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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00화 (100/147)

100화

헛웃음이 절로 터졌다. 제가 난생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 어울려. 볼품없는 하녀복보다 백배 낫다니까? 역시 황녀님은 황족이야!”

에슬린이 입고 있는 건 풍성한 레이스를 겹겹이 두른 검은 드레스였다.

작은 보석과 스팽글로 촘촘히 장식해 움직일 때마다 달빛을 반사했다. 허리는 조이고 어깨는 훤히 드러난 원색적인 형태였다. 역겨웠다.

에슬린은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리고 바르게 서는 순간.

“……?”

그대로 다리가 허물어졌다.

“이런, 조심해, 황녀님.”

타툴란이 다가와 에슬린을 부축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다시금 쳐 냈다. 타툴란이 결백하다는 듯 양손을 어깨 위로 들어 보였다.

에슬린은 후들거리는 제 다리를 바라보았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글쎄. 한 일주일 정도?”

“…….”

고개가 저절로 옆으로 돌아갔다. 창밖은 여전히 보름달 뜬 밤이었다.

“……바깥과 이곳의 시간이 다르구나.”

“응. 이제 눈치챘어? 탑 바깥은 고작해야 몇 시간 지났을 뿐일걸.”

타툴란이 비식 웃었다.

‘시간 흐름까지 제어하는 결계라니.’

단순히 공간을 분리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검은 마력이 더 강해졌어.’

마법사를 감싼 기운이 한껏 짙어져 있었다.

깨닫고 나니 숨이 막혔다.

에슬린은 이를 악물고 탁자를 짚어 일어섰다. 일주일 동안 잠들어 있던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그도 아니면, 검은 마력의 독기에 장시간 노출된 탓일지도 모른다.

홀로 애쓰는 에슬린을 보며 타툴란이 낄낄 웃었다.

“그래, 황녀님 말이 맞아.”

에슬린은 그를 돌아보았다.

“아쉬운 건 나야. 하지만 지금 당장 그쪽 목숨줄 쥐고 있는 게 누군 거 같아?”

“…….”

“계산 잘하란 소리야. 수틀리면 황녀님은 물론 황녀님 측근들까지 다 죽여 버릴 테니까. 성배야 뭐…….”

타툴란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 힘을 키우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지 않겠어?”

그가 손바닥을 펼쳤다. 검은 구체가 그의 손 위에서 회오리쳤다.

인간의 피를 먹고 자란 흑마력.

그건 이제 흡사 저주처럼 보였다.

처음과 다른 밀도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여긴 몇 층이야?”

“그게 중요해? 뭐……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 보든가.”

타툴란이 선심 쓰듯 말했다. 에슬린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현기증이 일었지만 참았다.

“으…….”

벽을 짚자 끈적한 것이 묻어났다.

피라는 것을 깨닫곤 이를 악물었다.

보름달을 마주하며 창을 열었다. 반쯤 몸을 내밀자 커다란 나무 꼭대기가 저 아래에 보였다. 막혔던 숨이 터졌다.

“하……. 탑 꼭대기라니.”

열린 창문에서 미미한 바람이 불어왔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가슴 아래에서 나부꼈다. 훤히 드러난 어깨에 소름이 돋았다.

잠깐, 바람?

그 순간 창문이 닫혔다.

“이런, 이런. 뛰어내리는 건 안 돼. 또 죽을 셈이야?”

타툴란이 잔뜩 비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차가운 손이 에슬린의 턱을 쓸었다.

“제 발로 날 찾은 건 황녀님이잖아. 잊었어?”

“꺼져. 내 몸에 손대지 마.”

“왜 나한테 화풀이를 해? 일주일 동안 당신을 찾지 못한 건 그 공작이지 내가 아니야.”

“…….”

“아무래도 진짜 버림받았나 봐, 황녀님.”

에슬린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의 세 치 혀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다른 말들은 다 집어치워.”

에슬린이 비릿하게 웃었다.

“날 지금까지 재워 놓은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음, 맞아. 솔직히 좀 방해됐거든. 하지만 이제 괜찮아. 마법진을 완성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이…….”

타툴란이 딱! 하고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냈다.

그러자 탑이 크게 한 번 진동했다.

“황녀님이 선택할 때라는 말이야.”

발아래 불길한 무언가가 크게 한 번 꿀렁였다.

그와 동시에 핏빛 마법진이 바닥 가득 떠올랐다. 가장자리에서 검은 기운이 연기처럼 솟아올랐다.

급하게 숨이 막혔다. 그건 산소를 먹으며 자라는 생물체 같았다. 검은 그림자가 몸집을 불릴 때마다 에슬린은 뭍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숨을 헐떡였다.

참지 못하고 목을 틀어쥐었다. 꽉 막힌 듯 답답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 탑 전체가 피로 그린 마법진 자체라는 걸.

벽을 타고 흐르는 수많은 이들의 피.

그것이 이곳에 모여 하나의 형태로 완성된 것이었다.

“자, 말해. 내 손을 잡을래? 아니면, 이 마법의 제물이 될래?”

“그만해…….”

그림자에 잡아먹히면 이런 기분일까.

타툴란은 도대체 무슨 마법을 완성한 것인가?

그야말로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벌어져선 안 되는 금기를 눈앞에 둔 인간은 손쉽게 무력해졌다.

“선택해!”

타툴란이 벼락처럼 소리쳤다.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그림자가 쇄도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것은 칼날처럼 에슬린을 향했고, 그녀의 몸을 스쳤다. 타는 듯한 고통이 뒤따랐다.

“아아. 이것 봐. 망설이니까 흥분해 버리잖아.”

타툴란이 중얼거렸다.

에슬린은 팔을 움켜쥔 채 뒷걸음질 쳤다. 가늘게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타툴란 뒤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바람이 불었어.’

에슬린은 그 감촉을 떠올렸다.

바람은 곧 흐름.

그러니 그건 타툴란의 결계가 무슨 이유에서건, 깨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 마법진을 완성하느라 결계를 유지할 힘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디에리안…….’

제 마법사가 이 결계를 부수고 있거나.

에슬린은 후자를 믿기로 했다.

이제는 시간 싸움이다. 어떻게든 포털이 열리는 걸 막고, 디에리안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좋아. 선택할게. 난……”

그때 손끝에 매달려 있던 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어?”

순식간이었다. 불길하게 어슬렁거리던 기운이 갑자기 뾰족해졌다.

아래에서부터 거친 돌풍이 일었다.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중력을 잊은 것처럼 일순 솟구쳤다.

뭐지? 이건?

피부를 찌르는 날 선 바람이었다. 전신을 휘감는 채찍 같은 감각에 에슬린은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다.

“아하하! 하하하! 선택은 무슨! 그거 알아? 사실 처음부터 황녀님에게 선택지란 건 없었어!”

미친 마법사의 흥분 어린 웃음소리만이 돌풍을 뚫고 들렸다.

피로 그린 마법진이 불길한 붉은빛으로 빛났다.

“황녀님은 제물도 되고, 내 인형도 될 운명이었으니까!”

찌이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벽이 찢어지는 소리였다. 아니, 공간이 찢어지는 소리였다.

아무것도 없던 벽에 검은 구멍이 뻥 뚫렸다. 돌풍은 순식간에 그 구멍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어둠을 압축하고 응축해 놓은 듯한 검은 구덩이.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엄청난 폭풍우가 그 안에 있었다. 파괴와 살육으로 만들어 낸 금기 공간. 절대 이 세상에 나타나선 안 되는…….

‘포털.’

마계로 향하는 문이었다.

“자, 고집 그만 피우고 가자, 황녀님.”

타툴란이 가벼운 몸집으로 검은 포털 안에 진입했다. 그는 이미 그 공간의 일부인 것처럼 융화되었다.

안쪽에 선 채 그가 손을 내밀었다.

몸을 가누기 어려운 강풍이 계속해서 에슬린의 등을 떠밀었다. 모든 게 엉망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버텨야 해. 어떻게든.

“빨리 와. 고집 그만 부리고.”

잡고 버틸 만한 기둥조차 보이지 않았다. 몸이 앞으로, 앞으로 자꾸 전진했다.

버텨. 조금만 더 버텨.

저 멀리 타툴란이 눈을 휘어 웃었다. 신사라도 되는 양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손을 내민 꼴이 우스웠다.

그때 어디선가 희미하게 매 우는 소리가 났다.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타툴란은 입술을 삐죽였다. 휙 손을 움직이자, 검은 포털 위로 수백 개의 눈알이 다닥다닥 모습을 드러냈다.

마물이었다.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에슬린은 쉽게 표적이 되었다.

마물이 꾸역꾸역 포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대로 에슬린을 향해 돌진하려는 순간.

“디에리안!”

에슬린이 소리쳤다.

그걸 신호로 방 안 창문이 일시에 깨졌다.

와장창! 수십 마리의 푸른 매가 창문을 뚫고 쇄도했다.

이번엔 다른 방향에서 돌풍이 불었다.

포털로 향하려는 강풍과 창문에서 밀려들어 오는 강풍. 실내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뭐야?”

흑마법사가 잠시 주춤했다.

크아악! 푸른 매 한 마리가 에슬린에게 달려드는 마물을 해치웠다.

에시!

어디선가 환청이 들렸다. 에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디에리안, 화염!”

그러자 이번엔 푸른 매들이 일시에 불타는 새로 모습을 바꾸었다.

에슬린이 손을 치켜들었다. 화염이 된 마법 매는 눈을 번득이며 에슬린의 손가락 방향만을 주시했다.

그녀는 타툴란을 바라보았다.

“안 돼…….”

그는 에슬린이 무엇을 하려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에슬린은 망설이지 않고 허공에 손을 내리그었다.

불꽃이 된 새들이 마법진 위로 돌진했다.

“영원히 갇혀 있도록 해. 너 거기 잘 어울리네.”

흑마법사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서둘러 포털을 빠져나오려 했지만.

마법진이 순식간에 불타오르고,

“안 돼애-!”

포털이 닫히는 게 더 먼저였다.

검은 구멍은 성큼성큼 크기를 줄였다. 마법사는 손을 뻗었으나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다.

에슬린 베르타니아아-!

찢어질 듯한 그의 절규가 회오리와 함께 뚝 사라졌다.

“하아, 하아.”

에슬린은 비틀거리다 망가진 마법진 위에 주저앉았다. 깨진 창문으로 바람이 몰아쳤다. 주변 불길이 삽시간에 몸집을 키워 번져 나갔다.

“…….”

그녀는 벽면을 멍하게 응시했다. 포털이 자리했던 벽면은 이제 텅 비어 시뻘건 불이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콰앙! 사방에서 무언가가 부서져 내렸다.

‘이제 빨리 여길 빠져나가야 하는데…….’

긴장이 풀린 탓일까. 손끝 하나 꿈쩍할 수 없었다.

곳곳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번엔 흑마법 때문이 아니었다.

이 방에, 탑 전체에 불이 번지고 있었다.

‘도망쳐야 하는데…….’

계단이, 이제는 생겼을까?

하지만 정말로 힘이 없었다.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에시!

에슬린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

우지끈!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죽지 마.

이번에야말로.

널 포기하지 마.

에슬린은 무릎에 힘을 주었다.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바닥을 짚고, 불타는 주변을 피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에슬린은 다시 한번 창문 앞에 섰다. 등 뒤에서 무언가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에시!”

저 아래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테베트가 보였다.

환청이 아니었다.

그는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고삐를 놓았다. 에슬린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와장창! 콰앙! 무언가가 폭발했다.

에슬린이 창문에서 뛰어내린 것과 동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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