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한참을 조용히 있던 에슬린이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왜 온 거죠? 그 말을 해 주려고 온 건가요?”
하, 테베트에게서 허탈한 숨이 흘렀다.
“제가 당신을 보러 오는 데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에슬린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짙푸른 눈동자가 깜빡, 깜빡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
곧 흰 낯에 깨달음이 번졌다.
테베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고 보니 여긴 테베트 경의 저택이었네요.”
도대체 뭘 깨달은 거지?
그가 삐딱하게 섰다. 저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제가 저택 순찰이라도 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럼 왜 온 건데요?”
그는 이마를 짚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용건이 없으면 만날 이유도 없다는 건가? 지독히 에슬린 베르타니아다운 발상이었다.
게다가 분한 건 심지어 그녀의 말이 틀린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용건.
그 빌어먹을 용건이 있긴 했다.
말하지 말까. 심술이 일었다. 테베트는 간신히 인내심을 끌어올렸다.
“……맞아요. 당신에게 손님이 왔다는 걸 알려 주려고 왔습니다.”
“설마!”
에슬린이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켰다. 사라락. 손 틈 사이로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허무하게 빠져나갔다.
“네.”
“당장 가 봐야겠네요.”
망설임 없이 빠져나가려는 몸을, 그가 콱 붙들었다. 난간 위로 손을 뻗어 그녀를 가두듯 품에 넣었다.
“정말 못된 마음이 들어 버렸는데.”
어쩌죠? 테베트가 속삭였다.
에슬린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또 뭐에 심기가 비틀린 걸까?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그의 목을 안았다가 놓았다.
아주 찰나였다.
“이걸로는, 안 되나요?”
허, 테베트의 입에서 다시 허탈한 숨이 흘렀다. 그가 몸을 가까이 붙이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당신은 가끔 아주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녀를 어쩔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에슬린이 기습을 했다.
“…….”
작고 부드러운 것이 테베트의 입술에 닿았다. 마찬가지로 찰나였으나, 그를 무장 해제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럼 이건?”
에슬린이 입술 앞에서 속삭였다.
다시금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다디단 숨결이 애타게 흘러들어 왔다.
그녀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테베트는 딱딱하게 굳어 그 미소를 속절없이 응시했다.
에슬린이 까치발을 내린 뒤 그의 팔에서 쑥 빠져나왔다.
끼익, 발코니 문이 열렸다.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거친 욕망이 일어선 얼굴을 향해, 에슬린이 다정하게 웃었다.
“용건이 없어도 보고 싶으면 와요. 지금처럼.”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지.
테베트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 *
“허억, 허억…….”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심장은 이미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레실리아는 미친 듯이 풀숲을 헤치고 달려갔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제멋대로 휘날렸다.
곧 은빛으로 빛나는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하아.”
레실리아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하얀 입김이 터져 나왔다.
꾸우욱. 주먹을 쥐자 투명한 유리병이 느껴졌다.
‘그 하녀의 짐에 이 병을 몰래 넣어 두시오.’
카르단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사랑하는 레실리아.’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호수 가까이에 다가갔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황궁 호수는 꽝꽝 얼어 있었다. 표면이 거울처럼 반짝였다.
“아.”
레실리아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길 잠시, 그녀는 주변을 미친 듯이 둘러보았다.
쾅! 쾅! 쾅!
“흐윽. 흑…….”
고운 손에 든 건 크고 날카로운 돌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물고 최선을 다해 호수의 얼음을 깼다.
한겨울인데도 땀이 흘렀다. 아니 눈물이었던가?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콰지지직.
단단하던 얼음에 균열이 갔다. 레실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한밤중에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얼음을 깨는 여인. 제가 생각해도 괴상스러운 모양새였다.
아무도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쩍. 얼음이 갈라졌다.
작은 틈이 사이로 검고 깊은 호수 물이 보였다.
“하…….”
레실리아는 잠시 눈을 감고 얼굴을 치켜들었다.
‘사랑하는 레실리아.’
목소리가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건 레실리아가 사랑하는 목소리였다.
‘하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라니. 그런 건 할 수 없어.’
그녀는 주먹을 펼쳤다.
퐁당! 갈라진 얼음 틈으로 유리병이 빨려 들어갔다.
‘이제…… 누구도 찾을 수 없을 거야.’
증거는 그렇게 사라졌다.
레실리아는 그길로 천천히 황자비궁으로 돌아왔다.
조심스레 침실로 가, 푹신한 이불에 몸을 맡겼다.
순식간에 수마가 몰려왔다.
지금까지의 불면증이 거짓말인 것 같았다.
레실리아의 불면증은 이 황궁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생긴 것이었다.
그녀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꿈도 꾸지 않고 모처럼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가뿐하게 일어난 레실리아는 오랜만에 긴 향유 목욕을 했다.
“레실리아 님,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메리사가 말했다. 레실리아는 빙긋 웃었다.
“그래.”
“점심은 어떻게 준비할까요?”
“최대한 맛있는 걸로, 많이. 아, 에르단 전하께서 주신 벨레인 와인을 곁들여야겠다.”
“어머. 정말 오늘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잘된 일이라며 시녀가 웃으며 물러났다. 레실리아는 미소를 띤 채 제 테이블 위를 더듬었다.
「레실리아 모리어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 있는 책.
그건 제 아버지인 모리어스 후작이 직접 한 땀 한 땀 손으로 엮어 준 일기장이었다.
후작은 무남독녀인 레실리아를 보물보다 아끼고 또 사랑해 주었다.
좋은 아버지였다.
그녀는 언제나 아버지의 기대에 보답하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일기장을 펼치자마자 보인 문장이었다.
결혼……. 레실리아의 입가에 그림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꿈을 이뤘구나, 레실리아.
탁.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어? 어디 외출하시려고요? 지금 막 식사 준비를 이른 참인데.”
“황후 폐하와 식사를 해야겠다.”
“예?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전하!”
“지금 바로 갈 테니 연락을 넣어 주렴. 아, 벨레인 와인을 내와. 선물로 들고 가야겠다.”
레실리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시녀와 하녀들이 혼비백산하여 그녀를 따랐다.
황후는 때마침 식사 중이었다.
“황자비? 연락도 없이 이게 무슨 일이지?”
“죄송합니다, 폐하.”
레실리아는 가볍게 무릎을 굽혀 사죄를 올렸다. 그러고 보니 황후는 단 한 번도 레실리아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엄격한 눈이 레실리아의 움직임을 훑었다. 명백하게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저도 함께 식사해도 될까요? 와인을 가져왔는데 꼭 맛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레실리아가 달콤하게 말했다.
잠시 침묵하던 황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준비하라고 하지.”
황후의 손짓에 시중을 들던 하녀와 시녀들, 시종들이 줄줄이 나갔다.
넓은 식당에는 이제 황후와 레실리아 둘뿐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이지?”
“이 와인.”
레실리아가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을 툭툭 두드렸다.
“에르단 황자 전하께서 선물하신 와인입니다.”
“에르단이?”
황후가 흘끔 그 와인을 훑었다. 라벨을 본 얼굴이 일순 굳었다.
“…….”
황후는 손을 뻗었다.
역시 눈썰미가 좋은 여인이었다.
찌이익. 와인 라벨이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마치 처음부터 그러라고 만들어진 것처럼.
“이건…….”
라벨이 떨어져 나간 자리엔 또 다른 종이가 붙어 있었다.
황후는 그 종이에 쓰인 이름을 신중히 읽어 내렸다.
하. 얼음장 같던 얼굴에서 허무한 웃음이 흘렀다.
한스 브라운, 앨리나 벨, 알톤 케임, 제임스 로버트, 리엔 세르티…… 심지어 기름장이의 아들 이름까지.
“폐하.”
레실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품속에 숨겨 두었던 서류를 내밀었다.
“카르단 황자에게, 황실에 이혼을 청하고자 합니다.”
반듯하게 웃는 얼굴은 평소 보던 그것이 아니었다.
* * *
“다시 황궁에 돌아갔을 때.”
에슬린은 제 앞에 선 손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레실리아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약속?”
“네.”
그는 희미하게 미간을 구겼다.
가지런히 정돈한 콧수염. 멀끔히 정돈한 희끗희끗한 갈색 머리.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둥그런 눈매.
마지막으로 봤던 것보다 조금 더 나이 든 얼굴.
모리어스 후작이었다.
“모리어스의 이름을 돌려주겠다고.”
“…….”
“그렇게 약속했죠.”
밝은 태양을 등진 황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져 있었다. 그것이 어떤 후광처럼 느껴져, 그는 눈매를 찌푸렸다.
이 일을 어디서부터 받아들여야 할까?
황녀가 실은 살아 있었다는 것?
리페리우스가 그런 황녀의 편에 선 것?
아니면…….
카르단이 제 딸을 기만했다는 것?
‘오랜만이에요, 레실리아 님.’
에슬린은 제가 다시 황궁으로 돌아갔을 때를 떠올렸다.
입궁하기 전, 그녀가 제일 먼저 비밀리에 만난 건 레실리아 베르타니아였다.
‘이 종이는 무엇이지?’
‘황궁을 떠나기 전 조사했던 목록이에요.’
‘…….’
‘그간 더 늘었겠죠. 그건 알아내는 대로 전달해 드릴게요.’
‘…….’
‘화려하죠? 참 부지런해요, 카르단도.’
‘원하는 게 뭐야?’
‘필요한 게 있어요. 황자비궁에서 조사하게 해 주세요. 물론 티 나지 않게 잘할게요.’
레실리아는 와락 종이를 구겼다. 아름다운 여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니. 난 당장, 당장 아버지께 이 사실을 말해서 이혼부터 할 거야. 이것만으로도 충분……’
‘레실리아 님, 그건 진짜 복수가 아니죠.’
황녀가 손을 뻗어 레실리아의 덜덜 떨리는 손등을 감쌌다. 소름이 끼칠 만큼 서늘한 온도였다.
‘그럼? 그럼 뭐가 진짜 복수지?’
‘상대가 가장 안심했을 때.’
‘…….’
‘설령 위선이라 할지라도, 당신을 온전히 신뢰했을 때.’
대수롭지 않은 양 그녀가 웃었다.
‘그때를 기다려요.’
레실리아와 닮은 얼굴이 눈앞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에슬린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기분이 어때요, 후작?”
“전…….”
“카르단은 진작 당신 가문을 배신한 것 같은데.”
모리어스 후작은 에슬린 베르타니아에게 한때 충성을 맹세했던 대귀족이었다.
하지만 에슬린 베르타니아는 패배했고, 죽었다.
그는 눈치 빠르게 다음 권력을 찾아간 것뿐이었다. 모든 귀족이 다 그렇게 했다.
그땐 몰랐다.
그 가벼운 지조에 대한 대가를 이런 식으로 치르게 될 줄은.
모리어스 후작이 아찔한 듯 눈을 감았다 떴다. 황녀의 눈동자가 시린 칼날처럼 번득였다.
“내게 기회를 달라고 청해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