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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07화 (107/147)

107화

“때가 된 것 같구나.”

황후가 말했다.

늦은 밤. 그녀는 몹시 창백한 낯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있었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모후.”

“…….”

황후는 제 눈앞에 앉는 아들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비식거리는 입매를 끝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하아, 황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임명식은 최대한 빠르게 하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절차라는 게 있다.”

“제가 황제가 되면, 그 절차부터 모두 간소화해야겠군요.”

황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감히, 무엄하구나.”

카르단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 다리를 꼬고 앉은 꼴이 거만했다. 그는 황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보자 누군가가 떠올랐다.

‘넌 또다시 내게 졌어, 에슬린.’

카르단은 허벅지에 내려놓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운 좋게 살아남았으면 쥐 죽은 듯 숨어 있을 것이지. 감히 내 앞에 나타나?

에슬린 베르타니아가 모습을 드러냈다면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내 자리를 뺏기 위해.’

카르단은 이번에야말로 직접 그녀의 목을 자르기로 마음먹었다.

숨소리 하나, 영혼 한 자락까지 절대 놓치지 않고 반드시 끝장내리라.

“무엄하긴요. 우리 베르타니아의 역사 속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황태자가 있었습니까?”

“…….”

황후는 대답하지 못했다.

카르단의 말이 맞았다.

살아남은 자가 다음 황제.

그 간단한 법칙 앞에 황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제 경쟁자를 모두 제거했다는 말과도 같았다.

황제를 가려 주는 성배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성배는 내 마법사가 파괴할 것이다.’

카르단은 빠득 이를 갈았다.

제 자리를 위협하는 것은 설령 그것이 성배라도 용납할 수 없었다.

‘황태자가 되기만 하면 된다. 되기만 하면 돼.’

그러면 빠른 시일 내로 황좌는 제 손에 떨어질 것이다. 왜냐면.

‘황제는 곧 죽을 테니까.’

그는 황제의 술에 몰래 탄 까만 독약을 떠올렸다.

건강을 위해 바치는 귀한 술이라고 속이자, 황제는 반색하며 꿀떡꿀떡 잘도 받아 마셨다.

‘어차피 지금 힘을 가진 건 나다. 괜히 두려움에 떨었어. 생각해 보면 아직 에슬린은 고작 하녀일 뿐인데.’

그는 입술을 가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에슬린은 황제 시해죄로 잡아 죽여야겠어. 내일이면 수배를 내릴 수 있겠지.’

레실리아는 역시 카르단을 거역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전하.’

역시 말 잘 듣는 착한 여인이었다.

왜 진작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검은 물에 손을 담그기 전이 가장 두려운 법이었다.

이제 그는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에르단은.”

황후가 문득 입을 열었다.

카르단은 생각에서 벗어나 황후를 응시했다.

“황태자 임명식이 끝나면, 그 아이는 제 영지로 무사히 보내겠다고 약속하거라.”

“제가 그래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

“그 아이는 아무런 힘도 세력도 가지지 못한 아이다.”

“흠.”

카르단은 일부러 대답을 미뤘다.

내내 잠잠하던 황후의 눈빛에 그제야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결국 당신이 사랑한 건 에르단뿐이었군요.”

“뭐?”

“이거 참. 에슬린의 목숨은 그렇게 쉽게 잘라 내 버리시더니. 처음으로 걔가 좀 불쌍해졌습니다.”

카르단이 눈썹을 기울이며 비웃었다. 황후가 어깨를 떨었다.

“아들이 그렇게 소중하셨습니까? 에슬린이 아니라 에르단이 황태자가 되길 바라셨죠? 에슬린이 황태자가 되면,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애가 혹시라도 에르단을 죽일까 봐…….”

“…….”

“그래서 그때 일부러 가만히 계셨던 거 아닙니까?”

에슬린은 명예 죽음을 받았다.

죽음이 암만 명예로워 봤자 어차피 죽음이었다.

그때 황후는 에슬린의 목숨을 구명하지 않았다.

늘 그랬다. 그녀는 늘 에르단에게 관대하고, 에슬린에게 엄격했다.

“……나는.”

늘 단단하고 우아하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르단은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황후가 질끈 눈을 감았다. 어깨가 들리도록 크게 한 번 심호흡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모든 감정을 정리한 얼굴이었다.

“난 내 방식대로 너희를 사랑했다.”

언제나 칼 같던 여인이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너도, 카르단.”

“하. 별 말 같지도 않은.”

카르단은 코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는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황후를 내려다보며 그가 입술을 비틀었다.

“이제야 절 그런 눈으로 보시는군요. 아십니까? 당신의 사랑에는 우선순위가 있었습니다. 에르단이 첫째였고 그다음이 에슬린, 마지막…… 아니, 순위 밖에 있는 게 저였죠.”

“카르단.”

“그만하십시오. 답지 않게 구질구질하십니다. 모후께서는 그저 빠르게 제 임명식 준비나 하시길.”

저벅, 저벅. 카르단이 멀어졌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가 문득 몸을 돌렸다. 황후의 시선은 그때까지 카르단의 등에 못처럼 박혀 있었다.

예전엔 저 시선 한 줌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카르단은 과거의 자신이 우스워졌다.

이제 보니 그저 다 늙은 암사자가 아닌가.

“앞으로 절 거스르지 마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소중한 에르단의 목숨만큼은 살려 드리죠.”

쾅!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 * *

에슬린은 별채에 마련된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서류와 책들을 뒤적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에슬린 님.”

별채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하녀였다. 그녀는 은쟁반을 들고 있었다.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에슬린은 편지를 집어 들었다. 아무런 인장도 찍혀 있지 않았다.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뜯어보지 않았지만, 발신인은 대충 예상이 갔다.

이곳에 에슬린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몇 없었다. 게다가 이런 고급 종이에 편지를 보낼 사람이라곤.

‘에르단.’

그뿐이었다. 에슬린은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렸다.

“저, 차를 좀 올릴까요?”

하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에슬린이 편지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달칵. 하녀가 집무실을 나갔다.

‘에르단이 남부에…….’

편지 내용은 간결했다.

남부로 향하는 황궁 지원단에 에르단이 황족을 대표해 가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누구의 생각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카르단이 제 눈에 거슬리는 걸 하나씩 치우겠다는 거군.’

저였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게다가 거슬리는 것을 잠시 치워 두기에 남부만큼 적격인 곳은 없었다.

여차하면 몰래 처리하기에도 수월할 테고.

‘정보가 더 필요해.’

사람이 필요했다. 소식을 가져오고, 판을 뒤흔들 사람이.

‘달그림자는 어디로 가 버린 거지?’

그녀는 테이블 위에 턱을 괴었다. 가라앉은 눈동자가 바닥 언저리를 헤맸다.

다시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향긋한 차향이 실내를 메웠다.

멍한 시야 앞에 찻잔이 놓였다. 에슬린이 습관적으로 중얼거렸다.

“고마워. 거기 놓아……”

“무리하라고 데려다 놓은 게 아닌데.”

고개를 들었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시야를 메웠다.

찻잔을 들고 있는 건 테베트였다.

“자꾸 못된 마음 들게 할 겁니까?”

그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손을 뻗었다. 흘러내린 머리를 넘겨 준 뒤 볼을 쓸었다.

오전 훈련을 마치고 온 건지 그에게서 차가운 바람 냄새가 났다.

“편지가 왔나 보군요.”

그가 테이블 위를 흘깃거렸다.

“네. 에르단이 쫓겨난대요. 남부로.”

“아하.”

에슬린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약한 애가 거기서 뭘 어떡하겠단 건지.”

그러자 상대에게서 짧은 헛웃음이 터졌다.

“약하다고요? 누가?”

“에르단이요. 걔가 좀 여린 면이 있거든요.”

“그런 걸 과보호라고 하는 겁니다.”

“당신만 할까.”

에슬린이 피식 웃었다.

아까 하녀에게서 이 찻잎의 출처에 대해 들은 참이었다.

‘가주님께서 직접 상인을 불러 하나하나 확인하고 검수하신 것들입니다.’

비단 찻잎뿐만이 아니었다. 에슬린은 이러다 저 남자가 제가 마실 공기까지 선별하려 드는 건 아닐까 두려워졌다.

“제가 언제 당신을 과보호했죠?”

테베트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에슬린이 더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옷을 걸치고 발코니로 나가 햇빛을 쐬었다.

테베트는 그녀를 따라 나가기 전, 테이블에 놓인 편지를 흘끔 보았다. 손끝이 움찔거렸지만 참았다.

예전부터 그랬다.

에슬린은 에르단을 무슨 일곱 살 먹은 어린아이 대하듯 하곤 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게 그 황자가 거슬렸던 이유였던 것 같다.

당신의 그 염려 어린 시선마저 빼앗고 싶었다고 말한다면…….

아마 저를 진짜 미친놈 보듯 보겠지.

“왜 웃어요?”

난간에 기대선 에슬린이 물었다. 테베트는 재빨리 발코니를 밟았다.

“그냥. 당신이 그 자리에 잘 어울려서.”

내리쬐는 태양이 에슬린을 비추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도 그녀에겐 어울렸지만 이처럼 찬란한 태양 빛만큼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것도 없었다.

그는 에슬린 앞에 서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제 부탁은요?”

에슬린이 물었다.

“방금 마차를 탔다고 연락받았습니다.”

그러자 눈에 띄게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북부까지 무사히 도착하겠죠?”

“그럴 겁니다. 좋은 마차를 보내 놨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세피아가 놀랐겠네요. 갑자기 다시 북부 공작저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카르단이 득세한 지금, 에슬린도 없는 황궁은 세피아에게 위험했다. 당분간 황궁을 떠나 있는 게 나았다.

“하녀와 친할 줄은 몰랐군요.”

“친구예요. 절 많이 도와줬거든요.”

“친구.”

그가 에슬린의 말을 곱씹었다.

당신 주변엔 늘 뭐가 많군. 낮은 중얼거림이 흘렀다.

“뭐라고요?”

“아닙니다.”

테베트가 눈을 휘며 웃었다. 말문이 막히게 하는 눈부신 미소였다.

에슬린은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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