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정신 차리자.’
에슬린이 고개를 털었다.
테베트가 옆에서 그녀의 호흡 하나까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에게 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이네요, 이곳.”
에슬린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기억납니까? 몇 번 오진 않았을 텐데요.”
“당연히 기억해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올 때마다 경께서 얼마나 인상을 구겨 댔는지.”
테베트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당신이 매번 호위 하나만 덜렁 달고 나오는데, 어떻게 인상을 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호위 기사를 무시하지 말아요…….”
“뭐 이젠 됐습니다. 제가 당신 곁을 지킬 거니까. 잘 생각해 봐요. 성가신 측근들을 다 자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일 겁니다.”
“나 참. 매번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에슬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시야가 크게 뒤집힌 탓이었다.
“에시?”
“잠시만요. 어지러워서.”
테베트가 안 되겠다는 듯 에슬린을 안아 들려 했다. 그녀를 지지하던 손이 잠시 멀어졌다.
그 찰나의 순간, 에슬린의 몸이 형편없이 허물어졌다.
“에시? 에시!”
테베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정말 왜 이러지?
귀에 물이라도 들어찬 듯 그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각하?”
“사람, 사람을 불러와!”
“예, 예!”
“제발, 제발. 정신 차려요.”
흐려지는 시야 속 테베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또다시 저 때문에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 테베트 경. 이건 그런 게 아니에요.
하지만 진흙에 발이 빠진 사람처럼 자꾸만 몸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다.
잠시만 쉬고, 다시.
“에시!”
목소리가 막막하게 멀어졌다.
* * *
‘에시?’
탁. 테베트가 편지를 내려놓았다.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던 에슬린 베르타니아는 눈만 들어 그를 보았다. 겨울 포도를 보러 오라며 그에게 건넸던 편지였다.
‘에슬린이라고 적은 건데요.’
‘일부러 이렇게 적은 게 아니란 말입니까?’
에슬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일부러 그렇게 적어요? 아까부터 말했지만, 잉크가 모자랐나 보죠.’
《-그때 못 보여 준 겨울 포도를 대접할게요. 에슬린 베르타니아.》
이름을 휘갈긴 부분이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테베트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흠.’
‘뭐, 의식하고 보니 그렇게 보이긴 하네요.’
에슬린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가 편지를 짚었던 검지를 떼어 냈다. 올려다보자, 어쩐지 만족스러운 미소가 에슬린을 향해 있었다.
‘그럼, 이 애칭을 아는 건 나뿐이라는 거군요.’
‘그러니까 애초에 애칭이 아니라니까요?’
‘그런 걸로 하죠.’
인심 쓰는 듯한 저 말투는 뭐지? 에슬린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테베트가 툭툭, 잉크병을 두드렸다.
‘잉크는 빨리 새로 사는 게 좋겠습니다.’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죠?’
‘에시.’
남자가 팔을 짚어 몸을 기울였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입술이 눈앞에서 움직였다.
‘그 애칭을 아는 건 나뿐이어야 하니까요.’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는 손이 있었다. 검으로 인해 굳은살이 박인 손은 아주 부드럽고, 또 따뜻했다.
누구지? 누가 이렇게 애타는 손길로 쓰다듬는 거지?
“에시.”
아.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 이름을 이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는 이는 어차피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이었다.
에슬린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저를 쓰다듬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테베트를 응시했다. 며칠 새에 얼마나 고생을 한 건지 그의 낯빛이 까맣게 죽어 있었다.
“정신이 들어요?”
“……테베트 경.”
에슬린이 작게 입을 열었다.
테베트가 참지 못하고 침대 한쪽에 고개를 묻었다.
“하아. 다행입니다. 전, 또…… 또다시 당신을 잃을까 봐…….”
넓고도 단단한 어깨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크게 움직였다.
“잉크는…….”
에슬린이 머나먼 것을 보듯 희미하게 말했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모자라게 두지 않았어요.”
테베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눈동자가 아직 잠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곧 에슬린이 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깨달았다.
그건 테베트에게도 전생처럼 느껴지는 아득한 기억이었다.
“실수로라도 다른 사람이 그 이름을 부를까 봐.”
“에시.”
“그렇게 당신이 나를 부를 때마다.”
에슬린의 마른 입술이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테베트의 뺨을 감싸 쥐었다.
“나는 황녀도 그 누구도 아닌, 아주 새로운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어요.”
고작해야 몇 음절에 불과한 의미 없는 글자의 조합.
이름이란 그런 것일 뿐인데.
왜 그것마저 당신이 부르면 특별해지고 마는 걸까?
내 세계를 다른 식으로 정의해 버리는 그 성급함과 무엄함이, 왜 내겐 위로가 되었던 거지?
에슬린은 검지를 움직여 그의 볼을 쓸었다. 낯선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그를 만져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게 좋았거든요.”
“…….”
“그래서 당신을 좋아했나 봐요.”
툭. 에슬린의 손이 기운을 잃고 떨어졌다.
그의 표정을 더 살피고 싶었지만, 다시 잠이 몰아닥쳤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더 자요. 다시 눈뜨면, 질릴 때까지 불러 줄 테니까.”
이마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그가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소중한 나의…….”
정신이 까맣게 물들었다.
뭐라고 덧붙인 걸까? 아, 몰아닥치는 수마만 아니었다면.
하지만 사실은, 끝까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그건 처음부터 테베트에게 준 이름이었으니까.
* * *
다시 눈을 떴을 땐, 한밤중이었다.
에슬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꺼운 이불이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위는 고요했고,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잔 거지?’
에슬린은 가볍게 목을 움직였다. 팔에 감긴 붕대를 살피고, 몸을 일으켰다.
드문드문 의원과 디에리안을 만난 기억이 났다.
‘흑마력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 있었어요. 아무래도…… 탑에서의 시간이 제 생각보다 더 길었던 모양입니다.’
디에리안은 빠르게 에슬린의 독기를 정화했다. 나머지는 부족한 체력을 보충하는 시간이었다.
며칠 푹 잔 덕분인지 몸이 가뿐했다.
에슬린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벽난로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제외하고는 온통 캄캄했다.
그녀는 손에 집히는 램프에 대충 불을 붙였다. 주변이 좀 밝아졌다.
“무슨 화로를 이렇게나…….”
에슬린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부가 좀 심하게 덥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를 제외하고도 온갖 곳에 화로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사람을 불러 화로를 치우게 하려다가, 곧 지금이 새벽녘임을 인지했다.
공기가 답답했다. 잠시 고민하다 소파에 놓인 숄을 걸치고, 침실을 나섰다.
“…….”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찬 공기를 맞자, 몽롱했던 정신이 완전히 돌아왔다.
리페리우스 타운 하우스는 북부 공작저와 내부가 거의 비슷했다.
구조나 배치, 장식과 세공, 자수 같은 디테일한 것들이…….
그래서 낯설지 않았다. 복도에 걸린 커튼을 보던 그녀가 빙긋 웃었다.
‘이 커튼을 바꾸던 게 어제 같은데.’
에슬린은 커튼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이 겨울이 끝나면, 이곳 또한 북부 공작저처럼 대청소를 하겠지. 하녀들은 아주 바쁜 때를 보낼 거고…….
그녀의 얼굴이 추억에 젖어 들었다.
그때 넓은 복도에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걸음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대뜸 허리를 잡혔다.
“절 놀라게 하는 건 이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귓가에 정돈되지 못한 숨이 떨어졌다. 단단한 품이 느껴졌다.
“테베트 경.”
에슬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테베트가 에슬린 손에 든 램프를 받아 빈 벽에 걸었다.
눈은 에슬린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몸 상태는 좀 어때요?”
“보다시피 아무렇지도 않아요. 안이 좀 답답해서 걸었어요.”
에슬린은 입술을 올려 웃었다.
그에게서 희미한 물과 향료의 냄새가 났다. 이제야 비로소 씻고 온 것 같았다.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비웠으니. 그가 놀라 달려올 만도 했다.
물론 테베트는 에슬린을 탓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잘했어요.”
그가 못마땅한 건 에슬린의 옷차림 하나뿐인 것 같았다. 그녀에게 가까이 밀착한 뒤 에슬린의 옷깃을 단단히 여며 주었다.
“춥지 않습니까?”
“안 추워요.”
침실에 산더미같이 쌓여 있던 화로가 떠올랐다. 에슬린이 참지 못하고 콧잔등을 구기며 웃어 버렸다.
“그 화로 무덤 같은 곳에서 나오니 솔직히 살 것 같은데요.”
“코가 빨간데.”
“그래요?”
에슬린은 대수롭지 않게 코를 만지작거렸다.
그때 테베트가 별안간 그 손을 잡아 내렸다. 양 뺨을 쥐고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코끝에 가볍게 키스했다.
“이거 봐요. 빨갛잖아.”
그는 얼굴을 물리며 소년처럼 웃었다.
“……허.”
에슬린은 조금 멍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뺨을 쓸었다.
그의 까만 머리카락 끝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매달린 물방울이 아슬아슬해 보였다. 에슬린은 자기도 모르게 그 물방울에 시선을 빼앗겼다.
똑. 그것이 추락했을 때, 예고도 없이 검은 짐승에게 잡아먹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