔이 목을 휘감아 왔다. 테베트는 자기도 모르게 상체를 조금 낮췄다. 귓가에 입술이 닿았다.

“당신이 날 살린 거예요.”

에슬린이 속삭였다. 따스한 숨결이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 왔다.

“당신이 날 살렸어요.”

그녀는 재차 힘주어 말했다. 테베트는 제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저를 끌어안고 있는 에슬린의 온기와 그녀의 손길만이 선명했다.

“과거의 당신을 믿어 봐요. 그게 어려우면 날 믿어요.”

에슬린은 속삭이던 얼굴을 조금 떼어 냈다. 가까운 곳에서 시선이 맞부딪쳤다.

흔들림 없는 올곧은 눈빛이 그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나는 예정대로 성배를 찾을 거예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려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당신 도움이 없더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에슬린은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산뜻하다 못해 어쩐지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한 웃음이었다.

“기억을 찾을 각오가 서면, 이걸 마셔요.”

에슬린이 품 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유리병에 오묘한 푸른색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에슬린이 말했던 기억의 물약임을 깨달았다.

“기다릴게요.”

꿈결처럼 속삭인 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테베트는 그저 우두커니 선 채로 그 반듯한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따뜻했던 온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시린 바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제 손에 쥔 푸른 약병을 내려다보았다.

검붉은 눈동자가 기이한 빛으로 일렁였다.

집착, 소유욕, 갈망, 혼란, 욕망…… 그 모든 비틀린 감정들이 눈동자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꾸욱. 에슬린 대신 남은 그 약병을 쥐고 그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연무장을 벗어나고도 한참 더, 에슬린은 혼신의 힘을 다해 걷는 것에 집중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지 않도록.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이 동요를 들키지 않도록.

물러서는 모습도, 약한 모습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테베트는 흔들리고 있었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단단히 지탱해 줘야 했다.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저 앞에 모퉁이가 보였다.

아무래도 그는 뒤따라오진 않은 듯싶었다. 에슬린은 조금 걸음을 빨리했다.

이 모퉁이만 돌면 연무장하고는 완전히 멀어질 것이다.

“아.”

모퉁이를 돌자마자 몸이 무너졌다. 담벼락을 짚은 손이 그대로 미끄러졌다.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려는 순간, 그녀를 누군가 붙들었다.

“전하.”

“……디엘.”

“괜찮으십니까?”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을 한 그가 에슬린을 부축했다.

“기대시는 게 좋겠습니다.”

“갑자기 긴장이 풀렸나 봐.”

에슬린은 괜찮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디에리안이 짧게 혀를 찼다.

“안색이 창백하십니다. 그 남자에게 물약을 건네지 못하신 겁니까?”

“아니, 건넸어.”

에슬린이 웃으며 말했다.

“마실지는 모르겠지만.”

하아, 긴 한숨이 마법사로부터 터져 나왔다.

“그냥 제가 침실에 잠입해 그 인간 입에 처넣어 주고 오겠습니다.”

에슬린은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진심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디에리안은 에슬린이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입을 다물었다.

“너야말로 안색이 나빠. 밤새 마법약 만드느라 마력 소모가 컸을 텐데.”

“흥. 이 정도쯤이야.”

디에리안은 가볍게 코웃음 쳤다.

에슬린은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혼자 걸을 수 있다는 듯, 부축하는 디에리안의 손길을 떼어 냈다.

피로한 얼굴이 바닥 언저리를 헤맸다.

“아무튼 다행이야. 계획대로 잘 이루어져서.”

에슬린이 웃었다. 디에리안이 물끄러미 그녀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웃는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워 보였다.

“전하…….”

“응?”

그는 분한 듯 손끝을 거세게 말아 쥐었다.

알고 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자신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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