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에르단과 대화를 마친 후, 에슬린은 제 집무실에 잠시 들렀다.
벽면에 걸린 커다란 액자 뒤편, 그녀의 비밀 공간에서 중요한 자료 하나를 꺼내 들었다.
“뭐야?”
“있어.”
“또 나만 왕따시키지?”
에르단이 툴툴거렸다. 에슬린은 딱히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에르단에게 자료를 넘겼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며 두꺼운 책자 겉면을 요리조리 보았다.
호기심을 가진 것치고는 안까지 제대로 읽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후루룩 넘긴 책장에 그의 앞머리가 흐늘흐늘 휘날렸다.
“오, 이게 바로 그…….”
“이리 줘.”
에슬린은 그것을 낚아채듯 가져왔다.
비밀 문을 조심스레 밀고 황녀궁 밖으로 나왔다.
“……테베트 경이 어디에 갔지?”
“자러 간 거 아냐?”
흐아암, 에르단이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이상하네.’
에슬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롬이 담벼락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혼자 돌아가는 건 일도 아니지만.
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어둑한 밤이었다.
에슬린은 문득 불안해졌다. 빠르게 몸을 돌렸다.
“에르단, 서둘러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
“에르단?”
그건, 지금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였다.
에르단은 물론 에슬린까지 빳빳하게 몸을 굳혔다.
휙, 에슬린은 재빨리 책자를 등 뒤로 감췄다.
바스락, 바스락.
마른 나뭇잎을 밟고 누군가의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모후.”
에르단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황후의 시선이 슥, 황녀궁을 향해 돌아갔다가 다시 에르단에게 와 박혔다.
“설마…… 황녀궁에 다녀온 건 아니겠지?”
“아뇨. 그냥 잠이 안 와서 산책을 좀…….”
에르단이 아무렇게나 횡설수설했다.
“…….”
에슬린은 최대한 숨을 죽이며 어둠 속에 몸을 묻었다. 잠자코 있으면 얼추 황자의 하녀처럼 보일 것이다.
시선이 어지러이 아래를 헤맸다.
하녀답게 황족의 얼굴을 응시하지 않으려 한 것도 있지만, 어쩐지 황후의 얼굴을 보는 게 껄끄러웠다.
그래서 알지 못했다.
“산책을 왔다고. 이 시간에, 이런 곳까지.”
황후가 저를 꿰뚫듯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는 모후께선 여기까지 혼자 무슨 일이십니까?”
에르단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답지 않은 냉랭함에, 에슬린의 고개가 슬쩍 비틀렸다.
“누구 유령이라도 찾으러 오신 건 아니실 테고.”
“에르단.”
“날이 추우니 이만 돌아가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모셔다드리죠.”
에르단은 딱딱한 얼굴로 몸을 움직였다. 황후의 시야에서 에슬린을 가리듯 서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황후는 에르단의 팔을 잠시 보다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저 아이는?”
그대로 걸음을 떼려던 황후가 갑자기 몸을 틀었다.
그 바람에 사고처럼 시선이 마주쳤다.
“…….”
구름이 움직이고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 아래에 선 제국의 황후는 여전히 아름답고 고고한 모습이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푸른 눈동자, 무언가를 내뱉기보단 삼켜 내는 데 익숙한 입술.
제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에슬린은 알 수 없는 기분이 휩싸였다.
그건 타툴란에게 흑마법으로 영혼을 간파당하던 기분과 닮아 있었다.
무언갈 파헤치려 드는 눈빛. 하지만 그보다 더 복잡한 감정으로 일렁거리는…….
“모후.”
에르단이 재빨리 황후의 시선을 차단했다.
“일개 하녀까지 신경 쓰실 줄은 몰랐습니다. 길을 잃었다길래 방금 알려 준 참이니 알아서 돌아가겠죠.”
“……그래.”
황후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천천히 길을 따라 멀어졌다.
‘에르단이 왜 저렇게 쌀쌀맞아졌지?’
뜬금없게도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저렇게 찬바람 불 정돈 아니었는데.’
근본부터 무언가가 뒤틀린 얼굴.
그동안 황후와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에르단이 황후를 미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에슬린에게 명예 죽음을 내린 게, 다름 아닌 황후였기 때문이었다.
“…….”
스산한 바람이 빈자리를 메웠다.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이나 풀잎들이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았다.
에슬린은 방금 전 황후의 눈빛을 떠올렸다.
뭘까, 이 기분.
저벅, 저벅. 다시 발걸음 소리가 났다. 마른 풀들을 짓이기며 누군가 눈앞에 섰다.
“이번엔 당신이 묘한 표정이군요.”
테베트는 크고 따듯한 손으로 에슬린의 볼을 감쌌다. 얼어붙은 줄도 몰랐던 뺨에 그의 온기가 전해졌다.
“테베트 경, 어딜 갔다 왔어요?”
“수상한 자가 없는지 근처를 좀 살폈습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건 이상한 말이었다.
황후야말로 수상하기 그지없는 불청객이었다.
그걸 테베트가 놓쳤다고?
“뺨이 너무 차가운데.”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에슬린을 끌어당겨 제 망토 안에 함께 넣어 버렸다.
그는 겨울에도 옷을 두껍게 입는 타입이 아니었다. 얇은 옷자락 사이로 딱딱한 근육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에슬린은 그의 흉곽을 짚고 살짝 몸을 떼어 냈다.
“왜요?”
“방금 황후를 만났어요.”
“아.”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
“어차피 에르단 황자가 잘 대응한 거 아닙니까? 당신은 하녀 복장이고…… 딱히 문제가 됐을 것 같진 않군요.”
“…….”
에슬린은 가만히 테베트를 응시했다.
그가 하는 말은 물론 맞는 말이었다. 황후가 일개 하녀를 일일이 기억할 리도 없고.
하지만 이 기분은 대체 뭐지?
“볼일이 끝났다면 돌아가죠.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습니다.”
테베트가 에슬린의 손을 잡으려다 그녀의 손에 든 자료를 발견했다.
“연구서?”
“아, 필요할 것 같아서요. 다시 확인해야 할 것도 있고.”
그는 살짝 눈썹을 들었다 내렸다. 시선이 저절로 캄캄한 황녀궁으로 향했다.
“그게 당신이 황녀로 인정받는 일에 필요한 겁니까?”
황녀의 몰락을 드러내듯 무거운 쇠사슬이 걸린 유령궁이 보였다.
어둠에 잡아먹혀 그 자체만으로 쓸쓸하고도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에슬린의 집.
“아뇨. 그런 것보다…….”
에슬린은 단조로운 투로 중얼거렸다.
“더 의미 있는 걸 할 거예요.”
“당신이 돌아오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라.”
“……하지만 그조차도 과연 잘될지.”
그녀의 시선이 황후가 떠난 자리에 머물렀다. 테베트는 그 시선의 의미를 빠르게 눈치챘다.
“말했잖아요.”
“…….”
“황후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모후께선 만만한 인물이 아니에요.”
에슬린은 원래 차근차근 황궁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확실하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
하지만 멍청한 카르단이 사고를 쳤다.
황태자 임명을 서두르기 위해 황제에게 독을 먹인 것이다. 바람 앞의 촛불이던 황제는 이제 그 초의 밑동마저 잘린 신세가 됐다.
황제는 틀림없이, 빠른 시일 내로 죽을 것이다.
그건 에슬린의 귀환에 시간제한이 생겼음을 의미했다.
“황후는 당연히 당신을 인정할 겁니다.”
“그러니까 뭘 믿고 그렇게 확신해요?”
에슬린이 물었다. 그가 피식 웃으며 앞을 응시했다.
먼 하늘을 보며 무언가를 더듬어 보는 듯했다.
“당신 어머니가 아닙니까.”
“…….”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천천히 앞을 응시했다.
하얀 달빛을 눈에 담자, 조금 전 황후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러니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당신을 알아줄 겁니다.”
그 말을 듣자 비로소 확신이 생겼다.
테베트가 말한 대로, 황후를 더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황후가 제 어머니여서가 아니라.
“……그래요. 그렇겠네요.”
테베트 리페리우스가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고 있어서였다.
* * *
테베트는 밤공기를 맞으며 황녀궁 밖에 서 있었다.
에슬린은 이제 막 황녀궁으로 들어간 참이었다.
온몸의 신경을 날카롭게 벼리고, 주변을 경계했다.
사실 황녀궁 안이든 밖이든, 그녀를 지키는 데에 큰 상관은 없었다.
테베트는 단지 에르단 황자를 마주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에슬린의 염려 어린 시선을 받는 걸 보면, 분명 속이 뒤틀리고 말겠지.
그럼 또 빈정거리는 말이 튀어 나갈 것이고, 그럼 또 에슬린이 제게 실망을…….
“누구냐.”
테베트가 나무 뒤에 선 인물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상대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바람이 구름을 밀고, 달빛이 공간을 비추자 놀란 얼굴의 여인이 보였다.
“리페리우스 공작?”
테베트는 미간을 구기며 빠르게 검을 갈무리했다.
“폐하.”
제국의 황후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웬만한 일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 얼굴이 모처럼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시녀도 없이.”
테베트가 황후의 근처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었다.
아주 먼 곳에서 호위의 기척이 느껴졌다.
‘저 거리에서 무슨 호위를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그는 짧게 혀를 차다, 문득 황후가 그렇게 지시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에 빠져 산책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군. 그러는 공작이야말로 이곳에 무슨 일이지?”
“전시 상황이 아닙니까.”
테베트는 짧게 대꾸했다.
황후가 그런 남자를 천천히 훑었다.
그는 제국의 황후 앞에서도 거리낄 것 없다는 기색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생태계에선 황후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남자는 제 기운을 딱히 정돈하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사납고도 무심한, 어쩌면 조금 깔보는 듯한 날것의 눈빛이 황후를 거침없이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짧은 정적을 깨며 황후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자네 결혼이 영 진척이 없는 느낌인데.”
주변 경계에 촉을 세우던 테베트가 그제야 황후에게 집중했다.
“또 출전까지 해야 한다니. 아쉽진 않은가?”
탐색하는 듯한 말투.
테베트는 픽 웃고 말았다.
“……심술 맞은 건 모녀가 똑같군.”
“뭐라고 했지?”
다시 고개를 돌려 황후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렇게 만난 건 차라리 잘된 일이다.
따로 독대를 청할 수고를 덜지 않았는가.
“아쉬울 리가 있겠습니까.”
테베트는 나무에 등을 기댔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자 까만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 흩어졌다.
“그런 식으로 제 기억이 어디까지 돌아왔는지 떠보시느라 골치 좀 아프셨겠습니다.”
“자네 설마……?”
테베트는 기억을 잃고 수도로 돌아와 황후와 독대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럼 자네와 나의 약속도…….’
‘무슨 말씀이십니까?’
‘…….’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여인은 역시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능숙하게 둘러댔다.
‘자네가 마물 전쟁을 일단락하면, 좋은 결혼 상대를 찾아 주겠다는 약속이었지.’
“결혼을 핑계로 절 참 부지런히 불러 대셨더군요.”
마치 어디까지 기억이 돌아왔는지 감시하는 사람처럼.
진짜 결혼시킬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