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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97화 (97/147)

97화

디에리안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그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비슷한 생물체들이 더 달려들었다.

“시체들입니다! 각하!”

펑! 마력을 손에 두른 그가 작은 구체를 쏘아 보냈다.

생물체는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부서졌다. 입에서 검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흑마법에 조종당하는 시체 인형이었다.

“에시!”

“여긴 제가 책임질 테니 안쪽으로 가십시오, 각하!”

테베트는 망설임 없이 길을 만들며 나아갔다.

내부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마법 책들과 약병들이 굴러다녔다. 그 옆에 놓인 화로와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빌어먹을.”

에슬린 베르타니아의 초상화.

테베트의 몸짓이 더욱 다급해졌다.

그는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시체 인형을 베었다. 검은 마력의 독기와 피를 뒤집어쓴 채 내부를 뒤졌다.

기다란 천으로 가려진 안쪽이 마지막이었다.

부디, 제발.

그는 그 안쪽에 에슬린이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속죄의 시간이 빨리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불안했다.

쿵쿵. 이 심장의 떨림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휙! 그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천을 반으로 갈랐다. 예리한 날에 찢긴 천 아랫부분이 너풀너풀 떨어졌다.

“…….”

꽈악. 그는 검을 움켜쥐었다.

안쪽은 텅 비어 있었다.

* * *

“으…….”

에슬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크게 현기증이 인 탓이었다.

흑마법의 기운에 당해 영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래도 정신 차려야 했다.

“여긴……?”

에슬린은 느리게 걸음을 옮겨 벽면을 짚었다. 벽은 차갑고 어쩐지 축축했다.

내부엔 아무런 불빛도 없었다.

이 방의 창문은 오직 하나였다. 거기서 흘러들어 오는 달빛이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리라.

“하. 탑 꼭대기라니.”

창밖을 내려다보는 에슬린의 눈빛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창문은 꽤 컸다. 운이 좋으면 뛰어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건만 탑 꼭대기라면 말이 달라진다.

아득한 지상을 바라보며 에슬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모험해 볼까?

드르륵. 그녀는 창문을 열었다. 아래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비록 앙상한 가지뿐이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쿠션 역할은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거칠고 건조한 겨울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휘감았다.

반쯤 몸을 내밀고 있던 그때.

“이런, 이런.”

탁. 누군가에 의해 창문이 보란 듯이 닫혔다.

“뛰어내리는 건 안 돼. 또 죽을 셈이야?”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가느다란 손에 턱이 잡혔다.

“제 발로 날 찾은 건 황녀님이잖아. 잊었어?”

노란 눈동자가 광기를 담고 번들거렸다.

“꺼져. 내 몸에 손대지 마.”

“왜 나한테 화풀이를 해? 일주일 동안 당신을 찾지 못한 건 그 공작이지 내가 아니야.”

“…….”

“아무래도 진짜 버림받았나 봐, 황녀님.”

에슬린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문제는 돌아오는 길에 있었다.

외곽에서 중심지로 향하는 길.

타고 가던 공용 마차가 고장이 난 것이다.

“이것 참, 미안하게 됐구먼! 이런 데서 바퀴가 고장이 날 줄이야!”

마부가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곧 황궁 문이 닫히겠어.’

에슬린이 곤란한 얼굴로 먼 하늘을 보았다.

“이봐, 마크! 언제쯤 고쳐지는 거야? 물건을 빨리 가져다줘야 한다고!”

“출근 시간에 늦겠어요! 곧 가게 개점할 시간인데!”

함께 마차에 오른 사람들 또한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빼빼 마른 남자와 머리를 땋아 내린 여인이 차례로 투덜거렸다.

“조금만! 사람을 부르러 갔으니 조금만들 기다려! 응? 요금은 내가 충분히 깎아 줄 테니 말이야!”

“이런 허허벌판에서 발이 묶이다니, 말도 안 되잖아요. 공짜로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공짜는 좀…….”

천막으로 둘러싼 마차의 입구에서 마부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에슬린은 작게 뚫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자로 정비된 길 주변은 황량한 들판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저 멀리 상록수로 이루어진 숲이 검고 아득하게 보였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아서스가 결국 폭발했다.

“아저씨! 우린 해가 지기 전까지 황궁에 가야 하는데!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뭐 황궁? 황궁 사람이오? 대체 어떤…….”

“우리 하녀님께서 늦으시면 책임질 겁니까?”

“……하녀?”

“아서스 경…….”

에슬린은 긴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짚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에라이! 깜짝 놀랐잖아!”

마부가 아서스의 널따란 등짝을 팡 때렸다. 으억! 왜 때려요! 아서스가 소리쳤다.

땋은 머리 여인과 마른 남자가 깔깔 웃었다.

“난 또. 시녀님이라도 되시는 줄 알았네.”

“하긴 시녀님이 이런 공용 마차를 굳이 왜 타시겠어?”

방방 뛰는 건 아서스뿐이었다. 에슬린은 그가 부끄러워 딴청을 피웠다.

“하여튼! 급합니다! 빨리요!”

“여기 안 급한 사람이 어디 있냐?”

“우리 하녀님은 대단하신 분이라 절대, 절대 늦으시면 안 된다니까요?”

“그렇게 급하면 네가 그 대단하신 황궁 하녀님 업고 뛰든가!”

헉, 그런 방법이.

아서스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이 지나치게 반짝거렸다.

에슬린은 아서스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죽어도 싫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아서스 경.”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여인과 마른 남자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차였네.”

“차였어.”

“아직 아닙니다!”

아서스가 빽 소리쳤다.

마른 남자가 몸을 들썩이며 개구지게 웃었다. 그러더니 품에 안고 있던 짐을 냅다 풀어 헤쳤다.

“나도 모르겠다! 그냥 있기도 뭐한데, 다들 한잔하면서 시간이나 죽이자고. 여기 차인 친구를 위해 내 특별히 대접하지!”

“차인 거 아니라니까요!”

“마크, 잔 있나?”

“그럼!”

마부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제 짐을 뒤졌다. 모양 다른 잔인지 밥그릇인지 모를 것들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크으! 이 술맛 좋은데요?”

다짜고짜 길 한복판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음, 나도 기분 좋아졌어요. 다들 제 식당에 놀러 와요. 맛있는 음식 팍팍 쏠 테니까.”

여인이 호쾌하게 말했다. 마른 남자가 낄낄 웃었다.

“좋은걸. 자, 거기 대단하신 하녀님도 이리 와! 어차피 날도 추운데 몸이나 덥히자고.”

“어, 네…….”

에슬린은 설핏 웃으며 자리를 이동했다. 바깥쪽에 앉아 있던 몸을 안쪽으로 옮기자 승객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모여 앉게 됐다.

아서스는 에슬린 옆에 바짝 붙어 앉아 훈수를 두느라 바빴다.

“으악! 그 잔은 안 됩니다! 지저분해! 하녀님은 이 잔으로요!”

그는 가장 멀쩡해 보이는 잔을 벅벅 닦았다. 마른 남자가 진상이라는 듯 그를 노려보며 술병을 기울였다.

“어어, 너무 많이 따르지 마십시오! 저녁도 안 드셨는데 우리 하녀님 속 버리십니다.”

“아우 성가셔!”

결국 참다못한 여인이 폭발했다.

“그쪽은 무슨 뭐, 이 아가씨 호위라도 돼요?”

“엥? 어떻게 아셨습니까?”

“응? 진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만 끔벅였다.

“크흠. 그럼 나도 좀 끼어서…….”

천막을 걷고 들어온 마부가 은근슬쩍 끼어 가운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술병을 가져가자 마른 남자가 다시 빼앗아 들었다.

“마크, 자네는 마차 몰아야지. 무슨.”

“무슨 그런 서운한 소리를.”

“아저씨! 천막 문 좀 닫아요. 추워 죽겠는데.”

“아잇. 참 깐깐하네. ……어?”

창밖을 보던 마부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람 온다! 이봐!”

그는 문밖으로 크게 손을 흔들었다. 저 멀리 짐마차 한 대가 빠르게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어휴, 드디어 출발하네.”

마른 남자가 술잔을 탁탁 털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하지만 벌써 해가 저물었네요.”

에슬린이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인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아가씨, 갈 곳 없으면 우리 식당으로 와요. 위층에 여관도 겸하고 있으니.”

눈꼬리를 찡긋거리는 모습에 에슬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가에 선 마부가 내부를 정리했다.

“자자, 다들 자리에 앉으쇼! 마차 바퀴만 후딱 고쳐서 아주 빠르게 주파할 거니까는.”

“제발 좀요, 아저씨.”

“그럼…….”

어디 새 바퀴로 끼워 볼까.

마부는 출입구에 섰다. 그대로 천막을 걷고 바닥으로 내려서려 했다.

“……?”

커다란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뚝, 뚝. 술이 바닥에 흥건했다. 뭐야? 언제 흘린 거지?

“마, 마크……!”

“꺄아악!”

“무슨……?”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그제야 그 액체가 술이 아님을 깨달았다. 비린내가 훅 올라왔다.

누군가 등 뒤에 서 있었다. 마부는 고개를 내렸다. 제 배를 뚫고 나온 하얀 검날…….

에슬린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서스 경!”

그의 이름을 부른 건, 아마 아서스가 마부를 찌르고 수 초도 지나지 않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아주 긴 시간이 흘러 버린 것 같은 감각이었다.

“도망, 도망쳐야!”

“뭐, 뭐, 뭐야, 뭐냐고! 젠장!”

승객들이 정신없이 소리쳤다.

아서스는 마부를 뒤에서 찌른 동작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가 천천히, 아주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하아. 하아…….”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이게, 무……슨.”

그가 발작적으로 검에서 손을 떼어 냈다. 머리를 감싸고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지대를 잃은 마부는 나무토막처럼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에슬린은 그 모든 참담한 광경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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