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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02화 (102/147)

102화

제롬은 갈팡질팡 흔들리는 눈으로 디에리안을 보았다.

“마법사님…… 왜 저 하녀를, 전하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디에리안은 그를 빤히 보다 입을 다물었다.

다그닥, 다그닥! 저 멀리 리페리우스 기사들이 땅을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제롬은 그 기척도 눈치채지 못하고 이번엔 테베트를 응시했다.

“가, 각하,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그러나 테베트 또한 에슬린의 머리 위에 턱을 얹으며 그저 고개만 기울일 뿐이었다.

왜 다들 입을 다무시는 거지?

제롬은 어쩐지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혀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넌…… 대체 누구냐?”

마지막으로 그가 에슬린을 향해 물었다.

구세주처럼 에슬린이 뭐라고 입을 여는 순간.

히이잉! 다급히 도착한 기사들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리페리우스의 문장을 단 열 명 남짓한 기사들이었다.

“제롬 경! 여기 계셨군요! 하녀는 찾았습니까?”

“엇, 각하도 이곳에!”

“불이 난 겁니까? 어우, 탄내!”

기사들이 제롬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엉거주춤 서 있는 제롬을 향해 폭풍처럼 말을 쏟아 냈다.

그중 한 명이 가만 서 있는 에슬린을 발견했다.

“어어? 밤새 찾아다니던 하녀가 저 하녀였습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죄인입니까? 체포하면 돼요?”

“조용, 조용히 좀 해 봐.”

제롬은 앓듯이 말했다. 기사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한밤중에 하녀를 찾으라고 세상이 망한 것처럼 다그쳐 댔으니, 기사들이 성급하게 구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었다.

“저 건방진 놈들의 목은 나중에 잘라 드리겠습니다.”

테베트가 귓가에 속삭였다. 에슬린은 농담 말라는 듯 그의 팔을 떼어 냈다.

그게 소소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어? 각하! 체포하면 되는 겁니까?”

그들은 테베트가 에슬린을 끌어안고 있던 게, 어떤 죄인의 포박 과정인 줄 알았음이 분명했다.

선두에 선 자가 검을 뽑아 들자, 그 뒤를 다른 기사들이 쫓았다.

잠깐, 그만…… 제롬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미쳤군.”

테베트가 중얼거렸다. 슥 시선을 돌리다 디에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이 상황을 이제 어쩔 거냐는 듯한 빈정거리는 낯이 꼴 보기 싫었다.

어쩔까?

그는 잠시 고민했다. 구구절절한 말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기사들을 한 번에 잠재우려면, 딱 한 발만 떼면 될 뿐이었다.

어차피 이곳으로 달려오며 줄곧 생각하던 일이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에슬린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포박하면 됩니까……?”

주변을 에워싼 기사들이 머뭇거렸다. 어쩐지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테베트는 다가오는 기사들을 막아서듯 몸을 움직였다.

에슬린 앞에 서자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 문득 가슴이 시큰해졌다.

살아 있는 에슬린이었다. 대지를 밟고 달빛을 맞으며 서 있는 그녀는 당당한 생의 증거였다.

그는 에슬린 앞에 몸을 낮추었다.

“전하.”

기사들이 크게 술렁였다.

에슬린의 신발 끝이 주춤 뒤로 움직였다.

그 광경마저도 그에겐 기쁨이었다.

“테베트 경?”

꺼져 가던 눈빛. 날숨마다 빠져나가던 생명. 싸늘하게 식어 가던 체온.

그 몸의 감촉을 테베트는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죽어 가던 몸을 붙잡고 테베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맹세했었다.

‘내가 선택한 건 에슬린 베르타니아 당신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지금이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살아 있는 당신에게, 앞으로도 살아 있을 당신에게.

비로소 완전한 맹세를 하게 되었는데.

“에슬린 베르타니아 전하, 당신의 귀환을 기쁘게 맞습니다.”

“대체, 무슨! 각하!”

기사들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그에겐 물론 들리지 않았다.

“리페리우스의 이름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달빛을 받은 하얀 얼굴이 테베트를 올곧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

테베트는 그대로 눈을 맞춘 채 에슬린의 한 손을 움켜쥐었다.

따뜻했다. 가는 손목으로부터 펄떡거리는 맥동이 느껴졌다. 살아있다는 감각. 사그라들던 그때완 다르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전 당신의 검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테베트가 리페리우스의 문양이 새겨진 검을 그녀의 발밑에 내려놓았다. 흰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제롬을 비롯한 기사들은 이제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베르타니아……? 화, 황녀……?”

“각하께서, 각하께서, 대체 무슨 소리를, 아니 왜?”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쐐기를 박은 건 무표정하게 서 있던 젊은 마법사였다.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전하.”

그는 테베트 뒤에서 무릎을 굽혔다. 그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을 것 같던 오만한 마법사의 몸이 간단하게 수그러들었다.

그러니까 대체 왜?

“마법사님……?”

제롬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주변을 살피다 문득 달빛을 받고 선 에슬린과 눈이 마주쳤다.

고요한 푸른 눈동자.

그는 그 얼굴을 홀린 듯 응시했다.

“…….”

깨달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아…….”

그렇구나.

기사든 마법사든…….

제가 섬길 주인을 찾아 돌아간 것뿐이구나.

제롬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혼란스럽던 것이 거짓말처럼 정돈되기 시작했다.

그건 강렬한 직감이자 이끌림이기도 했다. 눈앞의 인물이 주는,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에서 비롯한 강한 확신.

그제야 왜 테베트와 디에리안이 고개를 숙였는지 알 것 같았다.

숙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제롬 경!”

주변 기사들의 기함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제롬은 조금 얼떨떨했다. 하지만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릎이 땅에 닿았다.

“……제 주인이 섬기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망설일 이윤 없습니다.”

“…….”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기사들이 홀린 듯 앞을 바라보다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순간 바람이 불고 에슬린의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휘날렸다.

그 모습에 그들 모두, 한겨울에 피어난 라일락을 떠올렸다.

불가능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던, 그 강렬한 보라색을.

그들은 이미 기적을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어, 그래서였구나…….

철컥. 누군가 검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한 사람씩 차례로 검을 내려놓았다.

기사들이 몸을 낮추었다. 이상하리만치 거부감은 일지 않았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를 뵙습니다.”

짧은 도열이었다.

“…….”

에슬린은 그들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까맣게 그을린 탑을 올려다보았다. 탑에선 더 이상 그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달빛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어느새 테베트가 몸을 일으켜 에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눈을 맞추었다.

에슬린은 그제야 비로소 기나긴 밤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 * *

같은 시각, 검은 탑 지하.

“…….”

아서스 녹턴은 느리게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아악!”

시체. 시체의 산이었다.

그는 코를 틀어막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윽, 나는 뭘…….”

분명 로즈벨 하녀님과 함께 마차를 타고 돌아가던 길이었는데.

그 순간 머리를 강타하는 기억이 있었다.

‘아서스 경! 그만둬요!’

그는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부를 찌른 감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대체…… 무슨.”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한참을 괴로워하는데, 문득 상체 언저리가 뜨거웠다.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자, 그는 옷자락을 쥐어뜯었다. 불타는 듯한 느낌은 옷 앞주머니에서부터였다.

“이건, 뭐지?”

그가 뜨겁게 달아오른 돌을 손에 쥐었다. 가느다란 가죽끈이 달린…….

‘붉은 돌?’

아서스는 펠리서스를 목에 걸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아서스.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아서스의 눈빛이 다시 꺼멓게 가라앉았다.

아서스, 나의 인형.

그는 유령처럼 몸을 일으켰다.

시체를 밟고 빠르게 탑을 벗어났다. 검은 숲으로 몸을 숨겼다.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죽여. 죽여라. 이제 기회는 없어.

누굴 말입니까?

하녀를, 황녀를 죽여.

“…….”

아서스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였다. 웃음기 하나 머금지 않은 기사의 눈빛이 시리게 빛났다.

가장 괴로운 방법으로.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죽여.

죽여!

목소리가 전신을 지배했다.

* * *

말이 멈추었다.

테베트는 먼저 말에서 뛰어내린 뒤, 에슬린을 받아 들었다.

에슬린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서서 저택을 바라보았다.

리페리우스의 타운 하우스.

새벽 한중간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가주님.”

현관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나이 지긋한 여인이 빠르게 다가왔다.

테베트는 여인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의 모든 신경이 오직 에슬린을 부축하는 데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주님,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란 말입니까?”

여인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슬린은 고개를 기울였다. 테베트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주름 잡힌 눈이 에슬린을 훑었다. 그녀는 무생물 보듯 에슬린을 관찰했다.

“넌…… 그때 그 하녀구나.”

강인하고도 낮은 목소리가 말했다.

“가주님, 뭡니까, 이 여인은?”

“질문은 나중에 해.”

테베트는 그제야 사티나의 존재를 인지한 것 같았다. 그가 슥 고개를 돌렸다.

“목욕물과 식사, 침실을 준비해. 별채를 열고 시중들 하녀를 몇 명 들여라.”

“가주님!”

테베트는 빠르게 사티나를 지나쳤다. 계단에 발을 얹으며 에슬린이 물었다.

“누구죠?”

“타운 하우스의 집사입니다.”

“……레밀턴 가문의 사람인가요?”

“그래요. 더 말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당신 안색이 점점…….”

테베트가 거칠게 혀를 찼다.

디에리안은 몇몇 기사들과 탑에 남아 뒷정리를 하는 중이었다.

에슬린도 남고 싶었지만, 실시간으로 나빠지는 낯빛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테베트는 그 즉시 말을 달려 타운 하우스로 귀환했다.

“가주님!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사티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하아. 테베트가 긴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사티나, 오늘은 날 더 건드리지 마.”

“하지만……!”

사티나가 참지 못하고 계단을 오르려 했다. 그때 무언가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사티나 님.”

“제롬 경?”

젊은 기사는 가볍게 웃고 있었다. 검집을 잡고 뻗은 팔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밤이 늦었습니다. 그만 주무시지요.”

“…….”

날카로운 눈빛이 계단 위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결국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며 에슬린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티나에 대해 더 묻고 싶었다. 순수한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조금 쉬어야 했다.

계단이 몹시 울렁거렸다. 몸 상태는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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