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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13화 (113/147)

113화

“초대장을 보낸 건 너야.”

로하르트의 눈썹이 가볍게 으쓱였다.

“아. 그래서 만나러 와 주신 거야? 황녀님 은혜가 정말 하해와 같군.”

에슬린은 잠시 그를 응시했다.

“……비꼬는 이유가 뭐야?”

“응? 모르겠어?”

풉. 로하르트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아직도 날 네 편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안 비꼬고 참아?”

그는 에슬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우리 에슬린. 내 친구. 개새끼 꼬리 흔드는 꼴을 그렇게 보고 싶었어?”

“말 좀.”

에슬린이 와작 표정을 구겼다. 로하르트의 손을 털어 내고 몸을 바로 세웠다.

그녀의 눈이 주변을 훑었다.

“젝스 경은 어디에 있어? 같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젝스! 아아. 젝스야말로 눈물겹지.”

로하르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거리낌 없는 몸짓으로 장식장을 연 뒤, 유리잔에 브랜디를 따랐다.

“어찌나 너에게 돌아가겠다고 성화였던지.”

“……무슨 소리야?”

“뭐, 그것도 지난 일이야. 지금쯤 아마 고향 가는 배에 타고 있을걸? 이제 젝스도 행복할 거야. 그리웠던 고향의 술을 맛보게 될 테니까!”

그가 짤랑짤랑 잔을 흔들었다. 에슬린이 쯧 혀를 찼다.

“로하르트, 너 진짜.”

“뭘 그런 억울한 표정을 해? 날 먼저 배신한 건 너 아닌가?”

“배신이라니…….”

로하르트가 술잔을 쥔 채 피아노 근처로 걸어왔다. 덮개를 내리고 그 위에 잔을 올려 두었다.

그는 정면에서 에슬린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마. 날 먼저 버린 건 너라고.”

“…….”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슬린은 말문이 막혀 그저 허탈하게 서 있었다.

물끄러미 그녀를 보던 로하르트의 시선이 귓가에 닿았다.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보석이 매달려 있었다.

그의 입술이 다시 차갑게 올라갔다.

“리페리우스 공작이 잘해 주나 봐?”

순간이었다. 로하르트는 에슬린의 한쪽 귀걸이를 빼 손에 쥐었다.

“내놔.”

“오, 이건 진짜 귀한 건데.”

에슬린이 손을 뻗었지만, 그의 키에 닿을 리 만무했다.

한참을 보석을 빛에 비춰 보던 로하르트가 귀걸이를 주머니에 쏙 넣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위로금. 너 때문에 내 팔이 부러졌잖아.”

에슬린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로하르트는 그 얼굴을 감상하듯 조금 더 응시하다 이윽고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휘휘, 귀찮다는 듯 내쫓는 손짓은 덤이었다.

“이제 돌아가 봐. 시시해졌어.”

“로하르트.”

에슬린이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때였다.

콰앙! 로하르트가 망설임 없이 피아노 덮개 위에 올려 둔 유리잔을 내리쳤다.

“뭐 하는 짓이야!”

에슬린이 기절초풍한 얼굴로 소리쳤다.

귀한 손이었다. 피아니스트의 목숨줄과도 같은 손이었다.

그걸, 그 손을……!

“로하르트!”

그는 냉랭한 눈동자로 질겁한 에슬린을 응시할 뿐이었다.

붉은 피가 술과 섞여 뚝뚝, 피아노를 타고 흘러내렸다.

“무슨 일이시죠? 로하르트 님!”

난데없는 소란에 벌컥 문이 열렸다.

저택의 시종인 듯 보이는 남자를 향해, 로하르트가 가볍게 제 손을 들어 보였다. 살점이 흉하게 너덜거렸다.

시종이 기겁한 표정을 했다.

“보이지? 연주회는 취소야. 의원에 가야겠거든.”

“헉, 네네……!”

“아, 그리고 칼리다 부인께 말해 줘. 저택 청소 좀 신경 쓰라고.”

그는 천사처럼 달콤한 미소를 띤 채 에슬린을 돌아보았다.

“쥐새끼가 숨어들었잖아.”

에슬린은 내쫓기듯 칼리다 저택을 나와 리페리우스 공작저로 돌아왔다.

쾅! 집무실 문이 거칠게 닫혔다.

책상을 헤집어 빈 종이를 집어 들었다. 당장 펜을 들어 휘갈기려던 동작이 일순 멈추었다.

뚝. 뚝. 잉크가 무심히 떨어졌다.

“그 또라이, 진짜…….”

예전부터 로하르트의 행동은 종잡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저와 에르단도 만만찮은 악동이었지만, 로하르트는 그보다 더했다.

누가 그를 두고 천사라고 했을까?

그는 순백인 척하는 순흑이었다. 천사의 탈에 갇히고 만 비운의 악마였다.

아니, 그런 건 다 됐고.

‘제 손을 망가뜨리다니!’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바닥을 적시던 피가 떠올랐다.

‘날 먼저 버린 건 너라고.’

에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영문 모를 소리였다.

그를 찾지 않았다고 저러는 것인가?

하지만 에슬린은 수도에 올라오며 가장 먼저 로하르트를 찾았다.

제일 먼저 달그림자 길드에 갔다.

‘모습을 감춘 건 저면서.’

길드장은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정보 길드의 수장이 없다는데. 꼭꼭 숨었다는데.

에슬린은 그를 찾을 도리가 없었다.

버렸다니. 배신했다니.

그녀는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휴…….”

에슬린은 크게 심호흡하고 얼룩진 종이를 치웠다. 새 종이를 꺼내 차분히 편지를 썼다.

수신인은 에르단이었다.

로하르트가 수도에 있고, 손을 다쳤으니 찾아서 살펴보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뒷면에 대충 촛농을 떨어뜨렸다. 봉인을 찍으려던 동작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에르단도 비슷한 표정을 했지.’

다시 만났을 때, 에르단은 에슬린을 원망의 눈초리로 보았다.

왜 그런 식으로 자신을 희생했느냐고 탓했다.

‘그럼 어떡하라고?’

그때 에슬린과 측근들은 반역 누명을 쓰고 있었다. 제 실책으로 인해 모두 죽을 위기였다.

제 잘못이었다. 책임져야 했다.

죽음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테베트와 디에리안 덕에 살아남았지만, 그대로 죽었더라도 에슬린은 후회하지 않았을 거였다.

‘난 틀리지 않았어.’

선택의 연속인 삶이었다. 당연히 그 선택이 두려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제 선택의 결과가 오롯이 제게만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었다.

저로 인해 누군가의 목숨이 오고 갈 수 있었다. 에슬린은 그게 싫었다.

그러니 에슬린에게 가장 값싼 건 언제나 그녀 자신이었다.

‘틀린 적 없어.’

희생이 아니다. 버린 게 아니다.

에슬린은 굳은 얼굴로 그 말을 되뇌었다.

“에슬린 님, 편지를 보내신다고요?”

문을 열고 다가온 하녀가 은쟁반을 끼고 물었다. 별채로 돌아와 편지를 보낼 거라고 말했던 것을 전달받은 모양이었다.

“…….”

에슬린은 잠시 제 손안의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봉인을 찍지 않은 촛농이 그대로 굳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니, 편지는 됐어.”

“네?”

에슬린은 편지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보다 테베트 경이 돌아오면 바로 알려 줘.”

“아, 네.”

하녀는 의아한 얼굴이었으나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

에슬린은 제 한쪽 귀를 만지작거렸다. 텅 빈 감촉이 공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주변에 푸른 기운이 맴돌았다.

‘음?’

디에리안인가?

“잠깐 쉬어야겠어. 필요하면 다시 부를게.”

“알겠습니다.”

하녀가 공손히 물러났다. 에슬린은 서둘러 몸을 움직여 침실로 향했다.

작은 티 테이블에 앉아 푸른 기운에 응답했다.

기대와 다르게, 발신인은 디에리안이 아니었다.

‘내가 쌍둥이는 맞나 봐.’

에슬린은 그 새삼스러운 사실을 실감했다.

제게 편지를 쓰다 만 걸 어떻게 알았는지, 에르단이 먼저 연락을 보내온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아닌 척 살살 좀 긁었더니 아주 으르렁대던데? 그 꼬락서니를 네가 봤어야 했어. 요즘 얼마나 갓 태어난 고라니처럼 구는지 알아? 그쪽 하녀들이 하루가 멀다고 황궁을 나간다고. 경력 단절의 주범이야, 주범!”

책상 위에서 푸른 돼지가 꽥꽥 울었다.

분명 에르단의 목소리인데…… 꽥꽥 울었다는 말로밖에는 표현이 안 됐다.

“여하튼 내 말의 요지는, 그렇게 카르단을 도발하는 바람에 남부로 쫓겨나게 됐다는 거야. 이전 편지에서도 대충 말했지만.”

돼지의 목소리가 조금 시무룩해졌다.

에슬린은 다시 한번 더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은 없었다.

“근데 정말 남부로 가야 하는 걸까? 나 남부 싫어. 거기 이제 약간 온갖 재앙의 근원지 같은 느낌이잖아.”

이젠 돼지의 두 눈이 눈물에 젖은 것처럼 보였다.

에슬린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정말 에르단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에슬린, 나 가기 전에 한번 만나 주면 안 돼? 넌 남부에 몇 번 가 봤지만 난 한 번도 안 가 봤잖아…….”

에슬린은 쓰레기통에 처박아 둔 편지를 떠올렸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에르단은 직접 만날 생각이었다. 테베트를 통해 자리를 마련하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결국 에르단을 남부로 보내야 하는 건가?’

다시 로하르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에슬린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에르단이라면 로하르트가 저러는 이유를 알고 있을까?

“……그보다 이 소통 수단은 정말 괜찮네. 뭔가 혼자서 계속 말하게 되는 마성의 매력이 있어. 왜 돼지인지도 이젠 알겠고 말이야. 얜 정말…… 귀여워.”

그 와중에도 외로운 돼지는 홀로 쉬지 않고 말했다.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빠진 에슬린에겐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 * *

그날 밤, 에슬린은 탈탈 굴러가는 마차 안에 있었다.

“기분이 정말 묘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에슬린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웃음의 무엇이 불만스러웠던 건지 남자가 에슬린의 코를 가볍게 꼬집었다.

“또 절 유난스럽다고 비웃은 겁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음…….”

에슬린은 말을 고르는 척 어미를 늘였다.

마차의 진동이 잔잔한 물결처럼 몸을 흔들었다.

역시 리페리우스의 마차라 그런가, 공용 마차와는 승차감부터가 달랐다.

“테베트 경께서 그 말을 일곱 번쯤 한 것 같아서.”

그러자 옆에 앉은 남자가 우아하게 다리를 바꿔 꼬았다.

“틀렸습니다. 다섯 번이에요.”

“아하.”

그랬던가?

에슬린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커튼을 슬쩍 걷어 보았다.

어둠에 잠긴 수도는 간간이 밝혀진 주점과 여관 불빛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황궁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멀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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