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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10화 (110/147)

110화

“거기 누구냐?”

“…….”

램프를 든 누군가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너는, 그때 그 하녀…….”

사티나가 놀란 듯 눈을 키웠다.

어쩐지 연기하는 것 같은 표정이라고 에슬린은 생각했다.

저택에 온 뒤로 사티나를 마주치는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테베트가 이 별채에 드나드는 모든 것을 과하게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밤중에 왔단 말이군.’

에슬린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행동이었다.

여인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가주님의 손님이시군요. 실례했습니다.”

“당신은?”

“사티나라고 합니다. 이 저택을 책임지다 은퇴한 몸입니다만, 가주님이 걱정되어 최근 돌아왔죠.”

“계속 쉬어도 됐을 것 같은데…….”

에슬린이 중얼거렸다.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살짝 기울어졌다.

에슬린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밤이 늦었는데, 손님께서는 무슨 일로?”

사티나가 물었다. 에슬린이 눈썹을 움직였다.

손님이라.

그 호칭을 듣자 비로소 확신이 생겼다.

사티나는 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어차피 더 이상 숨길 생각도 없었다.

“그러는 집사는 여기까지…….”

에슬린은 잠시 어미를 골랐다.

“무슨 일이지?”

명백한 하대. 사티나의 볼이 꿈틀 경련했다.

집사는 그러나 노련한 이였다. 날카로운 발톱을 빠르게 숨기고,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곳을 책임지고 있다고.”

“글쎄, 이곳을 책임지는 건 테베트 경이 아닌가?”

다시 사티나의 말문이 막혔다. 발톱을 숨기고 있는 건 노집사뿐만이 아니었다.

“젊으시군요. 그러니 천방지축처럼 날뛸 수밖에…….”

사티나가 중얼거렸다. 에슬린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지금 나 들으라고 한 소린가?”

뚜벅, 뚜벅.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꼿꼿한 집사의 뒷모습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주는 것 같기도 했다.

한쪽 소매가 움직일 때마다 팔락거렸다. 그로 인해 에슬린은 그녀에게 한쪽 팔이 없다는 걸 알았다.

가주들의 초상화 앞에 선 집사가 에슬린을 돌아보았다.

“가주님께서 정말 당신을 아낀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한쪽 손에 든 램프로 그녀가 액자를 비추었다.

가장 끝에 있는 초상화.

선대 리페리우스 공작이자, 테베트의 부친이었다.

“전 마님께서, 가주님의 모친께서 왜 리페리우스를 떠났는지 아십니까?”

나직한 목소리가 실내를 메웠다. 힘이 느껴지는 울림이었다.

“외로워섭니다.”

“무슨 뜻이지?”

“선대 가주님의 사랑을 갈구하고 갈구하다, 결국 미쳐 버린 가엾고도 섬약한 분이시죠.”

에슬린이 사티나를 빤히 응시했다.

집사는 그저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를 더듬는 듯 노인의 눈이 아득했다.

“어렵사리 소가주님을 가지셨으나 난산으로 인해 건강을 잃으셨죠. 정말…… 정말 약한 분이셨어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목소리였다. 하얀 눈썹이 잔뜩 기울어졌다.

“소가주님께서, 그러니까 지금 가주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왜지?”

“처음부터 선대 가주님의 마음은 마님께 없었는데, 마치 가주님을 낳아서 건강을 잃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처럼 구셨으니까요.”

에슬린은 할 말을 잃었다.

여인은 원망할 상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왜 그 화살이 테베트에게 돌아가 버리고 만 것일까?

에슬린은 램프 불에 일렁이는 선대 가주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테베트 경의 어머니는 어떻게 되셨지?”

“몸도 마음도, 모두 고장이 나 버리셨죠. 그 당시 리페리우스에 고립된 섬이 있다면, 그게 바로 전 마님이셨을 겁니다.”

긴 한숨이 튀어나왔다. 갑작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내게 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군.”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사티나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안타까움에 젖어 있던 눈빛은 이제 에슬린을 향해 있었다.

마치 그녀의 미래를 미리 보고 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리페리우스의 피가 그런 겁니다.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죠. 결국 자기 자신을…… 가문을 가장 사랑하게 만들어진 존재들이니까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건 에슬린이었다.

“당신이 그렇게 만든 건 아니고?”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씀을 하십니까.”

집사에게서 피식 웃음이 흘렀다. 그녀가 한 발 더 다가왔다.

눈매가 부드럽게 접혀 있었다. 그 틈으로 보이는 강렬한 눈동자를, 어쩐지 외면하기 어려웠다.

“제 말을 명심하십시오. 지금 당장 달콤하다고 해서 눈을 가려서야 되겠습니까? 속으면 안 됩니다. 본질을 보셔야지요. 이건 다 손님을 위해 드리는 말씀……”

“잠깐만.”

에슬린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거리를 두자 좁아져 있던 시야가 넓어졌다.

“당신의 말은 참 이상해.”

사티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에슬린은 미간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어쩐지 막을 수도 없고, 듣다 보면 제법 그럴듯해 보이거든.”

왜 그녀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던 걸까?

약한 곳을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 게 아닐까, 어쩐지 의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에슬린은 문득 목뒤가 빳빳해지는 걸 느꼈다.

“사티나.”

이름을 부르자 집사는 고요히 에슬린을 응시할 뿐이었다.

턱에 힘이 들어갔다. 옷자락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당신 늘 그런 식으로 테베트 경에게 말했어?”

“…….”

“어릴 때부터, 줄곧?”

차가운 목소리가 어둠을 파고들었다.

에슬린은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에 눈을 떴다.

“미안해요. 깨웠습니까?”

눈앞에 낭패한 얼굴을 한 남자가 보였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막 잠들려던 참이었어요.”

그는 침대 위에 반쯤 몸을 걸친 채였다. 하늘하늘한 휘장이 대충 걷혀 있었다.

“오늘 당신 얼굴을 못 봐서.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바람에.”

베개를 팔로 짚으며 테베트가 몸을 기울였다. 이마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바빴나요?”

“망할 황궁에 급한 볼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황궁 망하면 안 되는데. 에슬린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테베트의 무게로 인해 침대 한쪽이 푹 꺼져 있었다.

에슬린은 손을 뻗었다. 닿기 쉽도록 테베트가 반사적으로 몸을 기울였다.

“……뭐 하는 거죠?”

토닥, 토닥. 그녀는 테베트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촘촘하게 짜인 등 근육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냥, 이렇게 해 주고 싶어서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그럼 어린 날 혼자 울고 있었을 당신에게 이렇게 해 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에슬린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잠시 뻣뻣하게 굳어 있던 테베트가 순한 양처럼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

손길은 부드럽게 한참을 이어졌다.

“이건 또 아주 새로운…….”

고문이군. 어쩐지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다음 날, 추위가 다시 기승을 부렸다.

둘은 나란히 벽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타닥, 타닥.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자 시간이 금세 흘렀다.

나른한 한때였다.

테베트가 두꺼운 담요를 에슬린에게 덮어 주었다.

지나가는 듯한 가벼운 말투로 그가 말했다.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

날름거리는 불꽃에서 시선을 뗀 그녀가 테베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에슬린을 뚫어져라 구경하고 있었다.

“황태자 임명식에 참석해 달라는 편지더군요.”

“아.”

에슬린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본래라면 봄까지 차근차근 준비해 치러야 했을 식이었다. 믿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속도다.

카르단의 다급함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에슬린은 담요를 파고들었다.

“황태자 임명식이 2주 뒤군요.”

“에시.”

나직한 부름이 뒤따랐다. 에슬린이 고개를 돌렸다.

“기분은요?”

그녀를 샅샅이 살피는 눈빛이었다.

기분이라. 지금 제 기분이 중요한 건가?

에슬린은 그의 질문이 다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어요. 두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기대되는 것 같기도 하고.”

테베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타닥, 타닥. 불씨가 재차 튀었다. 그 모양을 응시하던 에슬린이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은 조금 무서워요. 황궁이 조용한 것도 신경 쓰이고, 모리어스 후작이 연락을 받지 않는 것도 불안하고…….”

그러자 부드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따듯한 손바닥이 에슬린의 턱을 쥐고 있었다. 마디가 굵고 단단한 손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테베트가 눈을 접어 웃었다.

“착한 입이군요.”

“대체 뭐가?”

“제게 상을 주시겠습니까?”

무슨 뜻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닿았다.

호흡이 엉키고, 간지러운 감각이 등골을 타고 피어올랐다. 눈앞에 벽난로의 불꽃이 아닌 다른 불꽃이 튀었다.

그는 에슬린의 입술뿐 아니라 그녀의 모든 얼굴에 흔적을 남기려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방황하다 다시 돌아온 곳은 결국 에슬린의 입술 위였다.

그렇게 아주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하아…….”

에슬린이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견딜 수 없어 테베트가 다시 그 위에 연거푸 입을 맞추었다.

“이제 그만 좀…….”

참지 못하고 그를 밀어냈다.

남자가 아쉽다는 듯 몸을 뗐다. 뺨을 만지작거리는 끈적한 손길은 여전했다.

지금껏 어떻게 참았던 걸까? 에슬린은 좀 질려 버렸다.

“제 입이 착한 짓을 했는데 왜 당신이 상을 받아 가요?”

에슬린이 툴툴거렸다. 테베트가 낮게 목을 울려 웃었다.

“당신의 나쁜 말버릇을 고쳐 놓지 않았습니까.”

“말버릇?”

고개를 기울였다.

제게 말버릇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진 않았다.

“괜찮다, 신경 쓰지 말라. 습관처럼 나오던 뭐 그런 말들.”

“아.”

“힘들면 언제든 말해요. 예전에도 말했지만, 난 당신을 돕기 위해 있는 겁니다.”

테베트가 엄지를 들어 에슬린의 입술 끝을 만지작거렸다. 한참을 입 맞추고도 여전히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이었다.

에슬린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가 함께 따라 웃었다.

처음으로 제가 안전한 곳에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건 황녀였던 전생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말하면 어떻게 해 줄 건데요?”

“당연히 당신을 안고 도망칠 겁니다.”

테베트는 굳이 뭘 묻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에슬린이 쿡쿡 웃었다.

“바다 너머 대륙까지?”

“…….”

장난 섞인 말이었는데, 남자에게선 어쩐지 대답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침묵에 에슬린이 턱을 기울였다.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에요?”

“에시.”

잠시 망설이던 그가 에슬린의 얼굴을 더듬던 손을 떼어 냈다.

테베트는 눈을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눈빛이 사뭇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에슬린이 몸을 물리며 짧게 웃음을 흘렸다.

“알겠어요. 도망가 달라고 말 안 할 테니까 얼굴 풀어요.”

“그런 게 아니라.”

어울리지 않게 그가 말을 골랐다. 아니, 고른다기보다 꺼리는 기색이었다.

‘무슨 일이지?’

에슬린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테베트는 잠시 바닥을 응시했다. 다시 마주친 눈동자엔 거친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문득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가 어렵사리 입술을 움직였다.

“실은 제게, 비밀이 있습니다.”

“비밀이요?”

에슬린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속으로는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그에 대해 모르는 게 있다고?’

그야말로 우여곡절, 산전수전을 겪은 사이였다. 테베트에 대해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아, 그러고 보니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리페리우스에 관한 이야기인데.”

낮은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각하, 계십니까?”

모습을 드러낸 건 낯익은 그의 시종이었다.

말을 멈춘 테베트가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지?”

“신전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급보라는 말에 귀가 절로 쫑긋해졌다. 담요를 걷고 몸을 일으키는데, 시종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음 마물 서식지에 대한 예측이 나왔습니다.”

뚝. 동작이 멈추었다.

“출전 준비를 할까요?”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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