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에슬린이 묻자 테베트는 창밖으로 대충 시선을 주다 대꾸했다.
“당신이 말한 비밀 통로인지 뭔지로 가려면 좀 돌아가야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아, 정문이 아니라서…….”
에슬린은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궁 밖 생활이 길었다지만 수도 지리까지 완벽하게 파악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어둠이 내린 도시는 낮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밤의 수도를 눈에 새기기라도 하듯, 에슬린이 스쳐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바쁘게 응시했다.
“바람이 찹니다.”
단단한 손이 튀어나와 커튼을 내렸다.
갑작스레 차단된 시야에 에슬린은 고개를 돌렸다. 반듯한 얼굴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창문은 안 열었어요.”
“틈새로 바람이 들어오지 않습니까. 당신 옷은…… 바람을 막기엔 적절하지 않아 보이고요.”
테베트는 못마땅하다는 듯 에슬린의 옷차림을 훑었다. 그의 손이 그대로 창문을 짚었다.
“왜 다들 하녀복이 추워 보인다고 하는지 모르겠네.”
황자비궁에 있을 때, 젝스도 하루가 멀다 하고 에슬린의 옷이 얇아 보인다며 성화였다.
의외로 따뜻한데. 입어 보라고 할 수도 없고.
에슬린은 입매를 당겼다 풀었다. 바깥 구경은 순순히 단념했다.
어차피 슬슬 목적지였다.
그림자 같은 검은 마차가 황궁 담벼락을 천천히 지나고 있었다.
남부행이 결정된 에르단은 함부로 황궁을 떠나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렇다면 좀 더 자유로운 사람이 만나러 가면 될 뿐이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야심한 시각에, 그들만 아는 비밀 통로로.
일과를 마친 리페리우스 공작이 호위로 따라나선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신과 이런 식으로 같이 황궁으로 가게 될 줄이야. 정말 기분이 묘해요.”
테베트가 다시 속삭였다. 에슬린이 피식 웃었다.
“여섯 번째.”
“틀렸어요. 여덟 번째입니다.”
“…….”
에슬린은 가볍게 눈을 흘겼다.
“뭐야, 내가 맞았잖아요.”
짓궂게 씩 웃은 남자가 그녀의 눈가에 키스했다.
“맞아요. 당신이 틀릴 일은 없죠.”
그 말을 끝으로 마차가 멈추었다.
똑똑, 마부가 작게 노크했다. 가느다란 목소리와 함께였다.
“열, 열어도 될까요……? 안 되면 헛기침을 두 번…….”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제롬의 목소리.
“왜 저래요?”
에슬린이 물었다. 테베트는 피식 웃더니 영문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누가 당신을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아나 본데.”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가 에슬린의 입술을 한 번 진하게 물었다. 비어 버린 귓불을 집착적인 손길로 매만지는 것과 동시였다.
윗입술을 붙인 채 그가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괜한 걱정입니다. 저처럼 정중한……”
똑, 또독…… 소심한 노크가 그의 말을 잘랐다.
그 바람에 에슬린은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짐승……?”
외마디 말을 남긴 채 그녀는 마차를 휙 떠나 버렸다.
제롬을 비밀 문 앞에 세워 두고, 에슬린은 테베트와 함께 황궁으로 들어갔다.
에슬린만 아는 인적 드문 지름길을 선택했다. 솔직히 누굴 만나도 상관은 없었다.
테베트는 언제든 황궁을 들락거려도 이상하지 않은 리페리우스 공작이었고, 에슬린은 누가 봐도 그를 수행하는 하녀처럼 보였기 때문에.
“밖에 있겠다고요?”
어둠에 잠긴 황녀궁 앞에서 에슬린이 물었다.
테베트는 검 자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지키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추울 텐데…….”
에슬린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왜 테베트와 젝스가 줄곧 저에게 추워 보인다며 걱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테베트가 부드럽게 입술을 말아 올렸다.
“성질 급한 황자가 뛰어내려 오기 전에 얼른 가 보는 게 좋겠습니다.”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황녀궁 안으로 들어갔다. 제국 최고의 기사가 앞을 지켜 주니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빠르게 계단을 올라 응접실 문을 열었다.
“에르단.”
흐린 램프 불빛 아래 늘어져 있던 에르단이 고개를 들었다.
“에슬린! 너! 몸은?”
그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며 에슬린을 훑었다.
몸?
“나 건강한데?”
“아니, 디에리안이 네가 이상한 마탑 같은 데에 납치됐다고 해서…… 디엘 말로는 괜찮다고 하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있어야지.”
에르단이 에슬린 주변을 빙빙 돌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말 무사한지 확인하는 몸짓이었다.
“멀쩡한 걸 보니 좀 안심이네…….”
두어 바퀴를 돌던 그가 이윽고 한숨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에슬린은 가느스름하게 눈을 좁혔다.
“너 설마 그런 이유로 날 만나자고 한 건 아니지?”
황자는 멍하게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이윽고,
“아아아!”
하며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구는 것이다.
“당연히 아니지! 빨리 남부에 대해서 말해 봐.”
“…….”
에슬린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일단 테이블로 가 앉았다.
에르단이 눈알을 굴리며 맞은편에 자리했다.
어차피 만날 생각이었으니, 참자. 참아.
에슬린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너 근데 귀걸이 한쪽이 없는데?”
“…….”
“잃어버린 거 몰랐어? 웬일이야, 네가?”
에르단이 날개 달린 개를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 어쩐지 얄미웠다.
“그런 거 아냐.”
“그럼?”
“로하르트가…….”
또다시 떠올리자 속이 부글거렸다. 에슬린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로하르트가 가져갔거든.”
“뭐? 로로가 나타났어? 어디? 언제? 왜!”
“…….”
참았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어릴 때처럼 부르면 이번엔 제 팔을 자를걸.”
“……그게 무슨 뜻이야?”
“몰라, 나도.”
던지듯 내뱉은 말에 에르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에슬린은 짤막하게 로하르트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에르단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로로가 그렇게 말했다고? 자기를 배신했다고?”
“그래. 그러면서 제 손을 망가뜨렸다고.”
“…….”
“뭘 그렇게 봐?”
에르단은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였다.
에슬린은 로하르트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지만, 솔직히 에르단은 로하르트의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 누구보다 이해되었다.
그 또한 스스로 독약을 삼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에슬린……. 난 네가 아직도 모르는 게 신기한데.”
“뭐가?”
“아님, 모르고 싶은 건가?”
에르단은 거칠게 제 머리를 헤집었다.
“상처받은 거잖아.”
“…….”
곧게 뻗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쪽 눈매가 보란 듯이 구겨졌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 에르단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상처 입은 거라고. 로하르트는.”
“나는…….”
에슬린이 어울리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난 상처 입힌 적 없어.”
제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던 측근들이다.
상처 입혔을 리 없다. 에슬린은 알 수 없이 기분이 불쾌해졌다.
“누가 널 두고 똑똑하다고 하는 걸까?”
자기 일은 저렇게 바보 같은데. 에르단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에슬린의 표정이 대놓고 냉랭해졌다.
“말을 알아듣게 해.”
로하르트부터 시작해, 자꾸 제가 잘못했다는 것처럼 구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에르단은 그저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로하르트한테 물어봐. 그런 식으로 나온 건 걘데, 걔랑 풀어야지.”
그에 대해 더 말을 보태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사실 에르단은 어렴풋이 로하르트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다면 섣불리 끼어들지 않는 게 상책이다.
그게 설령 로하르트가 에슬린을 떠나는 방식이 되더라도.
“너 로로랑 싸우면 나한테 달려오는 그 버릇 좀 고쳐. 어릴 때부터 꼭 그러더라. 잘 들어 보면 은근히 네 잘못이었던 적이 많았던 거 알지?”
“대체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천방지축 날뛰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다. 에슬린이 거칠게 혀를 찼다.
“진짜 재수 없어. 너도, 로하르트도.”
툴툴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에르단은 조금 웃었다.
“그래서 로하르트를 움직일 수 없게 된 거구나?”
“그래.”
에슬린은 어딘지 모르게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다른 대안을 선택할 수밖에.”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불만스러웠던 표정도 잠시였을 뿐, 특유의 무표정이 가면처럼 덧씌워졌다.
“어쩔 수 없지. 예정대로 내가 남부에 갈 수밖에.”
에르단은 앉은 자세로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에슬린이 눈썹을 비쭉 들었다.
“가기 싫다고 징징댈 땐 언제고?”
“징징대도 돼? 그럼 나 가기 싫어!”
“…….”
“근데 안 갈 수 없는 상황이잖아.”
하, 온천 여행이면 얼마나 좋을까. 에르단이 우울한 얼굴로 구시렁댔다.
그런 쌍둥이를 보는 에슬린의 눈빛이 순간 깊어졌다.
“널 정말 여기까지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어.”
“부탁한 적 없는데.”
“그래도.”
에슬린은 천천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시야가 좀 더 넓어졌다. 흐릿한 불빛 아래, 흔들리는 에르단의 얼굴이 명확히 보였다.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어.”
에슬린에겐 지금 남부에서 움직여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게 로하르트가 되어 주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물 건너간 일을 아쉬워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남부로 가, 에르단.”
그는 에슬린이 꽂아 넣을 첫 번째 깃발.
“최대한 빨리.”
과연 이 땅을 뒤덮는 건 제 깃발일까, 카르단의 깃발일까?
에슬린은 무감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생각할 게 뭐 있나? 결말은 어차피 정해져 있는데.
“너…….”
에르단은 뭐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턱을 당겼다.
난 쟤가 저렇게 웃을 때마다 정말 싫다니까.
반쯤 어둠에 잠긴 에슬린은 그러나 제가 눈을 빛내며 웃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