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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99화 (99/147)

99화

고개가 홱 돌아갔다. 디에리안인가?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푸하핫! 맞은편에서 웃음이 터졌다.

“뭘 기대하는 거야? 디에리안이라도 온 줄 알았어?”

“…….”

“여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야. 그러니 황녀님에게 걸린 보호 마법이 발동할 일도, 디에리안이 황녀님을 찾아낼 일도 없어.”

그가 입술을 말아 올렸다.

에슬린은 거칠게 고개를 털었다. 하지만 꽉 쥔 손의 힘은 전혀 느슨해지지 않았다.

“말했지? 내가 디에리안 프레이보다 뛰어난 마법사라고.”

“이거 놔.”

“잘 생각해 봐. 당신의 무능하고 겁 많은 그 측근들 중 누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어?”

그가 눈짓으로 벽을 가리켰다.

“만약 내가 널 선택하지 않으면?”

“아, 그건 상상하기 싫은데.”

타툴란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측은한 것을 보듯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몹시 유감스럽지만, 황녀님을 마지막 제물 삼아야지.”

“제물?”

“이 마법진을 완성할 마지막 피가 필요하거든.”

“…….”

“남은 한 자리는 황녀님의 피로 장식해도 나름의 기념이 되지 않겠어?”

에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제 편이 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소리였다.

정적이 흘렀다. 문득 에슬린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역시 넌 멍청해.”

흑마법사가 눈알을 한 번 데굴 굴렸다.

“듣자 하니…… 지금 아쉬운 사람은 너잖아?”

“뭐?”

“마지막 기회 운운하며 날 굳이 찾은 이유가 뭐야? 당장 날 죽이지 않고 회유하려 드는 이유는?”

에슬린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낮아졌다.

“성배를 손에 넣을 때. 혹은 성배의 힘을 이용할 때.”

“…….”

“내 도움이 필요한 거구나. 베르타니아의 피가 아니면 안 되는 부분이 있나 보지?”

교묘한 뱀의 혀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에슬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에르단은 애초에 성배에 관심이 없으니 논외고. 카르단을 꼬여 내지 않은 이유는, 뭘까? 아하.”

“닥……”

“카르단은 성배를 없앨 생각인 거야.”

타툴란의 콧잔등이 꿈틀 움직였다. 에슬린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황제의 상징이 파괴되면 네 입장에선 곤란하겠지. 그걸 핑계로 황족을 쥐고 흔들 수 없게 되니 말이야…….”

내내 바위 같던 흑마법사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손목을 틀어쥐고 있던 주박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 덕에 에슬린은 제가 정답을 말했음을 알았다.

“게다가 네 그 대단한 마법은 미완성인 거 같고.”

타툴란이 이를 갈았다. 싱글싱글 걸려 있던 웃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에슬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말해 봐. 대체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너와 손을 잡아야 하지? 내 마법사보다 실력도 한참 못 미치는 너를.”

마력이 크게 요동쳤다. 그 순간 에슬린은 손목을 비틀어 포박을 풀어냈다.

몸을 일으키자 타툴란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잘난 척! 잘난 척! 억지로 센 척하지 마! 어차피 내 탑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주제에! 언제까지 날 얕볼 수 있을까?”

“그래. 나도 여길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곤 기대 안 해.”

에슬린은 소매 안쪽에 숨겨 두었던 펜을 치켜들었다. 푹! 이번엔 헛나가지 않았다.

“아악!”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할 생각은 없어.”

에슬린은 손에 힘을 주었다. 펜촉이 박힌 눈을 감싼 채 흑마법사가 비틀비틀 뒷걸음질 쳤다.

‘너무 얕았나?’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핵을 정확히 노렸음에도 흑마법사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핵을 다른 곳으로 옮겼군.’

낭패감이 들었으나, 어쨌든 기회였다.

‘일단 여길 빠져나가자.’

에슬린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복도를 달렸다.

“젠장-!”

피에 젖은 절규가 뒤를 강타했다.

“하아, 하아.”

탑은 넓었고, 높았다.

출구는 어디일까?

기나긴 복도는 공허했다. 똑같은 문양의 방문이 늘어서 있었다. 잊었던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이 미끌거렸다.

에슬린은 닥치는 대로 방문을 열어젖혔다.

방 안의 구조는 아까와 동일했다.

서둘러 문을 닫고 다음 방을 향해 뛰었다. 쫓는 기색은 없었다. 벌컥, 다음 방문을 열었다.

똑같은 문양의 문고리. 아까와 똑같은 방 구조.

다시 다음 방. 다음 방. 다음 방…….

그렇게 얼마나 복도를 헤맸는지 모를 때쯤.

“…….”

에슬린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쉴 새 없이 움직인 탓에 호흡이 거칠었다.

이렇게 숨이 달릴 만큼 복도를 뛰었는데.

왜 내려가는 계단이 없지?

* * *

“빨리요! 빨리!”

땋은 머리 여인이 재촉했다. 마른 남자는 의원을 나서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일단 관청부터 가 보자고!”

“그래요. 빨리 사람을 모아야 해요.”

하지만 너무 늦은 밤이었다. 과연 모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인은 눈물을 닦았다. 자신을 희생해 저를 구해 내던 황궁 하녀의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죄책감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쳤다.

“그 황궁 하녀 인상착의를 설명할 수 있겠어?”

“그럼, 그럼요.”

여인은 눈물을 줄줄 떨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대화에 몰두하느라 바로 옆에서 말 몇 필이 지나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후드를 쓰고 있었지만 분명 연보랏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거기! 지금 뭐라고 했나?”

히이잉! 말이 급하게 멈추는 소리가 났다.

다그닥, 다그닥. 멀어지던 기수 중 한 명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마른 남자가 말 위에 앉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기사님!”

망토가 펄럭였다. 거기에 새겨진 문장은.

“헉, 리, 리페리우스 공작가…….”

“도와주세요! 사람이 끌려갔어요!”

여인이 잽싸게 나섰다. 젊은 기사의 미간이 좁아졌다.

“설마.”

제롬이 말을 움직여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연보라색 머리카락의 황궁 하녀던가?”

“예! 어떻게 아시죠?”

“어디, 지금 어디에!”

그가 황급히 물었다. 그때였다.

검은 밀도를 가진 무언가가 성급하게 가까워졌다.

“수도 외곽…… 헙……!”

여인이 입을 딱 다물었다.

한기를 몰고 나타난 그는,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절로 몸이 움츠러들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억지로 갈무리한 기운. 그러나 곧 터질 것 같은…….

“공…… 공작 각…….”

“어디라고?”

무언가를 눌러 삼킨 듯한 물음이 이어졌다.

“그게, 그러니까.”

기에 눌린 여인이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공작이 망설임 없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반듯하게 걸어온 남자는 그러나 몹시도 위태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제대로 말을 해. 어디에서 봤다고?”

여인은 멍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수도 외곽. 상록수림 근처에서……요. 웬 용병 기사에게 끌려가는 걸 봤어요.”

“…….”

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죽 장갑이 마찰하는 소리가 선득했다.

그 순간 여인은 무엄하게도, 태산 같던 남자가 곧 쓰러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해야만 했다.

“마법사!”

공작이 억누른 것을 폭발시키듯 거칠게 소리쳤다. 그러자 바로 옆 푸른 말에 올라가 있던 남자가 손을 휘둘렀다.

“이동하겠습니다.”

푸른 빛이 번쩍이고, 세 기사는 모습을 감췄다.

* * *

‘괜찮으십니까, 전하?’

처음 타툴란에게 납치됐을 때, 그녀를 구한 건 테베트였다.

그때의 안도감과 기쁨에 대해 그에게 말했던 적이 있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를 안고 하얀 달빛 아래를 걷던 남자에게, 에슬린이 물었다.

‘테베트 경, 내 사람이 될 생각은 없어요?’

‘없습니다.’

남자의 대답은 간결하고도 단호했다.

에슬린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거절당한 막막함에 마음이 비뚤어졌다.

‘내 사람이 될 생각이 없는데 왜 날 구하러 왔어요?’

‘…….’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왜 자학을 하죠?’

크고 투박한 손이 그녀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제가 전하를 선택하지 않는다고, 당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할 말이 없었다. 에슬린은 감았던 눈을 떴다. 앞을 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남자의 시선은 뚫어져라 저를 향하고 있었다.

‘전하를 구하러 온 건…… 글쎄요.’

‘…….’

‘이것만큼은 저도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던 단단한 얼굴이 피식 허물어졌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정신 차리고 보니 몸이 움직였는데, 그럼 어떡합니까?’

흰 달빛이 부서지는 그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다, 에슬린은 다시 눈을 감았다.

“…….”

사위는 온통 깜깜했다. 에슬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황녀님, 잘 잤어?”

에슬린은 커다란 침대에 홀로 누워 있었다.

이곳은 몇 층일까?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무리하지 않으면 피곤할 일도 없잖아.”

“건드리지 마.”

타툴란이 긴 손을 들어 에슬린의 볼을 두드렸다. 그녀는 그 손을 가볍게 쳐 냈다.

결국 다시 붙잡혔구나.

긴 숨을 내쉬었다. 언제 붙잡혔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창밖은 여전히 보름달 뜬 밤이었다.

“다신 그런 거친 짓 하지 마.”

흑마법사가 말했다. 한쪽 눈에 붕대가 대충 감겨 있었다. 그 꼴을 보니 뒤집히던 속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핵을 다른 데 숨겼나 보지? 겁쟁이네.”

“유도 신문도 소용없어. 넘어가지 않을 거니까.”

에슬린은 입을 다물었다.

‘핵을 찾아내야 해.’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타툴란에게 향했다.

몸을 움직이니 옷자락이 바스락거렸다. 낯선 감촉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이건 대체 무슨 꼴……”

“푸핫! 놀랐어? 내 선물이야!”

흑마법사가 양팔을 쫙 벌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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