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카르단이 다시 황자비궁을 찾았다.
“레실리아!”
쿵쾅대는 소음이 온 궁에 울렸다. 사용인들이 어쩔 줄을 모르며 카르단을 쫓았다.
“전하, 왜 이러십니까! 전하!”
“저리 꺼져!”
저런 황자의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길거리 불량배보다 못한 무례함이었다.
곧 황태자 임명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이젠 정말 거리낄 게 없다는 것인가? 황자비궁의 사용인들은 순간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황자 전하? 지금 황자비 전하께선 휴식을…… 꺅!”
“황자비는 무슨!”
카르단은 거칠게 메리사를 밀었다. 닫히려는 침실 문을 그대로 열어젖혔다.
“제 발로 걸어 나가겠다는데!”
“전하?”
“여기 있었군!”
막 잠자리에 들려던 레실리아가 다시 가운을 걸쳤다.
어쩔 줄을 모르는 메리사를 향해 레실리아가 가볍게 웃었다.
“물러가 봐, 메리사.”
“하지만…….”
“괜찮아.”
메리사는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카르단이 쿵쾅거리며 다가왔다.
“감히, 당신이…… 당신이 날 배신해!”
“조용히 말씀하세요. 아직 공론화하지 않았는데…… 소문이 퍼지길 원하세요?”
하지만 늘 그렇듯 카르단은 레실리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혼? 이호온?”
그는 그저 제 감정만이 중요했다. 제 상황만이 급했고, 제 주장만을 들먹였다.
레실리아는 가만히 카르단을 지켜보다 등을 돌렸다.
드르륵, 서랍을 열어 빳빳한 종이를 꺼내 올렸다. 서류 내용을 확인한 카르단의 눈썹이 더욱 치켜 올라갔다.
“황후 폐하께서는 인정하셨어요. 당신만 서명하면 돼요.”
“레실리아!”
그가 성큼 다가와 레실리아의 어깨를 쥐었다.
“대체 뭐가 문제지? 곧 황태자비가 될 텐데, 곧 황후가 될 텐데!”
그는 진심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태도였다. 레실리아는 가까스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맞아요. 그건 제가 꿈꾸던 미래였어요.”
“하! 그러면서 무슨!”
“근데 지금 당장 너무 불행해요.”
레실리아가 느리지만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카르단의 말문이 막혔다.
제가 알고 있던 레실리아 베르타니아가 맞나?
적어도 저런 모습은 아니었다.
늘 부끄러워하며 제 눈치를 살피느라 바쁘던 여자가 아니었나? 황실에 시집온 게 가장 큰 기쁨이자 자랑이던 여자가 아니었나?
“날 사랑한다고 말할 땐 언제고! 이런 식으로 사람 뒤통수를 쳐?”
“…….”
레실리아는 물끄러미 카르단을 응시했다. 적막이 느껴지는 눈동자 또한 그가 알던 눈빛이 아니었다.
“그래요. 당신을 좋아했어요. 당신의 마음에 들고 싶었어요. 그건 부정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어요. 내가 사랑한 건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그 자리와 미래, 뭐 그런 것들이었다는 걸.”
“레실리아!”
카르단이 소리쳤다. 씩씩 오르내리는 가슴이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녀는 언제나 카르단의 기분이 상할까 두려웠다. 전전긍긍했다. 위축되어 있었다.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그의 비위를 맞추고 나면, 어쩐지 서글퍼졌다.
늘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쩌다 이런 인생이 되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날 그렇게 함부로 부르지 말아 줘요. 난 당신의 액세서리나 키우는 동물이 아니에요, 카르단.”
카르단이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레실리아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결혼하고 나서 처음으로, 그가 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서명해 주면, 이 목록은 조용히 지울게요.”
그녀는 카르단의 정부 목록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목록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에슬린 말대로, 그는 이런 방면으로는 정말 부지런한 인간이었다.
공개되면 아마 큰 흠집이 되겠지.
“이혼장?”
카르단이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거칠게 집어 들었다. 그가 눈앞에 대고 종이를 흔들었다.
“이혼을 하겠다고? 나와?”
“네.”
카르단은 한참을 서서 씩씩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후…….”
그가 크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찌이익. 거침없이 이혼 서류를 찢음과 동시였다.
“부인은…… 날 너무 얕보았군.”
“무슨……!”
꽈악. 카르단이 레실리아를 붙들어 그대로 침대에 쓰러뜨렸다. 소리를 지르려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이미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대로 병사들을 부를까? 보아하니 내가 준 약병을 아직 하녀의 짐에 넣지 않은 것 같은데.”
“…….”
“당신 침실을 수색하는 건 어떻겠소? 황제를 시해한 황자비라. 역사에 길이 남을 것 같은데.”
레실리아가 입술을 움직였다. 그가 어디 말해 보라며 살짝 손을 떼어 냈다.
“약병은…… 여기에 없어요.”
그녀가 작게 헐떡이며 속삭였다.
“뭐라고?”
카르단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버렸어요. 당신이 그걸로 날 협박할 줄 알았거든요.”
그건 양날의 검이었다.
레실리아는 약병을 증거 삼아 카르단이 황제에게 독을 먹였다고 밝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황자를 몰아가기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카르단은 이미 하녀에게 누명 씌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 표적이 나로 바뀌게 되는 것뿐.’
그에겐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일 것이다. 그걸 정면에서 맞서선 안 된다고 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신중하게.’
그녀는 조언을 곱씹었다.
“하녀는 내쫓았어요.”
“내쫓았다고?”
“절 위해 일한 아이예요. 무슨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억울하게 죽어선 안 되잖아요. 왜 그 하녀를 치우려고 하는진 모르겠지만, 그냥 내버려 둬요.”
“하하, 레실리아. 왜 이렇게 멍청해졌지?”
그가 위협적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레실리아가 입을 열자 커다란 손이 다시 그녀를 덮었다.
“이보시오, 부인. 내가 낳아 준 아비에게도 독을 먹였는데.”
“읍!”
“당신에게라고 못 할까?”
카르단은 냉혹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레실리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에슬린을 내보냈다고? 그 애가 얌전히 궁을 나갔다고?
‘아니, 차라리 잘된 건가. 밖에서 개죽음당하면 아무도 모를 테지.’
시선이 다시 아래로 내리꽂혔다.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것을 닦아 주며 카르단이 짐짓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래서? 이딴 짓까지 벌여 가며 당신이 원하는 게 뭐라고? 이혼?”
“…….”
“좋아, 이혼해 주지.”
레실리아의 버둥거림이 멈추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그는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천천히 손을 떼자 레실리아에게서 긴 숨이 터져 나왔다.
“이혼은 황태자 임명식이 끝난 뒤야.”
“뭐라고요?”
“내가 무사히 황태자가 되면 이혼해 줄 테니, 그때까지 그 빌어먹을 목록 간수 잘하라는 거야. 지금처럼 성급하게 굴지 말고.”
카르단이 몸을 일으켰다. 레실리아는 눈물을 닦으며 침대에 팔꿈치를 세웠다.
“그때까지 조심하시오, 부인.”
카르단은 옷자락을 툭툭 털며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언제 부인 식사에 독이 섞여 들어갈지 모르는 일 아니오?”
“절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건가요?”
“협박이 아니라 거래지. 우리 사이에, 마지막 거래.”
“…….”
“후작에게 편지를 쓰시오.”
그가 레실리아를 일으켰다. 거친 손길로 그녀를 의자에 앉힌 뒤, 억지로 펜을 쥐여 주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종이 위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무슨 소문을 들었든 그건 가짜이며, 흔들리지 말고 황태자 임명식까지 날 지지하라고 말이야.”
“…….”
“자, 어서. 왜 그렇게 떨지? 이 정도 각오도 없이 나에게 맞선 것이오?”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얼굴이 더 이상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모리어스 후작은 딸의 편지를 쥐고 신음했다.
“후…… 이게 무슨 일인지.”
그는 혼란스러웠다.
레실리아의 편지가 황녀의 말과는 영 딴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컬킨.”
예닐곱 살쯤 된 남자아이가 다가왔다. 컬킨은 후작가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입양한 자식이었다.
“누님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아이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모리어스 후작은 구슬프게 웃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특하구나, 내 아들.”
레실리아도 이맘때쯤 이렇게나 귀엽고 예뻤다.
다시 편지를 본 후작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새삼 깨달았다.
‘사랑하는 레실리아.’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제 딸이었다.
* * *
에슬린은 홀로 별채 건물을 산책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낯선 방문 앞에 도착했다.
‘너무 조용해.’
끼이익, 자기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도 정신은 딴 곳에 있었다.
‘역시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 볼까?’
판을 뒤흔들고자 했는데 잘될지 자신이 없었다. 황궁에 연줄이 많지 않았다.
이럴 때 정보 길드라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에르단을…….’
에슬린은 고개를 저었다.
에르단을 끌어들일 순 없다. 가뜩이나 남부행이 결정되어 신중해야 될 타이밍이었다.
“음?”
에슬린은 그제야 제가 낯선 방 한가운데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에슬린이 눈을 깜빡였다.
그대로 돌아가려 몸을 돌리려는데, 달빛에 비친 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초상화?”
벽엔 수많은 초상화가 작은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천천히 살펴보니, 아마 역대 리페리우스 가주들의 초상화인 것 같았다.
그녀는 흥미가 돋아 초상화를 하나씩 구경했다. 그러고 보니 본채 복도 어딘가에 이보다 큰 초상화 벽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언젠가 테베트의 얼굴도 이곳에 걸리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왠지 모르게 심각해졌다.
‘근데 테베트 경이…… 제일 나은 것 같은데?’
에슬린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가주들은 리페리우스답게 모두 아름답고 강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테베트만큼 완벽하지는 않았다.
‘주책인가?’
골똘히 생각하다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진짜 돌아가야겠다 싶어 몸을 돌리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