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렇다고 연무장에 동상처럼 서 있는 남자에게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에르단 전하께 가시겠습니까?”
디에리안의 말에 에슬린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아직 밤이 되려면 멀었는데.”
태양은 이제 막 높은 곳에 올라갔을 뿐이었다. 디에리안은 차갑게 입술을 말아 올렸다.
“제가 그렇게 하찮아 보이십니까? 아무도 모르게 모셔 오죠. 황녀궁에 결계를 잘 쳐 뒀으니 거기서 기다리십시오.”
에슬린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에르단에게도 오늘 있었던 일을 전해 줘야 했다.
에슬린을 황녀궁까지 데려다준 뒤, 디에리안은 잽싸게 모습을 감췄다.
에슬린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에슬린!”
얼마 지나지 않아 벌컥 문이 열렸다. 에르단은 조금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달음에 그녀에게 다가왔다.
“에르단.”
그녀는 제 쌍둥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디에리안이 너에게 가 보라고 해서.”
그가 에슬린 옆에 앉았다. 그녀는 에르단을 바라보며 연무장에서 있었던 일을 되새겼다.
“카르단이 내 정체를 알았어.”
“들었어.”
“테베트 경도…… 아마 어렴풋이 내 정체를 눈치챈 것 같아.”
“그것도 들었어.”
에슬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모든 계획은 차근차근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오늘은 그 첫 발판이었을 뿐.
그런데 이 기분은 무엇일까?
“에슬린.”
에르단이 긴 한숨과 함께 에슬린의 어깨를 토닥였다.
에슬린은 가만히 어깨에 내려앉는 진동을 느꼈다.
“…….”
‘에르단, 이게 맞는 걸까?’
그녀는 속으로 물었다. 연무장에 있던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냥 죽은 사람으로 살았어야 하는 거 아닐까?’
카르단과 흑마법사의 얼굴은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나 때문에 너나 측근들이 또 위험해지면 어떡하지.’
그러다 테베트 경까지 상처 입히게 되면? 결국 그가 리페리우스를 선택하고, 날 영영 잊으면?
그러나 에슬린은 그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다.
제가 벌인 일이다. 그러니 모든 의문 또한 제가 끌어안아야 하는 게 맞았다.
“에슬린, 괜찮아.”
에르단이 불쑥 말했다. 에슬린은 그와 시선을 맞췄다.
“갑자기 뭐가?”
“그냥.”
에르단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냥 다 괜찮아.”
그래서 그 말은 에슬린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는 그녀의 거울이나 다름없었다.
어쩐지 저 자신이 스스로에게 해 주지 못한 말을 에르단이 대신 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빳빳하게 긴장해 있던 몸이 서서히 유연해졌다. 쿵쾅대던 심장도 어느새 제 박동을 찾아 갔다.
‘그래…… 괜찮아야 해.’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칼을 빼어 들었으니 누군가의 목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약해져선 안 된다.
의심해서도 안 돼.
에슬린은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에르단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에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 * *
“카르단이 네 정체를 떠벌리진 않을까?”
땅콩을 우물거리며 에르단이 물었다. 에슬린은 가볍게 코로 웃어넘겼다.
“아무리 카르단이 멍청해도 그럴 리는 없어.”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벽난로 근처에 웅크리고 앉은 디에리안이 호두나 땅콩 같은 것을 판에 올려 굽고 있었다. 어디서 구해 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전하께서 돌아오셨다는 걸 알려 봤자 그 머저리에겐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아직 황태자도 되지 못했는데 경쟁자만 늘어난 셈이니까요.”
디에리안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휙 몸을 돌린 그가 다다다 달려와 그릇 위에 잘 구운 견과류를 쏟아부었다.
“그 전에 미친 사람 취급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겠고요.”
마법사의 입꼬리가 있는 대로 비틀렸다. 에슬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느새 완벽하게 회복한 얼굴이었다.
“맞아. 그러니 당분간은 지켜보겠지.”
“그럼 이제 어떡하려고?”
에르단이 구운 호두를 입에 넣으며 물었다. 에슬린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 디에리안에게 시선을 옮겼다.
“흑마법사는, 디엘?”
마법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황궁에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혹시 몰라 내일부턴 황궁 밖을 좀 둘러볼 생각입니다.”
“그래. 그게 좋겠어.”
타툴란의 등장이 생각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아니면 제가 놓치고 있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 나간 김에 젝스 경도 좀 찾아봐.”
“그러죠.”
디에리안은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앉아 입술을 삐죽였다. 대체 젝스 경은 어디서 뭘 하는 거냐고 투덜대면서도 그다지 걱정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에슬린은 사라진 제 호위 기사를 떠올리다 에르단에게 말했다.
“에르단, 호위 좀 붙여 줘. 카르단이 날 죽이려 할지도 모르니까.”
“응.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너도 조심하고. 네 궁에 기사들을 늘리는 게 좋겠어.”
에르단이 허공에 주먹을 내질렀다.
“아, 성가셔! 귀찮아! 다시 세비스 자작가로 놀러 갈래. 온천 여행을 나 자신한테 선물했어야 했어!”
철딱서니 없이 구는 황자를 디에리안이 조금 흘겨보았다.
잠시 몸부림치던 에르단이 불현듯 동작을 멈추었다. 디에리안의 눈빛 때문은 아니었다.
“근데 리페리우스 공작은 어쩔 셈이야?”
에슬린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에슬린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기다릴 거야.”
“기다린다고?”
“그래. 그가 과거와 마주할 결심이 설 때까지.”
에슬린은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손등으로 가볍게 턱을 짚었다.
생각해 보면, 이건 더 이상 제가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물약은 테베트의 손에 있었다.
그것을 마실지 안 마실지는 이제 그에게 달린 문제였다. 공은 테베트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에슬린에게 남은 건, 그를 믿고 기다리는 일뿐.
“현재의 테베트 경을 존중할래. 기억 찾는 걸 망설이고 있다면, 결심이 설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러다 영영 기억을 찾지 않겠다고 하면?”
에슬린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떨어졌다.
톡, 톡.
턱을 짚은 손가락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움직였다. 그녀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마우시스 신의 대가는 ‘인연’이었어. ‘기억’이 아니라.”
에르단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무슨 뜻이야?”
“나는 지금까지 기억을 잃음으로써 우리 인연이 끊어지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차분한 목소리가 천천히 실내를 메웠다.
“근데 이상한 일이지. 우리는 자꾸만 얽히고 엉켜. 분명 잘린 인연일 텐데 말이야.”
에슬린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질긴 가죽끈이 손에 잡혔고, 그것을 쭉 잡아 뺐다.
실내 불빛에 반사되어 붉은빛이 번쩍였다.
완전한 빛을 되찾은 펠리서스 마법석이었다.
에슬린은 에르단과 디에리안을 차례로 응시했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을 해.”
인연이 묶인 실과 같다면, 우리의 과거 인연은 신이 끊어 버린 게 맞았다.
“인연의 끈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하지만 이토록 얽히고설키는 걸 보면, 이미 우린 다른 실로 새롭게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잘려 버린 인연 대신, 새로운 인연이 생긴 걸지도 몰라.”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마우시스가 예상하지 못한 진정한 변수일지도 모른다. 혹은 알고도 눈감아 주는 신의 자비일지도 모르고.
“그러니 괜찮아. 기억이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에슬린은 펠리서스를 다시 집어넣었다. 이 마법석의 쓸모는 이제 다른 데에 있었다.
그런 에슬린을 빤히 지켜보던 에르단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진심이야? 과거 기억도 없이 리페리우스인 공작이 널 선택할 리 없어.”
“아니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죠. 예전처럼 말입니다.”
빈정거리는 어투로 디에리안이 에르단의 말을 이어받았다.
에슬린은 빙긋 웃었다.
“상관없어. 언제가 됐든 결국 테베트 경은 날 선택할 거고, 나는 예전처럼 패배하지도, 죽지도 않을 거니까.”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딱히 비장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별달리 긴장한 모습도 아니었다.
“그게 내가 하녀로 빙의한…… 다시 살아난 이유 아니겠어?”
산뜻한 웃음이 번졌다.
그녀는 믿고 있었다. 저 자신을. 그리고 저를 구한 테베트 리페리우스의 마음을.
수일이 지났다.
디에리안은 흑마법사를 추적하기 위해 황궁을 나섰다.
수도 근처를 수색한 뒤, 마법 전서구(를 가장한 마법 돼지)를 보내겠다고 했으나, 며칠째 깜깜무소식이었다.
에슬린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이런 식으로 훌쩍 떠났다가 연락을 두절하는 일이 과거에도 여러 번이었거니와, 대마법사를 걱정하는 건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카르단은 다시 칩거했다. 세피아조차 불러내지 않았기에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쉽게 알기 어려웠다.
에슬린은 그동안 황자비궁 안에서만 생활했다. 황녀궁에서 에르단을 만나는 것도 최대한 자제했다.
의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잔잔한 일상이 이어졌다.
하지만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상이었다.
폭풍 전야.
에슬린은 최근 그 단어를 떠올리는 일이 많아졌다.
“로즈벨, 좀 괜찮니?”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으며 레실리아가 물었다. 에슬린은 빈 찻잔에 주전자를 기울이며 빙긋 웃었다.
“네, 걱정시켜 드려 죄송해요.”
연무장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레실리아의 차 시중을 드는 건 처음이었다.
레실리아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하긴. 그날은 나도 놀랐는데 너라고 오죽했겠니.”
그녀의 고운 손이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황자 전하께서…… 그날은 좀 예민하셨던 모양이야. 며칠째 잠을 못 주무셨다고 하녀들이 그러더구나.”
“들었어요.”
“그러니 너무 원망하지는 말렴.”
네가 참아. 레실리아가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웃었다. 왠지 모르게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에슬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혹시 휴가가 필요하진 않니? 좀 쉬어야 하면 말하렴. 하녀장에겐 내가 메리사를 통해 말해 둘 테니까.”
염려 어린 목소리였다.
며칠 전 일이 그녀에겐 꽤 충격이었던 듯, 에슬린에게도 비슷한 후유증이 남았으리라 짐작하는 것 같았다.
에슬린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러면…… 궁 밖에 다녀와도 될까요?”
“궁 밖?”
“바람이라도 쐬면 마음이 좀 안정될 것 같아서요.”
레실리아는 흔쾌히 허락을 내렸다. 얼마든지 쉬다 오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하루면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 * *
에슬린은 멍하니 낡은 주점 입구를 바라보았다.
“뭐야, 이거?”
허탈한 숨이 흘렀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그녀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달그림자 길드가 사라졌다.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 그야말로 증발이라는 말이 딱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에슬린은 창문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지?”
그녀는 문 앞을 서성이며 잠시 고민했다. 행인들은 낡은 주점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물어볼 사람도 없겠네.’
그녀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의미 없이 던진 시선에 지나가던 행인과 문득 눈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그건 정말 우연이었다.
“어?”
눈이 마주친 상대의 얼굴이 천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에슬린의 눈동자 또한 놀라움으로 부풀었다.
“하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