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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04화 (104/147)

104화

“깜……짝이야.”

“왜요. 제가 당신을 잡아먹는 줄 알았습니까?”

테베트가 소리 내 웃었다. 순식간에 온몸에서 긴장이 탁 풀렸다.

그가 겉옷을 벗어 에슬린에게 둘러 주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소스라치다니.

에슬린은 조금 민망해 괜히 코를 울렸다.

“좀 걷죠.”

테베트가 에슬린의 손을 잡았다. 둘은 별채 밖으로 나왔다.

날이 풀린 탓인지, 아니면 그의 옷이 따뜻해서인지 어쩐지 하나도 춥지 않았다.

둘은 작은 정원을 걸었다.

모양이 작아진 달이 앞길을 어슴푸레하게 비춰 주었다.

“예쁜 분수네요.”

에슬린이 정원 중앙에 놓인 분수대를 보며 말했다.

겨울이라 물이 흐르진 않았지만, 장인이 정성껏 조각한 분수는 달빛을 받아 더욱 오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에슬린은 그 주변을 돌며 그것을 감상했다.

“이리 와요.”

어느 정도 구경이 끝나자 테베트가 분수대에 에슬린을 들어 앉혀 주었다. 턱이 높아 발이 붕 떴다.

“귀한 거 아닌가요? 막 앉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에슬린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테베트는 그 정돈 아니라며 웃었다.

물론 이 분수가 천 년쯤 전, 아주 유명한 어떤 장인이 수십 년을 공들여 완성한 리페리우스의 유산 중 하나라고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테베트 경과 눈높이가 맞다니 신기해요.”

이 웃음보다야 귀할까.

테베트는 비로소 이 분수대의 쓸모를 발견한 것 같아 뿌듯해졌다.

간간이 부는 바람을 막을 겸 에슬린 앞에 섰다. 가까운 곳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에시.”

“네.”

테베트가 어울리지 않게 잠시 말을 망설였다. 그녀의 옷깃을 정리해 주며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미안해요.”

에슬린의 미간이 구겨졌다.

“왜 자꾸 사과하는 거예요?”

“그냥…… 미안해요.”

에슬린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 보니 그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모든 행동은 아주 다정했지만, 왠지 모를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왜……”

“제가 당신에게 상처를 내지 않았습니까.”

“아.”

그가 에슬린의 목 옆을 감쌌다.

이제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그곳을, 테베트는 정확하게 짚어 냈다.

“기억을 핑계로 당신에게 했던 내 모든 행동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

에슬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여전히 레비브 산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레비브에서, 롭시온에서. 에슬린을 할퀴었던 그 시간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날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 눈빛이 바뀌었다. 굶주린 짐승의 날것 같은 눈빛.

“떠나라는 말은 하지 말아요. 전 절대 당신을 떠나진 않을 거니까.”

위험하게 일렁이는 그 눈동자에 에슬린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러니 그것도 미안해요.”

그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에슬린은 그제야 저를 가두듯 뻗어 나온 두 팔에 시선이 갔다.

“…….”

헛웃음이 흘렀다.

테베트는 금방이라도 에슬린이 그를 뿌리치고 달아날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정말 늘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에슬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섰다.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폭발시킬 것 같은 모습이었다.

“테베트 경.”

에슬린이 손을 뻗었다. 맹수를 진정시키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

강인한 목이 빳빳하게 굳었다.

에슬린은 그 목을 한 아름 끌어안았다. 그의 상체가 엉거주춤 구부러져 에슬린의 품에 쏟아졌다.

무슨 말이 그에게 위로가 될까?

괜찮다는 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

사실 에슬린은 알고 있었다.

그 어떤 말도 진짜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는 걸.

“디에리안이 준 물약을 마셨어요?”

에슬린이 물었다.

테베트는 잠시 할 말을 잊은 듯했다. 퉁. 퉁. 그의 묵직한 맥박이 팔로부터 전해졌다.

“아뇨.”

“왜요? 끝까지 마시지 않으려고 했나요?”

그녀가 귓가에 속삭였다.

“……마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

“기억이 있든 없든, 어차피 당신에게 가려고 했으니까.”

“그럼, 기억은 어디까지 돌아왔죠?”

“웬만한 기억은 모두. 혼란스러운 부분은 있지만.”

그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중요한 건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 그 말도?”

에슬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녀는 말하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제가 좋아한다고 했던…….”

“물론입니다.”

확, 몸이 떨어졌다. 갑작스레 한기가 몰아닥쳤다. 에슬린은 놀라 눈만 끔뻑였다.

테베트가 다시 양팔을 분수대 위에 짚었다. 그의 구두코가 분수대 밑동에 붙었다. 몸이 한껏 밀착했다.

“‘제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으니까.’”

그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녀의 말을 읊었다.

“어떻게 잊습니까?”

잊을 리 없었다.

그게 거짓이라면, 꿈이라면. 테베트는 여기 이렇게 살아 있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럼 그 말만 기억해요. 그럼 안 되나요?”

에슬린이 속삭였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에게서 피식 웃음이 흘렀다.

“아, 생각해 보니 애초에 그건 당신이 잃은 기억도 아니군요.”

가벼운 어조였다. 하지만 테베트는 하나도 웃을 수 없었다.

그때 그 마음을 길가 돌멩이보다 하찮게 여기던 게, 다름 아닌 저 자신이었다.

‘날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역시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이 우스운 역할 놀이에 필요한 대사였나 보지?’

아, 제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그 혀를 뽑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결국 테베트가 할 수 있는 건 용서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날 용서해요, 에시.”

“으음…….”

에슬린은 곤란한 듯 볼을 긁었다.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본의 아니게 안 좋은 기억만 떠올리게 해 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꼬인 상황을 풀 땐 뭐든 정공법이 잘 먹히는 법이다.

“좋아해요, 테베트 경.”

테베트의 표정이 굳었다.

“그 모든 일이 있어도. 여전히.”

“…….”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겨울바람이 불어와 주변 나무를 흔들었다.

에슬린의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실처럼 가닥가닥 흩날렸다. 그녀는 손을 들어 볼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그러니 더는 사과하지 말아요. 다 용서할 테니까.”

“……당신은.”

테베트가 푹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너무 너그러워요.”

그 말에 에슬린은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나 그러진 않아요.”

“정말…….”

까득. 테베트가 분수대 표면을 긁으며 주먹을 쥐었다. 그의 눈빛이 묘한 빛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정말 다 용서하는 겁니까?”

“그래요.”

“…….”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테베트는 에슬린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에슬린은 한쪽으로 머리를 붙들고 있어 차마 그를 피하지 못했다.

불현듯 입술에 낯선 감촉이 닿았다.

부드럽고, 말랑거리고, 몹시 생소한…….

“이것도?”

“……뭐.”

에슬린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테베트가 낮은 숨을 흘리며 눈꺼풀을 들었다. 꿰뚫을 듯한 시선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목뒤부터 등허리까지 알 수 없는 소름이 내달렸다.

그가 이마를 마주 댄 채 속삭였다.

“지금부터 당신 허락 없이 한 번 더 입 맞출 건데.”

초조한 시선이 에슬린의 입술을 응시한다.

“그냥 이건 용서하지 말아요.”

그는 해일처럼 파고들었다.

뜨거운 호흡이 얽혔다. 부드러운 것이 깊은 곳을 헤집는 감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의 턱이 기울었다.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에슬린의 손에서 힘이 탁 풀렸다. 앉아 있지 않았다면 아마 다리가 풀렸을지도 몰랐다. 뒤통수가 엉망으로 헤집어졌다.

생소한 감각이 깨어났다. 모든 것은 말 그대로, 난생처음 느껴 보는 것들이었다.

어딘가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건 때론 부드럽게, 때론 아주 거칠게 그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모든 숨결도 탄성도, 어디론가 급격하게 빨려 들어갔다.

에슬린은 갑자기 두려워지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그러자 번들거리는 검은 동공과 눈이 마주쳤다. 소름이 온몸을 내달렸다.

그가 다정히 눈을 휘어 웃었다. 왼쪽 눈물점이 보란 듯이 눈매를 따라 움직였다. 맞닿은 입술이 간지러운 호선을 그렸다.

테베트는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저절로 다시 두 눈이 감겼다. 코와 양 볼, 이마, 턱, 목. 모든 곳에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그 다정함도 잠시, 그는 또다시 태풍이 되어 에슬린을 몰아붙였다.

아, 그러니까 그건 정말…….

영원히 용서하고 싶지 않은 충격이었다.

* * *

수일이 흘렀다.

에슬린은 리페리우스 공작저의 가장 은밀한 곳에서 천천히 몸을 회복했다.

솔직히 진작 체력은 회복했지만, 테베트의 걱정(을 가장한 과보호) 탓에 얌전히 더 쉴 수밖에 없었다.

에슬린은 타운 하우스 별채에 머물렀다. 작은 정원이 딸린 이 건물은 오직 에슬린만을 위해 움직였다.

그녀의 정체를 아는 기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사용인 몇이 시중을 들었다. 입단속을 철저히 당부받은 듯한 그들은 군더더기 없이 아주 깔끔하게 에슬린을 보살폈다.

사실 대부분의 시중은 테베트가 자처했기에, 그렇게 많은 일손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근데, 디엘은요?”

에슬린이 물로 입술을 축이며 물었다.

테베트가 먹기 좋게 자른 스테이크 접시를 에슬린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며칠이 지났는데. 왜 안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어디 갔죠?”

제 몸에 쌓인 독기를 정화하던 모습까지는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어쩐지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테베트가 와인 잔을 들었다.

“딱히 식사에 어울리는 화제는 아니군요.”

대놓고 말을 돌리는 모습에 에슬린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식사에 어울리는 화제는 뭔데요?”

“글쎄.”

그가 제 앞에 놓인 접시를 성의 없이 뒤적거렸다.

“이 소스의 풍미나 부드러운 빵의 식감 같은…… 뭐 그런 거나 얘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에슬린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디엘이 빵이나 소스보다 못하다는 말인가요?”

농담이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상대에게선 아무런 대꾸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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