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에슬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디에리안은 모습을 안 드러내는 게 아니라, 못 드러내는 것이었다.
“빨리 디엘을 불러와요. 식사를 마치면 할 얘기가 있으니까.”
“제게 하면 전해 주겠습니다.”
“테베트 경.”
탁. 에슬린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테베트의 시선은 오직 그 포크 끝에 가 박혀 있었다. 음식의 흔적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은 그 식기가 아주아주 불쾌했다.
“지금 유치한 거 알죠?”
“네.”
그는 치즈가 녹아들어 간 조개를 들어 하나씩 살을 발라냈다. 그대로 에슬린 접시에 옮겨 담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그게 뭐가 문제죠?”
“…….”
하, 에슬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탓하는 듯한 시선이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알겠어요. 그만 노려보고 먹어요.”
그는 행여라도 에슬린이 식욕을 잃진 않을까 오직 그것만이 걱정이었다.
“아마…… 곧일 테니까.”
“뭐가요?”
테베트가 입술을 움직일 때였다.
쾅! 저 멀리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뭐죠?”
에슬린이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테베트는 쯧 혀를 차곤 그녀에게 다가가 다시 앉혀 주었다.
벌컥, 식당 문이 열렸다. 제롬이었다.
“각하! 누군가가 저택 담벼락을 뚫었습니다……!”
“…….”
에슬린이 질린 듯한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테베트는 천연덕스럽게 눈썹을 움직였다.
“말했죠? 곧이라고.”
그러면서도 그는 속으로 온갖 욕을 삼키고 있었다.
정말, 얌전히 밥 먹을 시간도 주지 않는군.
물론 에슬린과 며칠 동안 함께, 얌전히, 무수히 많은 밥을 먹었지만, 그에겐 이미 휘발된 지 오래였다.
“하여튼 당신 측근들 목은 반드시 한 번쯤 비틀어야겠습니다.”
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에슬린의 시선이 내리꽂혔다.
테베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양 웃으며 대꾸했다.
“당연히 농담입니다.”
“하아, 테베트 경…….”
에슬린이 이마를 짚었다.
보아하니, 질투에 미친 남자가 제 마법사를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그저 좋다고 테베트와 이곳에서…….
“당장 디에리안을 데려와요.”
“물론입니다. 당신이 그 접시를 비우면요.”
테베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에슬린의 접시를 턱짓했다.
“그때까지 마법사는 응접실에 잘 가둬…… 잡아 둘 테니 천천히 먹어요.”
말을 고친 의미가 있나?
에슬린은 한숨을 삼키며 다시 식기를 쥐었다.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디에리안은 미친 듯이 폭주하고 있었다.
“날……! 날! 이렇게 홀대하다니! 저택 밖에 조악한 결계를 쳐 두면 내가 못 들어올 줄 알았습니까!”
“들어왔잖아.”
테베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응접실 안에 있는 디에리안은 마치 세상 풍파를 혼자 다 견뎌 낸 사람처럼 보였다.
“며칠 동안 밖에서 얼마나 고생을…… 춥고, 배고프고, 서럽고…….”
좋게 말해 풍파지, 사실 그냥 거지꼴이라는 소리였다.
“전하!”
응접실 안으로 에슬린이 들어서자, 그가 와다다 달려왔다.
“너…… 고생 많았구나.”
잔뜩 헝클어진 머리가 솔직히 조금 웃겼다.
에슬린은 웃음을 참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테베트의 눈썹이 비쭉 올라갔다.
“이 추위에 나뭇잎을 이불 삼아 자는 게 얼마나, 얼마나 힘든 건지 아십니까!”
주변에 여관 놔두고 왜……?
에슬린은 그러나 그 말까진 내뱉지 않았다.
디에리안이 아주 서러운 얼굴로 소파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어쨌든 그는 아주 고생한 얼굴이었다.
휙, 그가 고개를 들었다.
“전하, 잘 생각해 보십시오.”
“뭘?”
“이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저 각하는 다시 뱅글 돌아 버렸어요. 아무리 예전에 잠깐, 아주아주 잠깐 손을 잡았기로서니…… 절 이렇게 대해도 되는 겁니까? 힘없는 서민은 서러워서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디에리안은 힘이 없지도 않고, 하물며 서민도 아니었다.
에슬린은 그러나 그 말 또한 애써 삼켰다.
테베트가 툭 테이블을 밀었다. 그가 정강이를 맞지 않도록 두 다리를 빠르게 소파 위로 올렸다.
“정신 사납게 좀 굴지 마.”
디에리안은 테베트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내 물약 덕분에 기억을 찾은 주제에. 고맙다는 말을 참 정성 들여서 하십니다?”
“마시지도 않은 물약을 가지고 왜 감사 인사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물약을 안 마셨어요?”
디에리안이 벌떡 일어섰다. 테베트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럼 여전히 기억이……?”
“글쎄. 어떨까.”
마법사가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젠장…… 리페리우스에 빚을 지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됐고, 네 그 유리보다 연약한 보호 마법이나 더 연구해. 주인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마법이 무슨 쓸모인지 모르겠군. 이번 건 그 벌이야.”
“벌? 하!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죠? 애초에 각하 그쪽이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되는 일 아니었습니까?”
“왜 내 기억 탓을 하지?”
“그럼 왜 내 마법 탓을 하죠?”
“시끄러우니까 둘 다 그만 좀 할래요?”
보다 못한 에슬린이 나서자 두 사람이 합, 입을 다물었다.
디에리안이 소파에 다시 앉았다. 테베트가 힘주어 테이블을 밀자 소파가 일순 균형을 잃었다.
“어억.”
그는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 모습이 스스로 분한 듯 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싹 마른 손바닥에 푸른 마력이 감돌았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테베트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오늘 결판을 내야겠습니다.”
“지금까지 듣던 중 제일 괜찮은 말이군.”
“아, 정말. 그만들 좀 싸워요!”
폭발한 건 에슬린이었다.
둘이 이렇게까지 앙숙이었나?
그러나 이전에 딱히 둘 간의 접점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상대도 안 했던 것 같은데…….
‘친해진 건지, 사이가 나빠진 건지.’
에슬린은 속으로 쯧, 혀를 찼다. 어쨌든 제 정신이 사나워진 것만은 분명했다.
“디엘은 저기, 당신은 저기. 떨어져 앉아요!”
에슬린이 아주 먼 자리를 각각 가리키며 말했다.
디에리안은 얌전히 그 지시를 따랐지만, 역시 가장 복병은 테베트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는 에슬린 옆에 더욱 바싹 붙어 앉았다.
“……가증스럽긴.”
디에리안이 중얼거렸다. 테베트의 눈이 그를 향해 굴렀다. 마법사는 흠칫 몸을 떨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하녀가 트롤리를 밀며 들어왔다. 향긋한 찻잔이 각각 놓이자 상황은 어쨌든 일단락되었다.
세 사람은 타툴란의 탑에 대해 간략히 정보를 나눴다.
“탑을 조사해 나온 자료들은 따로 모아 두었습니다.”
디에리안은 차를 마시며 건조하게 말했다.
“좋네. 나한테 보내 줘.”
“그러겠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타툴란이 저쪽에 갇혀 있다는 건데.”
달칵. 잔을 내려놓는 그의 손이 조금 떨렸다.
표정을 보니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저 짜증이 치밀어서인 듯했다.
“솔직히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잖습니까? 영원히 거기에 갇혀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거기서 무슨 힘을 흡수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게다가.”
달그락. 이번에 찻잔을 내려놓은 건 테베트였다.
“어쨌든 지금 성배를 쥐고 있는 건 그 빌어먹을 마법사라는 소리군.”
“맞습니다.”
디에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에슬린은 제 손에 쥔 잔을 내려다보았다. 연녹색 표면이 희미하게 물결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건 바꿔 말하면…… 타툴란을 잡으면 성배도 손에 들어온다는 말 아닌가?”
“…….”
실내엔 짧은 침묵이 흘렀다.
디에리안이 몸을 움직여 제 찻물에 꿀을 더했다. 보기만 해도 혀가 아릴 정도의 양이었다.
“그럼 관건은 다음 마물 포털일 겁니다, 전하.”
“다음 포털?”
꿀 덩어리를 머금으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전에선 아직 아무런 예측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적갈색 눈동자가 테베트를 향해 굴렀다.
“그래.”
흐음. 디에리안이 잠시 제 턱을 매만졌다.
꿀꺽, 꿀꺽. 찻물을 단숨에 들이켠 그가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전 신전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가서 다음 포털이 어디에서, 어느 정도 규모로 열릴지 알아봐야겠어요.”
“지금 돌아간다고?”
에슬린도 덩달아 찻잔을 내려놓았다.
“네. 아마 높은 확률로 거기에 타툴란이 나타날 테니까요.”
“…….”
그렇구나.
에슬린의 푸른 눈동자가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타툴란은 기를 쓰고 이곳에 돌아오려 할 것이다.
그러려면 이 땅에 불규칙적으로 나타나는 포털을 이용하는 방법이 최선일 터다. 아니면 타툴란이 스스로 포털을 만들 수도 있겠고…… 어찌 됐건.
‘다음 포털에 얼마나 잘 대비하느냐.’
이제 관건은 그것이었다.
“그럼 그다음은……”
“제게 맡기면 되겠군요.”
얌전히 있던 테베트가 불쑥 끼어들었다.
에슬린은 그를 돌아보았다.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디에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그다음은 전하 옆에 앉아 있는 충견…… 큼. 실례. 충신에게 맡기면 될 겁니다.”
“…….”
에슬린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 반응이 의외라는 듯 디에리안이 눈썹을 기울였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죠? 당연한 거 아닙니까? 피에 미친 공작님께서 마물 베듯 타툴란을 쓱싹 베고, 성배를 찾아와야죠. 어때요, 각하? 참 쉽죠?”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그럼 난……”
“좋군.”
테베트가 다리를 꼬며 말했다. 기사와 마법사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기뻐해, 마법사. 네 목을 그대로 둘 이유가 드디어 생겼으니까.”
“제 목은 원래부터 그대로 둬야 하는 소중하고 값진 보물인데요.”
“처음 듣는 소리군.”
디에리안이 꾸물꾸물 손을 움직였다.
“그만 싸워요.”
에슬린이 다시 중재에 나섰다.
“두고 봐요. 반드시 저주하는 데 성공하고 말 겁니다, 반드시…….”
디에리안은 알 수 없는 주문을 읊조리며 응접실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자 저절로 피로감이 몰아닥쳤다.
긴 한숨을 내쉰 에슬린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저 또한 움직일 때였다.
“난 그러면……”
“에시.”
테베트가 다급히 에슬린을 붙들었다.
“…….”
그녀는 물끄러미 테베트를 응시했다.
또다. 또 그가 에슬린의 말을 잘랐다.
남자는 그림처럼 웃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 일렁이는 위화감을 에슬린이 놓칠 리 없었다.
그를 보는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신은 그냥 여기 가만히 있는 게 좋겠습니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베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니면 북부 공작저에 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좋겠군요. 아직은 조금 추우니 날이 풀리면……”
“테베트 경, 내 착각이라면 미안하지만.”
에슬린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의 엄지가 에슬린의 귓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경께서 날 왠지 이 일에서 배제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손짓이 순간 제 리듬을 잃었다가 이어졌다. 아주 찰나였지만, 에슬린은 알 수 있었다.
“……설마요.”
거봐, 대답도 늦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