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에슬린의 표정이 알 수 없게 굳어졌다.
테베트는 평정을 가장한 채 말을 이었다.
“에시, 그런 게 아닙니다. 당신이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걸 말하는 것뿐이에요.”
“…….”
“당신의 손발이 여기 있지 않습니까. 나도, 저 마법사 놈도. 그러니 명령만 하면 됩니다.”
에슬린은 볼을 감싼 손을 털어 냈다.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테베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지워졌다.
“난 황궁으로 돌아갈 거예요.”
“에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제가 싫다고 말하면?”
“뭐라고요?”
그가 재차 다가왔다. 속박 같은 눈빛이 그녀를 강하게 파고들었다.
에슬린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다 몇 가닥을 손에 쥐었다. 감촉 좋은 연보랏빛이 비단처럼 느껴졌다.
그가 그 끝에 입술을 댔다.
“……당신을 이곳에 붙잡고, 여기에만 머물러 달라고 애원하면?”
“그렇게 말할 건가요?”
에슬린은 똑바로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는 짙푸른 눈동자는 그저 깊고, 고요할 뿐이었다.
“황궁엔 카르단이 있어요. 1황자가 이대로 황태자가 되는 꼴을 제가 손 놓고 봐야 하나요?”
“…….”
스르륵. 테베트가 에슬린의 머리카락을 내려놓았다.
그는 입술을 끌어 올렸다.
“당연히.”
잠시 간격을 두고 덧붙였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에시.”
에슬린의 어깨가 푹 가라앉았다.
테베트는 그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매끄러운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제가 실언했어요. 기분 상했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아요.”
“그러죠.”
테베트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서 당신 계획이 뭔지 말해 봐요.”
테베트는 제 눈빛을 잘 갈무리하려고 애썼다.
그러지 않으면 이 지저분한 진심이 함부로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제 품에 안은 에슬린을 내려다보았다.
‘평생 이렇게 있어 주면 여한이 없을텐데.’
베르타니아도, 리페리우스도 다 잊고. 그냥 이렇게 둘이서만.
음침하긴.
그는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어쩔 수 없는 진심이었다.
“……내 말 듣고 있어요? 테베트 경?”
말이 없는 그가 의아했던지 에슬린이 그를 바라보았다. 테베트는 보란 듯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뭐든 좋으니 그 계획에 제가 있으면 좋겠군요.”
“무슨 당연한 말을…….”
에슬린이 피식 웃었다.
테베트는 그 입술 끝에 입을 맞추었다. 따뜻한 감촉이 닿으니 시커먼 마음들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우선은 황자비궁으로 돌아가서 황자비를 만나야 해요.”
“레실리아 베르타니아를?”
에슬린이 비스듬히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쾅쾅! 거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테베트가 눈썹을 찌푸렸다. 노크와 거의 차이를 두지 않고, 벌컥 문이 열렸다.
“각하!”
다급히 들어온 건 제롬이었다.
“무슨 일이지?”
“황궁에서 급보입니다!”
“급보?”
에슬린이 홱 고개를 들었다.
리페리우스 공작저에 오는 급보의 종류는 거의 한 가지였다.
‘설마 마물 포털이 벌써?’
안 된다. 아직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다. 에슬린의 손끝이 급격히 차가워졌다.
하지만 제롬이 쏟아 낸 건 전혀 다른 소리였다.
“황, 황제 폐하께서 다시 쓰러지셨습니다.”
“뭐?”
에슬린은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황제가 왜?
연회 이후, 잠시 앓고 난 황제는 거짓말처럼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일각에서는 그가 곧 다시 예전과 같은 기세로 황궁을 이끌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황제가 골골댄 게 하루 이틀은 아니지 않나?”
테베트가 냉정하게 물었다. 제롬이 방방 발을 굴렀다.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그의 시선이 에슬린을 향해 굴러왔다.
“이를 들으신 황후 폐하께서.”
에슬린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졌다.
“1황자 전하를 황태자로 삼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뭐라고?”
“최대한 빠르게 황태자 임명식을 끝내라는 명까지 내리시는 바람에…….”
에슬린은 길게 눈을 감았다.
“지금 황궁 전체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와르르,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중간까지 꼼꼼히 다져 놓은 모래성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결국 모든 게 파도 한 번에 무너질 흙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단 말인가?
다시 눈을 뜬 그녀는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로즈벨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느냐?”
레실리아는 읽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가벼운 침의 차림이었다.
밤이 늦었음에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황자비의 불면증은 이 궁에선 유명한 것이었다.
“네, 전하.”
“무슨 사고라도 생긴 게 아닌지 걱정이구나.”
메리사가 희미하게 웃었다.
“사람을 보내 찾아보라고 했으니, 너무 심려 마세요.”
“사람?”
“수석 하녀가 직접 찾으러 가겠다더라고요.”
“그래?”
메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의외죠. 못되게 굴어도 나름의 책임감은 있는 애였나 봐요.”
휴가를 받아 궁 밖에 나간 하녀가 행방불명되었다.
레실리아의 명에 따라 이 일은 외부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하녀들 사이에 퍼지는 소문까지는 막지 못했다.
결국 세피아라는 수석 하녀가 에슬린을 찾아오겠다고 나섰다.
내심 걱정이 컸던 메리사는 냉큼 세피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로즈벨이 그럴 애가 아닌데.’
걱정이 되지 않을 리 없었다.
레실리아 또한 은근히 신경 쓰는 눈치였다.
“근데 한밤중에 웬 와인이세요?”
“에르단 황자께서 보내셨거든.”
“또요?”
레실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에르단은 종종 귀한 벨레인산 와인을 레실리아에게 보내곤 했다.
그 라벨을 손으로 쓸던 레실리아가 문득 메리사를 바라보았다.
그때 밖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시종 하나가 들어왔다.
“전하, 1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뭐?”
메리사가 벌떡 일어났다. 레실리아 또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밤중에?”
“예? 예에…….”
시종이 말꼬리를 흐리며 눈을 끔벅였다.
레실리아는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리를 정리했다.
남편이 찾아오는 게 당연한 건데.
지나치게 오랜만이라 너무 과민하게 반응해 버렸다.
“모시거라.”
레실리아는 깨끗해진 탁자를 바라보며 고갯짓했다. 잠시 뒤, 카르단이 침실로 들어섰다.
“전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시오? 부부 사이에.”
“워낙 드문 일인지라.”
그녀는 흘끔 카르단의 눈치를 살폈다.
“다들 물러가라.”
“네.”
메리사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사라졌다.
털썩, 카르단이 커다란 침대 위에 앉았다.
그는 푹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숙고하는 표정이었다. 붙잡은 양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황자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때 카르단이 그녀를 잡아끌었다.
엉겁결에 옆에 앉게 된 레실리아가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떨리는 손과 다르게 표정은 고요했다.
“부인, 레실리아.”
“네, 전하.”
“당신은 내 편이지? 날 사랑하잖아.”
그가 레실리아의 손을 꽉 붙잡았다. 레실리아는 정말 놀랐다.
잡힌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남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물론이에요, 전하.”
그러자 카르단이 희미하게 웃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 줄 거라 믿소.”
“무슨 일이죠? 제게 다 털어놔 보세요. 제 아버지의 힘이 필요한가요?”
“아아, 레실리아…….”
그가 어린아이처럼 레실리아의 품을 파고들었다.
레실리아는 제 품에 안긴 카르단의 등을 토닥였다. 곧고 하얀 손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카르단을 마주 볼 때와는 다르게, 그녀의 표정은 묘하게 굳어 있었다.
한참 뒤, 카르단이 몸을 바로 세웠다.
품 안을 뒤져 무언가를 레실리아에게 내밀었다.
“이건?”
카르단은 탐색하듯 레실리아의 얼굴을 살폈다.
작은 유리병이었다.
그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독약이오.”
“뭐……”
레실리아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카르단이 쉿,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몸에 흔적이 남지 않고, 서서히…… 아주 서서히 사람을 말려 죽이는 종류지. 그래, 마치 오랜 질병을 앓는 사람처럼.”
그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낮아졌다.
그는 제게 이것을 전해 주고 간 기사를 떠올렸다. 타툴란의 수족이라고 했다.
“전하…….”
레실리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참지 못하고 와락 움켜쥐었다.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 독약 병이…… 왜 비어 있죠?”
그 순간 거칠게 팔이 잡혔다. 레실리아를 보는 카르단의 눈동자에 위험한 빛이 스쳤다.
숨길 수 없는 살기.
레실리아는 몸을 떨었다.
“당신 궁에 하녀가 하나 있지? 연보랏빛 머리카락의 에슬, 로즈벨이라는 하녀.”
“그 애를 왜?”
“그 하녀의 짐에 이 병을 몰래 넣어 두시오.”
레실리아는 입 안 살을 깨물었다.
“……누구죠? 당신이 이 독약을 쓴 사람.”
연무장 이후 두문불출하던 카르단이 다시 활동을 시작한 건 얼마 전부터였다.
그는 가장 먼저 황제와 황후에게 문안을 여쭈었다. 그 후엔 다시 훈련을 하고, 온갖 귀족들을 만나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냈다. 아, 설마.
“황자 전하! 황자비 전하!”
누군가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냐?”
“큰일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슥, 레실리아의 시선이 카르단에게 가 박혔다.
카르단은 말없이 그런 황자비의 시선을 받았다.
“황후 폐하를 뵈어야겠다.”
카르단이 몸을 일으켰다. 망연히 앉아 있는 레실리아를 내려다보던 그가 문득 웃었다.
“사랑하는 레실리아.”
자리에서 레실리아를 일으켰다. 카르단은 망설임 없이 레실리아를 품에 안았다.
귓가에 축축한 목소리가 닿았다.
“이제 곧 황태자비가 되실 텐데.”
“…….”
“부디 그 마음을 내게 보여 주시오. 그럴 것이지?”
차가운 눈동자는 꽉 쥔 레실리아의 주먹에 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