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저택은 순식간에 바빠졌다.
기사와 병사들의 훈련이 강도를 더하고, 무기, 갑옷, 군마 등 보급품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이제껏 없던 대규모 포털이라는 신전 예측이 사람들의 위기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사방에 전운이 감돌았다.
비단 공작저뿐만이 아니었다. 황궁, 그리고 제국 전체에 은근한 긴장감이 내리깔렸다.
“임명식이 미뤄지진 않을까?”
하녀가 속삭였다.
“소문으로는 강행하신다던데.”
“……이 비상시국에 1황자 전하께서는 임명식 생각밖에 없으신 건가?”
“쉿. 누가 듣겠어.”
“그렇잖아.”
“……뭐, 어쩔 수 없지. 임명식은 코앞이고, 전쟁은 아직 남았으니까.”
“바쁜 건 우리 가주님뿐이시네.”
“그러게 말이야. 어, 전령인가 보다.”
현관을 쓸던 하녀 하나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저택으로 들어서는 말 한 필이 보였다. 북부에서 도착한 전령이었다.
“그런데 의외네. 가주님께서 바로 북부 공작령으로 가실 줄 알았는데. 북부 기사단을 여기로 불러들이실 건가?”
“으음. 예측 장소가 남부라 그런 거 아니야?”
“글쎄……. 아, 에슬린 님. 뭐 필요하신가요?”
하녀가 빗자루를 놓고 달려갔다.
에슬린은 계단을 내려가며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다는 신호였다.
두꺼운 망토를 걸친 모습을 보니 정원을 산책할 모양인 듯했다.
에슬린은 유독 시중을 귀찮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원래부터 그랬던 건지, 아니면 그렇게 변한 건지 알 길은 없었다.
어쨌든 하녀들은 군말 없이 허리를 숙인 채 별채의 손님을 보내 주었다.
테베트가 북부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
‘실은 저 특별한 손님 때문이 아닐까?’
하녀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에슬린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것이야말로, 이 저택에서 가장 해선 안 되는 일이다.
“아, 시간 될 때 침실의 화로 좀 치워 줄 수 있겠어?”
그대로 나가려던 에슬린이 멈추어 섰다.
“화로요?”
“응. 너무 많아.”
“네, 그럴게요.”
“고마워.”
에슬린은 망설임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녀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어차피 화로는 치워 봤자 저택 주인에 의해 다시 침실로 돌아갈 게 뻔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테베트보다 에슬린의 명령이 더 위였으니까.
그들의 관계에서든, 혹은 그들의 위치에서든.
“……정말 황녀님이신 걸까?”
“함부로 떠들다 쫓겨난다.”
“헙.”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하녀가 재빨리 입을 막았다.
저분에 대한 쓸데없는 말은 금기, 금기.
그 말을 되뇌며 둘은 다시 청소를 재개했다.
밖으로 나온 에슬린은 분수대 앞에 서 있었다. 밝은 곳에서 보니 더욱 아름다운 조각이었다.
봄이 오고, 분수에 물이 흐르면 더욱더 장관이겠지.
‘봄에도 이 광경을 볼 수 있을까?’
에슬린은 테베트와 입술을 겹쳤던 자리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느껴지는 건 차가운 냉기뿐이었다.
테베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얼굴을 보는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아졌고 심지어 어제는 머리카락 한 올 보지 못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는 이 전쟁의 선봉장이었다. 리페리우스는 물론 황궁 기사단까지 아울러 이끌어야 했다.
디에리안이 빠르게 예측한 덕에 두 달이라는 유예 기간이 생겼지만, 규모가 규모인지라 준비할 시간은 여전히 빠듯할 것이다.
‘보고 싶네…….’
우스운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못 만나는 시간이 예전엔 더 당연했는데.
하지만 요 며칠이 너무나 달콤했다. 한번 맛본 달콤함에 이토록 중독되어 버릴 줄은, 미처 몰랐다.
에슬린은 생각을 떨치듯 고개를 저었다. 언제까지고 테베트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걸 어쩐다……?”
에슬린은 품속에 넣어둔 편지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 적힌 내용을 보는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살롱 초대장이었다.
고위 귀족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비밀 살롱.
문제는 이 편지의 수신인이,
《리페리우스 공작저, 에슬린 베르타니아 님.》
이라는 데 있었다.
‘진짜 성격 더럽다니까.’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일주일 뒤가 황태자 임명식인데, 대체 뭐 하자는 거지?’
가볍게 혀를 찼다.
슥, 슥. 저 멀리 빗자루 소리가 들렸다. 하녀들이 현관 안 청소를 끝내고 바깥을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
에슬린은 점처럼 보이는 하녀들을 빤히 응시했다.
이내 입술이 매끈한 호선을 그렸다.
* * *
“정말 이런 게 필요하신 겁니까?”
하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에슬린은 웃으며 그렇다고 말했다.
잠시 의아해하던 하녀는 얌전히 수긍하고 사라졌다.
“피곤하네.”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디에리안이 보내온 자료를 내려놓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침실 온도는 따뜻했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몰려왔다.
이만 잘까……?
에슬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앞에 섰다. 어느새 바깥엔 까만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똑똑. 정갈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가볍게 대답하자 단정한 두드림과 다르게 벌컥, 문이 열렸다. 이어지는 걸음은 더 거칠었다.
“제가 어떻게 이틀을 보냈는지 알면…….”
부드럽고도 넓은 품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당신은 당장 제게 얼굴을 보여 줘야 할 겁니다.”
달콤한 목소리. 허리와 어깨를 조급하게 파고드는 두 팔.
에슬린은 소리 없이 웃었다.
“보고 있는데.”
창문 유리 위로 눈이 마주치자, 그가 씩 웃더니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크게 호흡했다.
“어림도 없어요.”
곧 몸이 돌아갔다.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곳에 오고 싶은 걸 참느라 죽을 뻔했습니다. 제롬이 저를 이제 미친놈 보듯 보는데, 어쩌다 제가 이렇게 된 거죠?”
낮고도 다정한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보고 싶었다는 말을 참 정성껏 했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테베트는 비로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외출복 차림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가득 묻어 있었다. 에슬린을 꼭 끌어안고 몸 여기저기에 겨울바람을 묻혔다.
에슬린은 간지러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리 와 봐요.”
한껏 재회를 즐긴 테베트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그녀를 이끌었다.
얌전히 따라간 곳은 침실 벽 한켠에 자리한 화장대 앞이었다.
“왜요?”
“앉아 봐요.”
거울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부딪치기 무섭게, 테베트는 옷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작은 벨벳 상자였다.
“뭐예요?”
“가만히.”
그는 상자를 열어 무언가를 집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여린 귓불을 건드렸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신중한 얼굴. 그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귀걸이?”
“어제 받았는데, 당신에게 직접 주고 싶어서.”
연보랏빛과 핑크빛이 오묘하게 섞인 다이아몬드 귀걸이였다.
“역시 잘 어울리는군요.”
테베트가 속삭였다.
에슬린은 얼떨떨한 얼굴로 거울을 응시했다.
“갑자기 웬 거예요?”
“이 수도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라더군요.”
“…….”
“그걸 들으니 안 살 수가 없어서.”
에슬린은 제 귀를 만지작거렸다.
귀걸이는 보석 본연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섬세한 세공이 돋보이는 모습이었다.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빛이 온갖 방향으로 산란했다. 과하지 않으면서 고급스럽고 우아한 디테일.
솔직히 말하자면, 지독히 에슬린 취향의 장신구였다.
“……고마워요.”
그러자 테베트가 더욱 기쁜 듯 웃었다.
“테베트 경이 떠나도 이걸 보면 위로가 되겠어요.”
“…….”
아무 생각 없이 튀어 나간 말에 테베트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절대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무리하진 말아요.”
그가 에슬린의 정수리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럴게요.”
두 달 뒤 남부에서 벌어질 전쟁.
그건 두 사람의 물리적인 이별을 뜻하기도 했다.
그의 전쟁은 보통 수개월이 걸렸으니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었다. 함께 보낸 시간이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더욱더.
“근데…… 누가 화로를 다 갖다 버린 거죠?”
문득 주위를 둘러보던 테베트가 물었다.
“아, 제가 치우라고 했어요.”
“추울 텐데?”
“그 전에 쪄 죽겠어요.”
“흠.”
거울 속 그가 못마땅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에슬린은 그 얼굴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보다, 내일은 외출을 좀 해야겠어요.”
“외출?”
어깨를 쓰다듬던 손길이 멈추었다.
“바깥에 볼일이 있습니까?”
“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테베트는 입을 다물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오전엔 황궁 기사단장을 만나야 합니다. 오후라면 잠깐 시간이 될 것 같군요.”
“아뇨, 테베트 경.”
테베트는 바빴다. 에슬린은 지금도 그가 잠잘 시간을 쪼개 가며 만나러 온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할 일 많은 거 알아요. 전 신경 쓰지 말고 경께서 해야 할 일을 하세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금 당신을 혼자 내보내라는 겁니까?”
“제롬 경을 붙여 줘요. 아니면 다른 기사라도 상관없고요.”
그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됐습니다. 오후에 시간을 내죠.”
“오전에 외출할 거예요.”
“그럼 기사단장을 오후에 만나겠습니다.”
“왜 일을 어렵게 만들죠? 제게 실력 좋은 기사를 붙여 주면 될 일이에요. 저택에 많잖아요?”
“당신이 불타는 탑에서 뛰어내린 게 고작 몇 주 전입니다.”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그러니까 대낮에, 호위를 달고 나가겠다는 거잖아요. 대체 뭐가 문젠지 모르겠네요.”
“나 말고 당신을 완벽하게 지킬 사람이 이 수도에 또 있습니까?”
“…….”
에슬린은 이마를 짚었다. 당연하게 튀어나온 말을 어쩐지 반박하기 어려웠다.
몸을 돌려 테베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날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요, 테베트 경.”
“……이성적으로?”
그가 중얼거렸다. 붉은 눈동자에 순간 위험한 빛이 일렁였다.
“제가 정말 이성적으로 굴었으면 당신은 이 저택에서 절대…….”
그는 도중에서 말을 멈추었다.
싸늘하고도 팽팽한 정적이 실내를 가득 메웠다.
어째서일까? 테베트가 억지로 삼킨 말을 에슬린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이 바늘 끝처럼 뾰족해졌다.
“난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에슬린은 몸을 일으켰다. 얼음 같은 눈동자가 미련 없이 테베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거울 앞에 홀로 남은 테베트는 거칠게 제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젠장…….”
이러려던 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