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역시 기억을 찾은 건가?”
“예.”
그는 딱 잘라 대답했다.
황후의 입이 다시 벌어지기도 전, 테베트가 가로채듯 덧붙였다.
“당연히 기억합니다, 그 약속.”
황후가 살짝 비틀거렸다.
“그것참…… 다행이군.”
그녀는 감정을 추스르듯 깊게 호흡했고,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동요를 보인 시간은 아주 찰나였다.
“그래서? 약속을 지킬 수 있겠는가?”
나직한 목소리에 테베트는 별소릴 다 듣겠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폐하. 전 못 지킬 약속은 하지 않습니다.”
그때 황녀궁 내부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에슬린이 밖으로 나오려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황후를 응시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지금처럼.”
목소리가 더욱 낮게 깔렸다. 웅웅대는 겨울바람과 섞여 어쩐지 몹시 음산하게 들렸다.
“공정한 관찰자 행세만 잘해 주시면 됩니다.”
“…….”
황후는 가라앉은 시선을 보냈다. 팽팽한 대치 끝, 먼저 몸을 돌린 건 황후였다.
“여전히 무엄하군.”
스윽, 두껍고도 긴 겨울 망토가 바닥을 쓸었다. 나뭇잎과 흙이 묻어 끝단이 조금 엉망이었다.
“아, 기다리십시오.”
테베트가 돌아가려는 황후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는 별안간 몸을 숙여 황후의 흐트러진 망토를 정리해 주었다.
“이런 예의도 차릴 줄 알았나?”
테베트는 재미있는 걸 들었다는 듯 픽 웃을 뿐이었다.
동시에 끼이익, 황녀궁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떠날 타이밍을 놓친 황후가 딱딱하게 굳었다.
“에슬린이 불안해해서.”
그는 가벼운 어조로 속삭인 뒤 모습을 감추었다.
“하.”
홀로 남은 황후는 곤란한 숨을 내쉴 뿐이었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조심스럽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쌍둥이의 기척이 느껴졌다.
“…….”
에르단과 함께 차분한 얼굴을 한 하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은 먼발치에서 몇 번 본 게 전부이니,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황후는 망토 자락을 움켜쥐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마른 풀과 나뭇가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타인의 기척을 느낀 건지 하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보니 황후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에르단,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
사실은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에르단?”
오랜만이구나, 에슬린. 하고.
* * *
며칠이 흘렀다.
에르단은 바로 남부로 떠났다. 그를 격려하고자 에슬린은 편지와 몇몇 물건들을 보내 주었다.
저택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코앞으로 다가온 전쟁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코앞에 있는 황태자 임명식 때문이었다.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불편한 곳이 있으신가요?”
“아니, 없어.”
“그럼 시간이 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 속 자신이 어쩐지 낯설었다.
차분한 네이비색 드레스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어깨를 감싼 하얀 털 장식은 계절과도 잘 어울렸고, 적당히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을 반만 틀어 올려, 나머지가 굽실굽실 가슴 아래에서 흔들렸다.
‘왠지 어색한데.’
드레스에는 그 흔한 주머니 하나 없었다. 문득 불편하기 짝이 없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다.
문이 다시 열렸다.
인기척이 느껴지고, 부드러운 손길에 몸이 돌아갔다.
“당신이 아름다운 건 알았지만 오늘은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군요.”
테베트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탕발림이 지나치시네요, 리페리우스 공작.”
그렇게 말하는 테베트야말로 함부로 시선 주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가 못마땅한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아침부터 제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하는 건 아닐 테고. 제가 또 뭔갈 잘못했습니까?”
“설마.”
에슬린은 매끄럽게 웃었다.
테베트가 그런 에슬린의 목선에 입술을 댔다. 장난스러운 입술이 그녀의 귀를 타고 턱선, 입꼬리까지 도달했다.
에슬린은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
“간지러워요.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
그가 빤히 응시했다.
“테베트 경.”
졌다는 듯 에슬린이 속삭였다. 그러자 비로소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떨어져 나갔다.
테베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근사했다.
매끄러운 흑발을 반만 쓸어 넘겨 나머지가 보기 좋게 이마 위에서 흐트러져 있었다. 그 덕에 한쪽만 드러난 눈썹과 눈매 끝에 난 점이 유독 두드러졌다.
금장 달린 케이프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물결쳤다. 허리춤에 찬 장검이 철컥거리는 소리는 내는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이것도 잘 어울리는군요.”
테베트가 에슬린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귀에는 잃어버린 연보랏빛 다이아몬드 귀걸이 대신, 다른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선물을 잃어버려서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그에겐 귀걸이 한쪽을 로하르트에게 빼앗겼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테베트는 상관없다는 얼굴로 다시 장인을 불러들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귀한 보석이 세상에 또 존재할 리 만무했다.
“귀걸이는…… 제가 반드시 로하르트에게서 돌려받을 거예요.”
“또 만나겠다는 소립니까?”
“그럼 안 만나요?”
“…….”
테베트는 잠시 침묵했다. 어쩐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개수작을 부리는군.”
그가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굳이 만날 필요 없습니다. 더 귀한 보석을 찾아오라고 할 테니까요.”
“그런 식으로 수도 장인들을 괴롭히지 말아요.”
“그들도 영광일 겁니다. 당신 귀에 걸 보석을 세공하는 거니까. 황녀의 귀걸이를 만들었다고 유명해질지도 모르죠.”
에슬린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테베트가 그런 그녀를 보며 가볍게 귓불을 꼬집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모든 건 당신 뜻대로 될 테니까.”
황녀궁에 다녀온 이후, 에슬린은 더 이상 황후를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 안 되면?”
“말했잖아요? 당신이 실패해도 제가 곁에 있을 거라고.”
에슬린은 미소 지었다. 다른 건 믿을 수 없어도, 테베트만큼은 믿을 수 있었다.
“좋아요.”
“그럼 슬슬 가죠.”
테베트가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1황자에게 잊지 못할 하루가 될 겁니다.”
에슬린은 그 손을 가볍게 잡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화사하게 웃었다.
“아무렴요.”
오늘은 카르단 베르타니아의 황태자 임명식 날이었다.
* * *
임명식은 엄숙했다.
짧은 기간 동안 빠르게 준비한 것치고, 꽤 그럴싸한 외관이었다.
황제가 병석인 관계로 모든 절차는 황후가 주관했다.
카르단은 처음부터 끝까지 싱글거리는 얼굴이었다.
에르단 황자는 참석하지 못했다.
쫓겨나듯 남부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명목상 남부의 지원 총괄로 가는 것이었지만, 모두가 알았다.
카르단이 거슬리는 2황자를 치워 버린 것이라는 걸.
남부로 향하는 길에는 도적이 들끓었다. 과연 그 섬약한 황자가 남부에 무사히 도착이나 할 수 있을까?
“이제 신전으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전하.”
임명식을 책임지고 있는 행정관이 말했다.
그 또한 카르단의 사람이었다. 이제 이 궁에는 카르단의 사람이 아닌 자가 없었다.
행여 있다고 한들, 에르단처럼 치워 버리면 될 뿐.
“그래, 신전이라고? 마지막 절차였지?”
“예. 황궁에서는 그게 마지막입니다. 이후엔 궁 밖에서 가벼운 행진만 하시면 됩니다.”
“쯧, 귀찮게.”
“백성이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저까짓 것들이 뭐라고 기대를 해?”
행정관은 대답하지 않고 허리를 굽혔다. 불쾌한 표정을 짓던 카르단은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건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됐다. 뭐, 모처럼 기분이 좋으니.”
뭐라도 해 올 줄 알았던 에슬린은 의외로 잠잠했다. 궁 밖으로 암살자들을 보내 놨으니 곧 그 머리를 가져올 것이다.
손에 박힌 가시 같던 에르단도 치웠고, 레실리아도, 모리어스 후작도 조용했다.
‘레실리아…….’
그는 잠시 레실리아를 떠올렸다.
어차피 이혼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혼장을 들이밀면 다시 협박하면 된다.
‘제가 감히 날 떠나 어떻게 살겠어?’
하지만 자꾸 단호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괜스레 가슴이 묵직해지는 것 같았다.
‘됐어. 좋은 날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 완벽한 날을 레실리아 생각으로 날릴 순 없었다.
카르단은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를 모신 곳을 나왔다.
신전으로 향하는 마차가 출발했다.
“신전에선 뭘 하면 되지?”
“황후 폐하께 후계자의 징표를 받으시고, 귀족들의 인사를 받으시면 됩니다. 마우시스 신의 축복을 받는 건 가장 마지막입니다.”
“……신의 축복이란 건 뭐야?”
“말 그대로, 축복입니다. 대마법사가 신의 말씀을 전할 겁니다.”
대마법사인즉, 대사제와도 같았다.
베르타니아 제국에서 마법은 신의 힘 중 일부를 끌어 쓰는 것으로 통했기 때문이었다.
카르단은 문득 불안해졌다.
“그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나?”
그러자 행정관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설마요. 자격이 없는 자라면 몰라도, 그럴 일은 없습니다.”
“자격?”
“예. 뭐 예전엔 성배에 성수를 흐르게 해야 한다는 둥…… 그런 전설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대마법사가 계시문을 몇 줄 읊는 정도일 겁니다.”
카르단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러모로 성배를 없애라고 하길 잘했지.’
그나저나 계시문은 뭐지? 역시 신전 대마법사도 협박해 둘 걸 그랬나?
하지만 행정관은 그저 절차일 뿐이라고 말했다. 카르단은 찜찜했지만 넘어갔다.
어차피 이미 황태자는 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