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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12화 (112/147)

112화

테베트는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침대로 다가갔다.

휘장을 걷자, 침대에 앉아 있던 에슬린이 눈을 들었다.

“뭐죠? 그만 돌아가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는 딱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해선 안 됐어요.”

“…….”

“미안해요. 당신이 그냥 제 혀를 뽑는 게 낫겠습……”

“제가 당신 혀를 왜 뽑아요?”

에슬린이 기함하며 말했다. 테베트는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하아,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알겠으니 그만해요.”

“당신 안전이 달린 문제라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아요.”

이불 위에 놓인 손을 테베트가 소중히 감싸 쥐었다.

에슬린은 다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불안해하는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테베트가 언제까지나 에슬린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닐 수도 없지 않은가.

“흑마법사는 어차피 두 달 뒤에나 모습을 드러낼 거예요. 1황자는 신경 쓸 것도 아니고요.”

“압니다.”

“그러니 너무 불안해 말아요.”

“…….”

테베트는 에슬린의 눈을 바라보았다. 검은 동공 아래로 어떤 빛이 스쳐 지나갔으나, 이내 곧 사라졌다.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호위를 골라 두겠습니다. 당연히 한 명은 안 됩니다.”

“좋아요.”

“……피곤해 보이는군요. 그만 자요.”

“테베트 경이야말로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들었는데.”

그는 고개를 저으며 에슬린의 베개를 정리해 주었다. 다정히 몸을 눕혀 주고, 이불까지 가지런히 덮어 준다.

“못된 말을 한 벌로 당신이 잠들 때까지 곁을 지키겠습니다.”

“…….”

“……이건 하게 해 줘요.”

에슬린은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그의 눈동자가 너무 간절했던 탓이었다.

머리를 쓸어 주고, 이불 위를 토닥이는 손길에 금세 수마가 몰려왔다.

에슬린은 눈을 감았다.

“…….”

테베트는 에슬린이 잠들고도 한참을 앉아 그녀의 곁을 지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테베트는 에슬린의 잠든 모습을 보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

에슬린은 농담이라고 여기는 듯했지만,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으니 이건 정말 벌이 맞았다.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유일한 위로였다.

“하아…….”

그는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죽은 에슬린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날이 갈수록 그날의 기억은 흐려지긴커녕, 점점 더 선명해졌다.

‘징그럽군.’

스스로에 대한 깊은 혐오감이 밀려왔다.

에슬린은 고맙다고 말했다. 자신을 구해 줘서 고맙다고.

어불성설이다. 그녀는 정작 중요한 건 모르고 있었다.

에슬린은 테베트의 품에서 한 번 죽었다. 그 죽음을 건넨 건 다름 아닌 에슬린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저 자신이었다.

그는 제 피를 타고 흐르는 저주를 떠올렸다.

불안했다. 그런 일이 또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란 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리페리우스와 엮이면 불행해진다.

리페리우스는 절대 남을 사랑하지 못한다. 지키지 못한다.

그 시작이 바로 에슬린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저주의 경고를 눈치채지 못하고, 제가 위험한 고집을 피우는 게 아닐까?

‘또다시…… 또다시 에슬린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놓을 생각도 당연히 없었다.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파괴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스스로가 징그러울 수밖에.

테베트의 눈이 비틀린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이 불안감을, 죄책감을, 자기혐오를, 그는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리페리우스에 관한 이야기인데.’

결국 리페리우스의 저주에 대해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에슬린은 기다리겠다고 했다.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는 그것조차도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말하기를 망설이는 제 모습에서, 그는 여전히 저 자신이 가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실감했다.

그저 애가 타고 초조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아득하여 이대로 말라죽을 것 같았다.

에슬린은 이르게 눈을 떴다.

곁을 지키던 테베트는 진작 돌아간 듯했다. 그가 앉아 있었을 곳을 짚으니 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설마.’

밤새 있진 않았을 것이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몸을 일으켰다.

“…….”

어느새 주변에 쌓여 있는 화로를 보며 조금 질린 얼굴을 했다.

치우게 하려다 말았다. 이런 걸로 그가 안심한다면 이 정도쯤이야 기꺼이 참을 수 있는 일이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저택을 나섰다.

“……정말 그러고 나가시는 겁니까?”

“네.”

제롬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뒤통수를 긁었다.

에슬린은 칼리다 백작저로 향했다. 미리 사람을 시켜 파악해 둔 입구 앞에서 제롬을 돌아보았다.

“안에서는 혼자 돌아다녀야 해요.”

“예. 그럼 저흰 몰래 숨어서 지켜보겠습니다.”

그녀를 따르는 건 제롬 하나였다. 하지만 어차피 곳곳에 그림자 호위들이 붙어 있을 것이다.

에슬린은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오랜만에 입어 보는 하녀복이 편안했다.

‘편하다니.’

속으로 조금 웃었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식의 잠입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 * *

“세상에, 이게 대체 얼마 만이란 말입니까!”

귀족 부인 중 하나가 속삭였다.

“그러니까요. 저는 진짜 초대장 받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부끄럽지만 전 이틀 밤을 설쳤답니다. 근데…… 진짜일까요? 진짜겠죠? 근 2년 만이라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아서.”

“칼리다 백작 부인께서 가짜 초대장을 보내실 리 없죠.”

“하긴. 아아! 로하르트 젤킨스 님의 연주라니!”

귀족 여인이 가볍게 이마를 짚었다. 상상만 해도 황홀하다는 표정이었다.

“홍차를 좀 내오겠니?”

간단히 담소를 나누던 여인이 하녀에게 말했다.

“네.”

하녀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게 생긴 아이네.’

귀족 여인은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러길 잠시, 다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곧 살롱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명목상으론 신진 화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였지만, 정작 그들의 관심은 배경 음악으로 깔릴 피아노에 가 있었다.

에슬린은 트레이를 들고 응접실을 나왔다.

칼리다 백작저는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온갖 예술품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로하르트…….’

그녀는 근처에 아무렇게나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저들의 시중이나 들기 위해 이곳에 잠입한 게 아니었다.

무수한 예술품을 관리하기 위해서인지 백작저에는 유독 하녀들이 많았다. 따라서 잠입은 어렵지 않았다. 오래 머물 생각이었다면 당연히 문제가 됐겠지만, 잠깐이니 상관없었다.

어쨌든 누가 봐도 에슬린은 완벽한 하녀였으니까.

“로하르트 님.”

똑똑. 위층으로 올라가 커다란 문을 노크했다. 그가 대기하고 있는 장소였다.

“들어와요.”

오랜만에 듣는 나긋한 목소리.

피식, 어쩔 수 없이 웃음이 흘렀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건 넓은 등이었다. 그 주변을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이 감싸고 있었다.

에슬린은 가만히 서서 그를 응시했다.

대체 얼마 만일까?

제국 최고의 피아니스트 솜씨는 역시나 환상적이었다.

“왔어?”

로하르트가 고개를 대충 젖히며 말했다. 옅은 레몬빛 머리칼이 스륵 움직였다.

“나 연습 중인데. 좀 기다려 봐.”

그는 성의 없는 투로 대꾸하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에슬린은 문가 근처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디에도 앉을 만한 의자는 없었다.

연주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기어코 마지막 악장까지 완주한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

제이드 보석을 그대로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가 에슬린을 향했다.

로하르트는 건반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턱을 괴었다. 건반이 함부로 눌리며 불협화음을 냈다.

“흠. 진짜 다른 얼굴이네.”

로하르트 젤킨스가 감상처럼 말을 내뱉었다. 살짝 처진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부슬부슬한 레몬빛 머리카락, 흠결 없는 하얀 피부, 옅은 색소의 청록색 눈동자, 매혹적으로 올라간 입술.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얼굴은 종종 천사에 비유되곤 했다.

에슬린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봐.”

그는 예전부터 피아노를 건드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소꿉친구였으니,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로하르트는 그저 피아노 앞에 방만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널 에슬린이라고 믿지? 젝스도 그렇고 디엘도, 에르단까지. 단체로 미쳐 버린 거 아니야?”

그가 웃는 투로 말했다.

“잔말 말고 와 봐.”

“음, 그 명령하는 말투를 보니 에슬린 맞네.”

로하르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착각이 좀 과해. 내가 아직도 네 말이라면 껌뻑 죽는 개새끼처럼 보여?”

“…….”

에슬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턱을 괸 그의 팔을 쥐었다. 순순히 딸려 온 팔을 그녀가 꼼꼼히 살폈다.

곱게 뻗은 손가락과 다르게, 그의 팔은 꽉 짜인 근육으로 단단했다. 그 언저리를 건조한 손길로 더듬었다.

“팔은? 괜찮아?”

“…….”

“디엘한테 들었어. 네 팔이 부러졌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딱히 눈에 띄는 상처는 없어 보였다. 에슬린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휙, 그가 거칠게 팔을 빼냈다. 싱글거리는 얼굴이 가까웠다.

“걱정하는 척은.”

눈꼬리가 부드럽게 접혔다.

“에슬린.”

로하르트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멱살을 쥐듯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자, 초록색과 푸른색이 오묘하게 섞인 눈동자가 훅 파고들었다.

에슬린의 무릎 한쪽이 기다란 피아노 의자 위로 올라갔다.

“여긴 무슨 배짱으로 왔어? 그딴 꼴 같지도 않은 모습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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