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으아아! 그렇게 대책 없이 뛰어내리시면!”
디에리안의 기겁한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린 것도 같았다.
그 순간 눈앞에 빛이 번쩍였다.
[성배를 포기하느냐?]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남자 같기도, 여자 같기도, 아이 같기도, 노인 같기도 한…….
‘마우시스.’
신의 목소리.
[네 대가는 유효하다. 기억의 굴레는 또다시 반복되겠구나.]
머릿속에 테베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를 향해 달려오는 다급한 모습.
신이 제게 일부러 보여 주고 있는 잔상이었다.
[같은 고통을 선택하다니. 어리석고, 또 어리석다.]
‘같은 고통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지?]
‘테베트 경과 제 인연은, 이제 기억에 얽매여 있지 않으니까요. 신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신은 잠시 침묵했다.
[네가 감히 내 대가를 우습게 아는 게 아니냐?]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에슬린은 잠시 웃었다. 처음 신을 만났을 땐 느끼지 못한 것들을 새삼 깨달았다.
‘당신의 대가가 더 이상 제게 유효하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주변에 거친 파동이 일었다. 낮은 분노가 느껴졌지만 어쩐지 두렵지는 않았다.
‘다른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다른 대가?]
‘네. 그러니 이제 어설픈 기억 장난은 그만두십시오.’
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낮은 공기의 진동이 느껴졌다. 아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아이야, 네가 감히 나와 거래를 하겠다는 게 아니냐.]
‘제가 성배를 갖겠답시고 그대로 타툴란을 따라갔다면 어땠을까요?’
[갑자기 무슨 말이지?]
‘포털은 순식간에 몸집을 불려 수도까지 삼켰을 겁니다.’
탑 전체가 마법진이었다. 일반적인 규모는 아니었다.
과연 수도까지 삼켰을지는 솔직히 미지수였지만 에슬린은 지금 협상가였다.
‘그랬다면 당신의 신전 또한 무사하지는 못했을 터.’
따뜻한 바람이 볼을 감쌌다.
‘진짜 그걸 원하셨습니까?’
[발칙하구나. 참으로 발칙해.]
주변이 더 환하게 밝아졌다. 그게 어쩐지 신의 전율 같아 보여 에슬린은 이 협상이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그래, 네가 그토록 바라는 다른 대가가 무엇이냐?]
에슬린은 천천히 제가 치를 대가를 정했다. 하얀 빛이 점점 더 환해졌다.
[재미있어. 아주 재미있어…….]
봄바람이 불었다. 제 등을 부드럽게 밀어 주는 훈풍이었다.
[좋다, 가거라. 다만, 이것만은 기억하렴.]
엄중한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 대가를 치르지 못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넌 내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걸…….]
빛은 서서히 사라졌다.
따뜻함이 몰려 나가고 찬 공기가 몸을 파고들었다.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는 감각이 이어졌다.
다시 품 안에 온기가 가득 찼다. 이번엔 진짜 온기였다.
무언가 단단한 것이 등을 강하게 휘감았다.
“……하아.”
그 순간 에슬린은 깨달았다. 제가 무사히 그의 품으로 착지했음을. 그리고.
“에시.”
테베트가 제게 돌아왔음을.
에슬린은 천천히 팔을 들어 저를 끌어안은 남자를 마주 안았다. 익숙한 향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품이 너무나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그가 안도한 듯 긴 숨을 내뱉었다. 겨울 공기가 묻은 딱딱한 흉곽이 크게 오르내렸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에슬린을 끌어안은 테베트가 귓가에 입술을 묻었다.
“미안해요.”
숨결이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 왔다. 다정한 저음이 그녀의 피를 타고 도는 느낌이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
“미안해요.”
눈가가 뜨거워졌다. 커다란 손이 등을 연신 쓸어내렸다.
“……아뇨.”
에슬린이 속삭였다. 아주 미약한 목소리였지만 테베트가 놓칠 리 없었다.
“사과하지 말아요.”
꽈악. 그가 등 뒤에서 주먹을 움켜쥐는 듯했다. 잔 떨림이 느껴졌다.
“당신은 아무 잘못 없으니까.”
그건 에슬린이 테베트에게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기억을 모두 되찾고 나서부터.
레비브에서부터, 줄곧.
“구하러 와 줘서 고마워요.”
에슬린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테베트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얼굴을 보여 줘요.”
“그날, 내 목숨을 구해 줘서 고마워요.”
테베트의 동작이 굳었다. 에슬린은 독배를 건넨 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에시.”
“…….”
“그건 감사를 받을 일이 아니에요.”
에슬린이 서서히 얼굴을 떼어 냈다. 그제야 테베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빈틈없이 자리한 이목구비. 흠 하나 찾을 수 없는 완벽한 비율의 얼굴. 날카롭고도 아름다운 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거기에 떠오른 감정이 죄책감인지 미안함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에슬린의 머리카락을 다정히 쓸어 넘겼다.
“그건 절대로, 당신이 제게 감사할 일이 아니에요.”
“테베트 경, 난……”
“각하!”
갑작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리니 저 멀리 제롬이 달려오고 있었다.
“탑이 불타고 있습니다! 마법사님께서 막고 계시긴 한데, 어떻게 할까요?”
제롬이 에슬린을 힐끔 보았다.
그제야 인지하지 못했던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숲 한가운데. 수목은 모두 흑마력의 독기에 당해 까맣게 죽어 있었다.
눈앞에 활활 타오르는 탑 꼭대기가 보였다. 불은 점점 더 아래로 퍼져 나갔다.
탑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아무래도 디에리안이 내부 수색에 나선 모양이었다.
“각하, 어떻게 할까요?”
제롬이 재차 물었다.
테베트가 에슬린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에시, 저 안에…….”
그 순간 그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짙은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저 안에, 뭐요?”
“잠깐, 당신 차림이…… 왜 이런 거죠? 이 상처는 또 뭐고?”
“무슨, 아.”
에슬린은 그제야 제 꼴을 내려다보았다.
훤히 드러난 어깨. 엉망으로 찢어진 검은 드레스 자락. 한쪽 팔에 흐르는 피.
테베트는 손수건을 꺼내 에슬린의 팔을 묶어 주었다. 그의 미간이 깊게 팼다.
“괜찮아요. 심하지 않으니까.”
“…….”
“그래서 뭘 물으려고 했죠?”
“저 안에 산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아.”
“있었으면 좋겠군요.”
에슬린은 고개를 들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마주쳤다.
“당신을 이렇게 만든 놈은 특히 더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요.”
반드시 죽여 버릴 테니까.
이를 가는 소리가 선연했다.
테베트가 거칠게 망토를 벗었다. 그대로 에슬린에게 둘둘 말아 빈틈이라곤 하나도 없게 만들어 버렸다.
“타툴란은 포털 안으로 사라졌어요. 그 외에 다른 이들은…….”
에슬린은 다소 우울한 표정이 됐다. 아서스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모두 죽었을 거예요.”
테베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기세를 더해 가는 불꽃이 검은 밤하늘을 수놓았다. 붉은 빛이 에슬린의 흰 낯에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기사들은 어디쯤이지?”
“연락을 보냈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마법사를 도와 화재를 막고 내부를 수색해.”
“예, 각하.”
제롬이 화급히 다시 몸을 돌렸다.
“제롬 경.”
달려 나가려는 그를 에슬린이 붙잡았다.
제롬은 뒤를 돌았다. 에슬린은 테베트의 품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서 있었다.
깊은 눈동자가 그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어쩐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탑 지하에 시체가 있을 거예요. 아마 아주 많이……. 신원을 확인해 가족이 있다면 연락해 줘요.”
시체가 많이?
제롬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
뚝, 말이 멈추었다. 젊은 기사의 눈이 끔뻑끔뻑 느리게 움직였다.
뭐지, 이 위화감?
제롬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저 여자는…….
“지금…… 하녀인 네가 내게 명령한 거냐? 자연스럽게 대답할 뻔 했잖아…….”
그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제 주군과 조금 애틋한 것 같은데 그걸 가지고 유세를 떠는 건가 싶었다.
그때 쾅! 커다란 소음이 들렸다. 탑 입구에서부터였다.
“콜록, 콜록.”
회색 연기를 뚫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재와 먼지를 뒤집어쓴 디에리안이었다.
뭘 한 건지, 그의 손에서 수상한 연기가 풀풀 나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검댕이 잔뜩 묻어 엉망이었다.
마법사가 이쪽을 발견하곤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
“전하.”
제롬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전하?”
누가?
여기에 각하는 있지만 전하는 없을 텐데?
디에리안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제롬 근처에 섰다. 볼을 긁자 또 다른 검댕이 죽 묻었다.
“화재는 막았습니다. 내부는 연기가 좀 빠지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뭐, 급하면 제가 대충……”
“아냐. 무리하진 마.”
에슬린이 고개를 저었다.
디에리안은 건조한 눈으로 에슬린을 훑었다. 기나긴 숨을 내쉰 마법사가 재차 마력을 움직였다.
“다친 곳이 있으신지 보여 주십시오. 응급 처치부터 해야겠습니다.”
에슬린은 간단히 팔을 치료받았다. 디에리안이 다시 손수건을 묶어 주려는 걸, 테베트가 저지하고 대신 묶었다.
“디엘, 탑 안을 살펴봤어?”
“대충요. 연기가 심해 끝까지 올라가진 못했습니다.”
“혹시 붉은 머리의 기사가 안에 있었어?”
“기사요? 아뇨.”
디에리안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찾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게 물은 건 옆에서 신중히 매듭을 묶던 테베트였다.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예요. 절 도와줬던. 하지만…….”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디에리안이 휙 눈썹을 들었다.
“혹시 죽어 있었습니까?”
“어떻게 알았어?”
“그 인간이 전하를 여기로 납치했고요?”
“……조종당하는 것 같았어.”
하아, 그가 미간을 짚었다.
“그런 걸 수도에서도 봤습니다.”
“그런 거?”
“타툴란이 부리는 시체 인형이요.”
“…….”
여기 말고도 또 있었다니. 에슬린은 펜촉으로 그의 핵을 꿰뚫지 못한 걸 한 번 더 후회했다.
그때 단단한 팔이 뒤에서 어깨를 휘감아 왔다.
“걱정 말아요. 제가 반드시 죽여 버릴 테니까.”
테베트가 귓가에 속삭였다. 잠시 스산한 침묵이 감돌았다.
디에리안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전하, 그래서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전하?”
제롬이 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휙휙 얼굴을 돌려 대며 대화를 엿듣던 그는 그러나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디에리안이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제롬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이 걸림돌은 아까부터 뭡니까?”
벌레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