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땅을 박차는 말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테베트는 고삐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어둠에 잠긴 풍경이 엄청난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볼을 때리는 공기가 매섭도록 차가웠다. 하지만 속에서는 천불이 들끓었다.
에슬린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수색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뒤집어야 하지?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는 으득 이를 물었다.
‘너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어.’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아니야. 그는 반박했다.
에슬린에게 독배를 건네던 그 최후의 순간, 그는 에슬린에게 제 모든 것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다신 헤매지 않기로 다짐했다.
가문의 족쇄를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 이 결과는 무엇인가?
기억이란 알량한 핑계에 불과했다.
결국 테베트는 다시 피에 지배되고, 가문에 흔들렸으며, 그로 인해 에슬린을 놓쳤다. 그게 테베트에게 남은 사실이었다.
‘역시 넌 리페리우스에서 달아날 수 없어.’
“아니야!”
테베트는 거칠게 소리쳤다.
기수의 불안을 읽은 말이 갈팡질팡 흔들렸다. 꽈악. 고삐를 말아 쥐었다.
농락하듯, 심장이 미친 듯이 움직이며 피를 퍼 올렸다. 저주스러운 리페리우스의 피를.
‘아무것도 선택하지 말거라. 그게 리페리우스다. 이 슐든 대륙에 발붙이고 살고 싶다면, 그 어떤 것에도 휩쓸리지 마.’
부친은 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는 역대 가주 중 가장 ‘리페리우스다운’ 인물로 칭송받던 이였다.
그 누구보다 가문을 위해 헌신하던 남자. 그건 다시 말해, 제 피에 흐르는 저주를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편찮으십니다.’
‘안다. 꾀병일 테지.’
‘맞습니다. 꾀병이실 겁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아시면서 왜 가만히 계시는 겁니까?’
‘뭐?’
‘아버지의 관심을 끌기 위해 꾀병 부리는 걸 아시면서, 왜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으시냐는 겁니다.’
‘테베트, 어리구나.’
‘…….’
‘그건 널 낳았다. 그러니 이제 볼 일은 없어.’
과연 무엇이 저주일까?
슐든 대륙을 떠나지 못하는 저주?
아니다. 그건 본질이 아니다. 그건 어찌 보면 단순한 눈속임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저주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저주였다.
허물 없이 완벽해야 할 리페리우스의 피에 허물이 있다는 것.
수천 년을 내려오며, 그 사실은 여러 가지 얼굴로 모습을 바꾸며 그들을 몰아갔다.
그의 부친은 ‘저주’를 들키지 않기 위해, 철저히 타인을 배척하는 쪽이었다.
‘우리가 목줄 걸린 개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된다. 알겠느냐? 절대, 약점을 들켜선 안 돼. 그게 알려지면 리페리우스의 강함은 이용당할 뿐이야.’
허물을 들킬까 두려워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리페리우스의 피가 흐르지 않는 인간은 그저 배척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예외 없이.
그런 의미에서 테베트의 부친은 가장 이상적인 리페리우스였다.
제 부인마저 가문의 피를 잇게 해 주는 수단,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여기지 않았다.
오직 리페리우스만을 위해 산 남자.
진짜 저주에 사로잡힌 이는 누구였을까?
‘전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것입니다.’
어린 테베트의 말은 그래서 진심이었다.
리페리우스에서, 저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마저 도구로 이용하며 불행에 빠뜨린다. 그게 진짜 저주에 걸린 사람의 행동이 아니고서야 무엇이란 말인가?
‘우습구나, 테베트. 네가 진정 리페리우스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지만 테베트는 어렸고, 취약했다.
그들은 어린 리페리우스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부친의 말대로였다. 테베트는 가문을 벗어날 수 없었다. 벗어나려 할 때마다, 사랑하는 이들이 손쉽게 사라져 갔다.
친한 친구가 사고를 당하거나, 집사의 팔이 잘리거나, 어머니가 영영 곁을 떠나는 일 같은 것들이 우습게 벌어졌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게 남은 건 가문뿐이었다.
‘방황은 충분히 하셨습니까? 소가주님, 아니 이제…… 가주님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군요.’
리페리우스와 엮이면 불행해진다. 리페리우스는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한다.
그게 진정한 이 저주의 본질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이후 테베트는 포기를 배웠다.
더 이상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자신은 리페리우스라는 지옥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했다.
단념과 순응.
저주는 이제 그런 얼굴로 모습을 바꿔 테베트를 삼켰다.
그 이후부터는 쉬웠다.
자신을 지우고, 주변을 지우며 그저 의무에만 몰두했다.
‘이번에도 리페리우스 공작께서 대승을 거두셨다더군!’
‘역시 마물로부터 제국을 수호하는 건 리페리우스뿐이야!’
‘어떤 권력에도 휩쓸리지 않는다니, 대단한 청렴이자 헌신이지 않은가!’
테베트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완벽히 착각하고 있었다.
슐든 대륙을 떠나지 못하는 저주. 살 곳조차 선택하지 못하는 박탈된 자유. 그 족쇄.
검을 휘두르고, 피를 뒤집어쓰고, 짓이겨진 살점을 밟으며 이 땅을 지킨 건 베르타니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 땅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리페리우스를 위해서였다.
이타적이라고 칭송받던 행위도 결국 제 허물을 감추기 위한 이기적인 몸짓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게 허물은 ‘중립’이라는 허울로 포장되었다. 그야말로, 우스운 말장난이다.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위선으로 가득한 삶을 살다 어느 순간 전쟁터에서 죽으면 잘 죽은 거겠구나 싶었다.
에슬린을 만나기 전까진 그랬다.
“각하!”
뒤에서 부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테베트는 말의 고삐를 당겼다. 말이 앞발을 들며 크게 울었다.
“마법사님께서 위치를 특정하셨습니다!”
테베트의 눈이 선득하게 빛났다. 부하는 조금 움찔했으나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북쪽 외곽으로 통하는 길의…… 각하, 각하!”
히이잉! 다시금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쏜살처럼 말 머리를 돌려 어둠을 파헤쳤다.
멀리서 부하가 쫓아오는 듯했으나, 금세 뒤처졌다.
“제기랄.”
턱이 아릴 만큼 이를 사리물어도 정신은 자꾸만 가물거렸다. 눈앞이 까맣게 점멸했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폭주하듯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두통이 심했다.
‘안 돼.’
그는 단검을 뽑아 제 허벅지에 내리꽂았다. 고통 때문에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이런 데에 맘 편하게 쓰러져 있을 순 없었다.
‘그녀를 잊은 주제에.’
잃은 주제에.
‘테베트 경, 내 사람이 되는 건 어때요?’
그때 그냥 고개를 끄덕였으면 어땠을까?
그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 말에 웃으며 그녀의 발치에 엎드리고, 손등에 키스한 뒤 충성과 사랑을 속삭였다면.
과연 어땠을까…….
그랬다면 적어도 제 손으로 에슬린에게 독배를 건네는 일만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이렇게 또다시 에슬린이 위험에 처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빌어먹을!”
몰려드는 후회에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에슬린은 빛 아래 선 사람이었다.
밝은 곳에 선 사람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제가 선 곳이 어둠 속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에슬린은 그가 가진 유일한 반짝이는 것이었다. 미래였고, 가능성이었다.
그래서 사랑했다.
하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제 어둠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지저분한 바닥을 들키고 싶지 않아 우왕좌왕했다.
사랑을 배우지 못해, 제게 찾아온 것이 사랑인 줄도 몰랐다. 그땐 그랬다.
“공작 각하!”
멀리서 부하가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오른쪽입니다!”
디에리안이 거칠게 소리쳤다. 그는 푸른 말을 타고 있었다. 테베트를 따라잡으려면 마법으로 만들어 낸 말 말고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마법사의 미간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고삐를 쥔 가느다란 손가락에도 하얗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 근처에서 흑마법의 기운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골목이요!”
테베트는 망설임 없이 고삐를 당기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검은 골목은 말이 지나기엔 지나치게 좁았다.
커다란 몸이 바닥을 가볍게 구르며 착지했다. 디에리안 또한 바닥에 내려섰다.
“각하…… 그 다리 상처.”
“앞장서.”
디에리안은 더 궁금해하지 않았다. 마법으로 작게 불빛을 만들어 망설임 없이 골목으로 들어갔다.
테베트는 피가 흐르는 허벅지를 대충 동여맨 뒤 디에리안의 뒤를 따랐다.
축축하고 냄새나는 골목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얼마 뒤, 디에리안이 낡은 나무문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여깁니다.”
안에 있는 인물에게 들킬까 봐 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테베트는 가볍게 손을 말았다 폈다.
에슬린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속죄할 것이다. 기억을 핑계로 저질렀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
하지만 용서받을 수 있을까?
테베트는 확신이 없었다. 같은 실패를 저지른 건 테베트였다. 기억을 잃었답시고 가문과 에슬린 사이를 저울질하고, 망설이다 도망친 건 결국 그였다.
그 때문에 에슬린은 또다시 위험에 처했다. 설령 에슬린이 용서한다 한들, 테베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끼이익.
그는 썩어 들어가는 나무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내부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물러서십시오!”
“끄아아악!”
푸욱! 더운 피가 훅 끼쳐 왔다. 테베트는 자기도 모르게 검을 뽑아 눈앞에 달려든 생물체를 베었다.
“뭡니까? 이건!”
꾸물꾸물 피를 토하는 게 마물은 아니었다. 이건…….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