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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95화 (95/147)

95화

훤칠한 키를 가진 기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는 쭉 빠진 턱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 있다가, 단숨에 그녀 앞으로 달려왔다.

“로즈벨 하녀님!”

“……아서스 경?”

그녀가 놀란 눈을 깜빡였다. 이런 곳에서 아서스 녹턴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이런 곳에서 만나 뵙게 될 줄이야.”

아서스의 눈이 촉촉해졌다.

짧은 붉은 머리가 그새 조금 길어 이마를 덮고 있었다. 에슬린은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아서스 경! 무사했군요. 다행이에요!”

“하녀님이야말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아서스가 주먹으로 눈가를 훔쳤다. 에슬린은 진심을 담아 그에게 인사했다.

“그땐 구해 줘서 고마웠어요.”

아서스가 아니었다면 그날 황궁을 무사히 빠져나오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땐 어딘지 모르게 상태가 불안정해 보였지만, 지금은 딱히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저야말로 이렇게 무사히 계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응, 아서스가 코를 들이마셨다.

“누명을 벗고 황궁으로 돌아가셨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정말 많이 걱정했습니다…….”

감정이 복받치는지 하늘을 향해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손부채질까지 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울음 참는 모습이다.

“진정해요, 아서스 경.”

“저 우는 거 아닙니다. 그런 남자 아닙니다. 이건 그냥 하늘이 좀 예뻐서. 구경하는 겁니다…….”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주절거렸다.

잠시 뒤, 어느 정도 진정한 그가 고개를 내렸다. 조금 충혈된 눈이 흘끔흘끔 그녀를 살폈다.

“그보다 왜 이런 데 있어요?”

그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근신 처분을 받는 바람에, 쉬는 동안 용병 기사로 잠깐 일하고 있었습니다.”

“근신이요? 설마 저 때문에……”

“아뇨! 아닙니다. 하녀님 때문이 아니에요. 근신도 이제 끝이고요!”

그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저도 그냥 정신 차려 보니 근신 상태여서…….”

그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슬린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아서스 경, 황궁엔 언제 복귀해요?”

“네? 조만간입니다만…….”

“그럼.”

그녀가 씩 웃음 지었다.

아서스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어우, 눈부셔. 그는 가늘게 눈을 떴다.

“제 호위가 되는 건 어때요? 며칠 동안만이라도.”

“예에?”

그의 눈이 다시 커다래졌다.

“하, 하녀님의 호위, 말씀이십니까?”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좀…… 목숨을 위협받고 있거든요. 보수는 확실히……”

“감히 누가!”

그가 성큼 가까워졌다. 청록색 눈동자에 의문은 지워지고 강한 의지만이 남았다. 번쩍, 기사는 망설임 없이 팔을 치켜들었다.

“하겠습니다! 할게요! 무조건 할 겁니다!”

에슬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당분간 부탁할게요.”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하녀님을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반드시!”

화르륵. 어디선가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아서스는 두 주먹 불끈 쥐고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에 가닿았다.

“그런데…… 호위면 계속…… 계속…… 하녀님 곁에 있는 겁니까?”

“뭐, 그게 호위의 기본 아닐까요?”

화르륵. 또다시 무언가가 불타올랐다.

이번엔 그의 얼굴빛이었다.

“아서스 경, 괜찮아요?”

보다 못한 에슬린이 물었다. 아서스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멀어지고 있었다.

“이, 런 영광이…… 살아 있길 잘했어…….”

그가 뭐라고 말했으나 더 멀어지는 바람에 들리지 않았다. 에슬린이 웃음을 머금었다.

“다 좋은데, 저 지금부터 중심지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거기 계속 있을 건 아니죠?”

“물론입니다!”

그가 쌩 달려왔다. 눈을 빛내며 옆을 지키는 모습이 커다란 개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람에게 실례인가.’

개라니. 에슬린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어쨌든 당분간 호위 문제는 해결이었다.

* * *

달이 뜬 밤이었다.

테베트는 홀로 침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빈 병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으나, 그의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지기만 했다.

“…….”

그는 푸른 약병을 만지작거렸다.

에슬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이제 더는 피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다. 이건 제 오기이자 잘못된 집착이었다.

근데…… 그게 나쁜 걸까?

성배를 찾겠다는 건 폭풍우의 중심에 서겠다는 말이었다.

그 폭풍우에서 그녀를 다시 빼앗아 오고 싶었다. 안전하게 제 곁에서 지키며, 저만을 갈망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그녀는 화를 낼까?

그 꿈을 강제로 단념시켜서라도 제 옆에 둘 수만 있다면…….

그의 눈이 기이한 빛으로 일렁였다.

바람이 덜컹 창을 흔들었다.

그 순간 붉은 눈동자에 살기가 스쳤다. 그는 검을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발코니 문이 활짝 열렸다.

“하! 청승은.”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환한 달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테베트는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며 초점을 맞췄다.

“너는…….”

저벅, 저벅. 마법사가 비웃음을 머금은 채 그에게 다가왔다.

“마실 걸 착각한 거 아닙니까?”

그는 있는 힘껏 비아냥댔다. 그러곤 테이블 위 반쯤 남은 술병을 낚아챘다. 조금 떨어진 침대에 가 털썩 주저앉았다.

테베트의 눈동자가 디에리안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했다.

“그렇게 계속 도망치면 좋아요?”

디에리안이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악. 뭐야, 이거 써. 그의 인상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감히 내 저택에 숨어들다니. 배짱이 좋군.”

테베트는 입술을 말아 올렸다.

디에리안 프레이. 몇 번 정도 마주친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다.

황녀의 측근 마법사.

꽈악. 검을 쥔 그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배짱 좋은 게 누군데……. 내 마법약을 쥐고도 고민할 여유가 있다니 말입니다.”

그가 잔뜩 빈정거리며 턱 끝을 까딱였다. 시선은 테이블 위에 놓인 푸른 약병에 가 있었다.

“전하께서는 기다리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마법사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말이죠.”

디에리안은 그저 그가 우스웠다.

실마리도, 에슬린의 마음도 모두 그 손에 쥐고 있으면서 도대체 무엇을 겁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지?”

디에리안이 휙 술병을 내던졌다.

두터운 카펫 위에 엎어진 술병에서 콸콸콸 독주가 흘러나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신이 나를 찾아와 전하를 살려야겠다고 한 걸 잊은 겁니까?”

“뭐?”

“금기된 그 마법을 당신과 내가 찾고, 만들고, 완성했는데! 그 피눈물 나는 과정마저 다 잊은 거예요?”

쾅! 그의 마른 손가락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테베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지금 무슨…….”

“무슨 말이냐고요? 빨리 그 뚜껑 따서 후루룩 마셔 버리라는 소립니다. 그러고 속죄를 하든, 충성을 맹세하든 뭐라도 하라고요!”

디에리안이 참지 못하고 빠르게 지껄였다. 그는 싸늘한 미소를 걸친 채 테베트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또 다 늦어서 후회하지 말고.”

그건 강렬한 감각이었다.

독배를 쥐고 있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황녀를 죽일 마음으로 그 자리에 갔다.

하지만 왜, 그다음 자신은 울고 있었던 걸까?

고통에 찬 절규를 삼킨 건 누구였지?

그 앞에 피에 젖은 충성을 맹세한 건?

거대한 기억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

홀린 듯 그는 다시 푸른 약병을 쥐었다. 디에리안은 더 바라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 그림자처럼 남은 테베트는 약병의 뚜껑을 뽑았다.

발코니로 멀어지던 디에리안의 몸이 우뚝 멈춘 건 그 순간이었다.

“뭐야.”

그가 중얼거렸다. 테베트는 반사적으로 디에리안을 바라보았다.

“이 느낌…….”

덜덜, 마법사의 양손이 떨렸다. 불안한 예감이 발끝을 타고 전신을 덮쳤다.

마법사가 동요하는 건 오직 한 가지 이유뿐이다.

그걸 아는 테베트가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지?”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디에리안이 홱 몸을 돌렸다. 경악으로 물든 얼굴이 테베트를 향했다.

“마법이…… 내 보호 마법이 사라졌어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테베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전부터 말하지만 좀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

“전하께 건 내 보호 마법이 사라졌단 말입니다!”

디에리안이 빽 소리를 질렀다. 테베트의 모든 사고와 동작이 한순간에 정지했다.

“사라졌다고……. 발동한 게 아니라…… 사라졌다고.”

횡설수설하는 마법사의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가 중얼거렸다. 온몸에서 피가 모조리 빠져나간다면 이런 기분일까. 심장이 뚝 떨어졌다. 손끝이 딱딱하게 굳었다.

“각하!”

디에리안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가 달려 나간 건 본능에 가까웠다.

또 자신은 늦어 버린 걸까?

제가 망설이는 바람에, 또다시…….

“아니야.”

뱃속이 뜨거웠다. 누군가 칼로 휘젓고 있는 듯했다. 그건 너무 아찔한 감각이라 눈앞마저 가물거렸다.

“각하? 무슨 일이십니까? 이 밤중에 말은 왜……?”

갑자기 등장한 테베트에 제롬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고삐를 틀어잡고 부관을 향해 명령했다.

“지금 당장, 병사를 풀고 기사들을 움직여.”

“예?”

“사람을 찾아야 한다. 서둘러.”

“대체 누구를……?”

“연보라색 머리카락의 하녀.”

제롬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듯한 설명.

“에슬린을 찾아.”

히이잉! 말이 어둠을 몰아내듯 크게 울었다. 박차고 달려 나간 속도는 섬광과도 같았다.

밀도 높은 어둠이 그를 삼켰다.

커다란 달은 어느새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제발…… 에시.”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럼에도 떨리는 손은 나아지지 않았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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