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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98화 (98/147)

98화

“도망쳐!”

여인과 마른 남자가 후다닥 마차 밖으로 도망쳤다. 아서스가 꾸물꾸물 몸을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아가씨! 빨리 나와!”

여인이 멍한 에슬린을 마차 밖으로 끌어 내렸다.

차가운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태양이 사라진 밖은 어두웠다.

“으윽…….”

마부가 배를 감싸 쥐고 신음했다.

‘아직 살아 있어.’

저 멀리 새 바퀴를 갖고 온 짐마차의 짐꾼이 공포 어린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슬린은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마크 씨를 데리고 도망쳐요! 지금이라면 살릴 수 있어요!”

스윽. 천막이 다시 걷혔다.

검은 그림자처럼 등장한 아서스의 얼굴은 이미 제가 아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이건, 마치…… 그때 황궁의 그 감옥에서.

“어서요!”

“도, 도망쳐!”

마른 남자와 여인이 마부를 부축했다. 하지만 아서스가 좀 더 빨랐다.

“꺄악!”

그는 달아나던 여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아서스 경! 그만둬요!”

에슬린이 아서스의 팔에 매달렸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다 죽이고 데려가야…… 안 돼. 하녀님을…… 하지만 선생님이…… 안 돼…… 안 돼.”

에슬린은 입술을 물었다.

역시, 이건 흑마법의 기운이었다.

레비브의 산에서 느꼈던 바로 그 기운.

‘타툴란이 돌아온 거야.’

그녀는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아서스 경, 사람들을 놓아줘요.”

“…….”

“내가 목적이라면 날 데려가요. 더 이상 그 손에 피를 묻히지 말아요. 제발.”

간절한 속삭임에 아서스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털썩. 여인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빨리 도망가요!”

에슬린의 외침에 여인을 비롯한 승객들이 짐마차를 타고 줄행랑쳤다.

이제 남은 건 아서스와 에슬린뿐이었다.

“하녀님…….”

“읍.”

“아니, 황녀님.”

커다란 손에 입술이 틀어 막혔다. 귓가에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얼른 와.”

아서스의 목소리를 한 흑마법사의 목소리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에슬린은 널따란 공간에 홀로 누워 있었다.

“여긴……?”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없는 실내는 축축하고 서늘했다.

시야는 아주 천천히 돌아왔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달빛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으리라.

“아서스 경!”

에슬린은 저 멀리 널브러져 있는 아서스를 발견했다. 벌떡 일어서 달려갔다.

하얀 달빛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건…….”

에슬린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뒷걸음질 쳤다.

두 눈을 부릅뜨고 경직된 얼굴.

“죽었어.”

인지하자, 시취가 코를 찔렀다.

언제? 대체 언제 죽은 거지?

‘아니, 처음부터…… 죽어 있던 거야.’

강렬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숨이 거칠어졌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출입문이 보였다. 쾅쾅!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벽에 늘어선 창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

시린 달빛이 등대처럼 한 곳을 비추었다.

위로 향하는 나선형 계단이었다.

“타툴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서스를 잠시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눈을 감겨 주고, 목걸이와 검, 흐트러진 기사복 같은 것들을 잘 정돈해 주었다.

몸을 일으켰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걸음을 옮겼다.

흑마법사가 부르고 있다.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벅, 저벅. 그녀는 신중히 나선형 계단을 올랐다.

주위는 고요했다. 그러나 아까부터 코를 찌르는 냄새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탑 전체에 깔린 지독한 피 냄새.

과연 이 냄새는 어디서부터 나는 걸까?

2층에 다다랐다. 1층과 다르게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방 사이에서 반쯤 문이 열린 곳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문이 긁히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침실?”

우습게도 평범한 방이 나왔다.

널따란 침대와 책상, 벽난로, 책장, 장식용 검과 방패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에슬린은 천천히 걸어 장식용 단도를 뽑아 들었다. 날이 무뎠다.

책상으로 다가갔다. 펜과 종잇조각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날카로운 펜촉 끝엔 잉크가 메말라 있었다.

‘연구 흔적.’

에슬린은 종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타툴란이 여기서 뭘 실험하고 있는 거지?’

그때 쾅! 뒤에서 문이 닫혔다.

에슬린의 어깨가 크게 경련했다. 쥐고 있던 종이가 팔랑팔랑 떨어졌다.

“잘 지냈어, 황녀님?”

어둠에 파묻혀 있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랗게 번들거리는 눈이 보였다.

에슬린은 그를 돌아보았다. 타툴란이 천천히 다가왔다.

“타툴란.”

에슬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타툴란을 향해 가는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열 걸음, 다섯, 셋, 둘, 하나.

그녀는 순식간에 품 안에 숨겨 두었던 단도를 치켜들었다.

“……!”

노란 눈이 크게 벌어졌다.

무딘 날이라도 저 눈만큼은 꿰뚫기를!

탁. 그때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에슬린의 두 팔을 속박했다.

에슬린은 강제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뭐 하는 거야? 진짜 놀랐잖아, 황녀님! 드디어 미쳐 버린 거야?”

타툴란이 진심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아서스 경에게 무슨 짓을 했지?”

에슬린의 푸른 눈동자가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아서스를 죽인 건 타툴란이다. 저 싱글거리는 얼굴을 보니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그를 죽이다 못해 저런 모욕을 주다니.

에슬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끝끝내 흘리지는 않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가 몸을 비틀며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다.

“날뛰지 마.”

타툴란이 에슬린 앞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비식거리며 그녀의 턱을 쓸었다.

“말해. 아서스 경을 죽인 건 너야?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거지?”

“정말 궁금해?”

그가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끽끽 웃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이 탑 지하엔 아서스 같은 게 산더미처럼 있는데.”

“……뭐?”

“정말 궁금해?”

에슬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타툴란은 예상했다는 듯 입술을 틀어막았다. 환희에 젖은 눈매가 한껏 휘어졌다.

“그게 대체 무슨!”

“그거 알아, 황녀님?”

흑마법사가 과장해서 두 팔을 쫙 펼쳤다.

“의원 노릇은 꽤 쏠쏠하다는 거!”

에슬린이 입술을 떨었다. 다음 말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돈 없고 아픈 것들은 어디에나 있거든. 작은 선의만 보여도 다들 어찌나 마음을 활짝 열던지!”

“이런, 미친…….”

에슬린이 까드득 바닥을 긁었다.

“핫! 뭘 그렇게 진지하게 굴어? 황녀님도 높은 사람이니 알 거 아니야? 약한 것들은 짓밟아야 한다는 걸!”

“타툴란!”

“하아. 그 표정 좋네. 레비브 산에서는 영 별로였는데.”

타툴란이 땅에 떨어진 단도를 집어 들었다. 무딘 날로 에슬린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에슬린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타툴란은 전율에 빠진 얼굴로 손바닥에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감상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왜 혼자야? 당신 뒤꽁무니만 졸졸 쫓던 공작은 어디에 두고?”

에슬린은 이를 악물었다. 타툴란의 눈썹이 가엾다는 듯 기울어졌다.

“버림받았어? 에구구. 이를 어째.”

“말 돌리지 마. 사람들을…… 왜 죽였어? 도대체 뭘 위해서?”

“아쉽게 됐네. 공작을 다시 만나면 복수해 주려고 했는데.”

“대답해! 이러는 이유가 뭐야?”

“나도 영혼 반쪽이 산산조각이 나는 바람에 힘들었다고. 마력 손실도 아주 심했고. 아, 역시 그 남자부터 죽이고 올 걸 그랬나…….”

“타툴란!”

“좀 닥쳐 봐!”

그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솟구치며 에슬린을 파고들었다. 현기증이 일고 헛구역질이 났다.

타툴란이 성가시다는 듯 귀를 쑤셨다.

“시끄럽게, 진짜. 죽여 버린다?”

“대답해……. 사람들을, 왜 죽였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에슬린이 물었다.

타툴란은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연극 같은 미소가 곧 떠올랐다.

“황녀님, 황녀님. 왜 모른 척해?”

“…….”

“다 황녀님을 위해서잖아.”

“무슨 개소리야!”

“성배의 행방.”

에슬린의 숨이 멈추었다.

타툴란이 버석한 손으로 에슬린의 턱을 잡아 치켜들었다. 노란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듯 응시했다.

“모른다고 하지 마. 알잖아? 성배를 마물들이 훔쳐 갔다는 거.”

“지금…… 포털을 열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는 거야?”

“응.”

타툴란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물론! 단순한 포털은 아니고, 성배가 있는 마계 중심부로 통하는 포털인데…… 으음. 뭐, 됐어. 그딴 사소한 차이가 뭐가 중요해?”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검지로 벽면을 쓸자 진득한 무언가가 배어 나왔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성배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가 보란 듯이 검지와 엄지를 문질렀다.

그제야 이 정체 모를 공간에서 진동하는 피 냄새의 출처를 깨달았다.

‘벽을 타고…… 피가 흐르고 있어.’

도대체 몇 명의 피일까? 아찔해졌다.

“넌, 미쳤어.”

“칭찬 고마워.”

그가 이번에는 네 손가락에 피를 묻혀 에슬린에게 다가왔다. 그대로 볼을 쥐자 흰 뺨에 핏빛 손자국이 남았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재차 토기가 치미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럼 이제 선택의 시간이야, 황녀님.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라고.”

“마지막 기회?”

“그래. 나 좀 봐. 얼마나 관대해? 몇 번이나 내 목숨을 노리는 황녀님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다니!”

그가 진심으로 감동한 듯 입꼬리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미간이 꿈틀거렸다.

“난 지금부터 성배를 찾아올 거야. 어떡할래?”

타툴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에슬린의 볼을 문질렀다. 피가 둥글게 번져 들었다.

“내 인형이 되겠어?”

“…….”

“뭘, 나쁜 건 아니야. 그냥 나와 손잡자는 소리지. 그러면 이 제국을, 이 대륙을 당신 발아래 무릎 꿇게 만들어 줄게.”

“……그다음엔? 난 너에게 무릎 꿇고?”

“나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작은 보상쯤은 받아도 되지 않아?”

에슬린은 물끄러미 흑마법사의 얼굴을 응시했다.

“결국 이 대륙을 네 손아귀에 넣고 싶다는 소리네.”

타툴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에슬린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미처 다 참지 못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웃지?”

타툴란의 눈썹이 순간 움찔거렸다.

“그야…… 웃기잖아.”

에슬린은 고개를 들고 타툴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네 목적이란 게 너무…… 하찮아서.”

“하찮다고?”

볼을 쥔 손의 힘이 강해졌다.

“황녀님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 하찮은 목표 하나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게 누구더라?”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에슬린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영혼을 팔아 가면서까지 이룰 목표는 아니지.”

“허세 부리기는.”

덜컹! 그 순간 낡은 창문이 크게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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