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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17화 (117/147)

117화

‘여차하면 대마법사 또한 죽이면 될 일.’

말 여섯 필이 이끄는 거대한 마차가 빠르게 신전에 도착했다.

커다란 아치문을 넘어서자마자 대신전을 꽉 메우고 도열한 귀족들이 보였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분위기는 장엄했다.

저 멀리 황후가 높은 제단에 서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보다 낮은 곳엔 레실리아도 있었다.

“…….”

카르단은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전율이 일어 정수리가 오싹거렸다.

이 광경이다.

이 광경을 꿈꾸고 있었다.

이들을 제 발밑에 두는 날을, 지금껏 얼마나 고대해 왔던가?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전하.”

“무슨 일이냐?”

“송구합니다만…… 리페리우스 공작께서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뭐?”

“아무래도 전쟁이 얼마 남지 않아, 이래저래 일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카르단의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시종이 움츠린 얼굴로 속삭였다.

“그, 그래도 오시기는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그만, 그만! 쯧. 좋은 날에 하여튼 초 치기는. 행정관! 귀족 몇이 없는 게 절차에 문제가 되겠는가?”

“아뇨. 오시기만 한다면, 늦는 건 딱히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 알아서 하라고 해!”

카르단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는 귀족들을 스치고 지나가 제단 위로 올라갔다.

붉은 벨벳 망토를 걸친 황후가 앞으로 나섰다.

카르단은 무릎을 굽힌 채 황후의 눈을 바라보았다.

카르단이 먼저 인사했다.

“베르타니아에 영원한 영광을.”

황후는 카르단에게 찬란한 금색 고블릿을 건넸다.

나직한 응답이 뒤따랐다.

“다음 세대에 새로운 영광을.”

카르단은 고블릿을 받아 들었다. 성배를 모방해 만든 금속의 감촉은 써늘했다.

정작 그는 고블릿에 별 관심이 없었다.

‘모후께서 쥐고 있는 그 황금 홀이야말로 곧 내 것이 될 것입니다.’

그의 시선이 탐욕스럽게 황후의 왼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진짜 황제의 상징.

반드시 저걸 손에 쥐리라. 이딴 가짜 성배는 필요 없어.

“귀족들은 마우시스 신 앞에서 황자 전하께 인사를 올리시오.”

집행관이 엄숙히 말했다.

그의 측근들부터 시작해 차례로 귀족들이 앞으로 나섰다.

큰 절차는 아니었다. 오히려 카르단은 이 이후에 있을 대마법사의 축복이 더 걱정이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전하.”

이곳에 참석한 귀족 중 대부분이 카르단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었다.

강제든, 강제가 아니든.

그들은 공손한 태도로 카르단의 성배에 술을 채웠다.

“옆에 놓인 분수에 술을 흘리시면 됩니다.”

집행관이 속삭였다. 카르단은 성배의 술을 분수에 흘려 넣었다.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신에게 바칠 성수를 흐르게 한다는 의미였다.

“오오!”

마법의 힘이 번쩍였다. 카르단의 어깨 정도까지 오는 작은 분수에서 푸른 액체가 넘실거렸다.

절차는 엄숙하게 이어졌다.

귀족들은 그에게 술로써 지지를 보냈고, 술은 분수를 타고 끊임없이 흘렀다.

“카르단 전하.”

“어서 오시오, 프레이 백작.”

프레이 백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카르단의 성배에 술을 채웠다.

그는 어느새 카르단의 최측근 귀족 중 하나로 떠오른 이였다.

사실 ‘떠올랐다’는 건 조금 어폐가 있었다. 프레이 백작은 처음부터 카르단의 최측근이었다.

그는 카르단의 승계가 확실시되자마자, 백작령에서 올라와 수도 타운 하우스에 자리를 잡았다.

“축하드립니다.”

“고맙군.”

문득 백작의 시선이 뒤쪽 언저리를 헤맸다. 돌아보니, 그의 첫째 아들이 뚱한 얼굴로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서 있었다.

카르단이 픽 웃었다.

“이런. 백작의 아들이 신전에 돌아온 줄은 몰랐는데…… 장남 걱정에 꽤나 잠을 설치겠어.”

“장남은 무슨. 가문의 수치일 뿐입니다.”

백작은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프레이 백작이 멀어지고, 카르단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주변에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백작 다음으로 인사를 청한 인물이 아주, 아주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젤킨스…… 자작?”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로하르트는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었다.

조르륵. 그의 성배에 술이 채워졌다. 술을 따르는 손에 흰 붕대가 감겨 있었다.

카르단은 인상을 구기며 눈앞의 인물을 훑었다.

저 머저리가 여긴 왜 왔지?

“제가 여긴 왜 왔는지 궁금하신 눈빛인데.”

로하르트의 한쪽 귀에 영롱한 연보랏빛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의 레몬빛 머리카락과 놀랍도록 잘 어울려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당연히 축하를 드리기 위해서죠. 앞으로 황자 전하, 아니 황태자 전하께서 이 황궁 최고 권력자 아니십니까.”

로하르트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잘 보이려고.”

카르단은 헛웃음 쳤다.

이걸 뭐 좋다고 해야 할지, 싫다고 해야 할지.

그는 그야말로 한량과 다름없는 귀족이었다. 영지의 운영마저 돈 주고 고용한 경영인에게 맡겨 놓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무엇보다 한때 에슬린의 측근이던 인물이다.

‘이제 와 내게 충성하겠단 건가? 뭘 믿고?’

카르단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가소롭긴. 지저분하게 아부하는 꼴이라니.”

“그래서…… 안 받아 주시는 겁니까?”

로하르트가 눈썹을 안타깝게 기울였다. 그가 따른 술이 찰랑였다.

‘저것도 귀족 나부랭이라고.’

카르단은 못마땅한 얼굴로 성배에 손을 뻗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절차는 계속되어야 했다.

그때였다.

“안 받아 주신다니 어쩔 수 없네요.”

로하르트가 덥석 성배에 손을 댔다. 그리고 누가 말릴 틈도 없이.

“크.”

그 안에 든 술을 홀라당 마셔 버렸다.

“뭐, 뭐…… 뭐 하는!”

“썩 맛있진 않군요?”

“로하르트 님!”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행정관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로하르트 님! 엄숙한 임명식을……!”

“대체 무슨 짓이야!”

카르단이 소리쳤다. 황후도, 그것을 지켜보던 레실리아도, 저 멀리 디에리안의 얼굴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로하르트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주변에 망연히 선 시종에게 그가 손을 흔들었다.

“입 헹굴 것 좀 가져와라.”

“로하르트 젤킨스!”

카르단이 씨근덕댔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로하르트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거절하신 거 아니셨습니까?”

그러곤 앞에 놓인 비단보를 집어 혀를 닦았다.

“영 썩은 맛이 나네.”

주변의 웅성거림이 절정에 달했다. 귀족들은 물론 시중을 들던 사용인들, 주변을 지키던 기사들까지 모두 기함하여 단상을 바라보았다.

카르단은 콧김을 내뿜었다. 창피함으로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감히 내 성스러운 임명식을 방해하다니! 여봐라! 이자를 당장, 당장 엄벌에……”

“전하! 전하-!”

“넌 또 뭐야!”

“큰일 났습니다!”

갑자기 달려온 시종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뭔데! 별일이 아니면 죽여 버리겠다!”

“모리어스 후작이……!”

“뭐?”

문득 석고상처럼 서 있는 레실리아의 옆얼굴에 시선이 갔다. 그러고 보니 후작은?

“모리어스 후작이 기사단을 이끌고 신전으로 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게다가…….”

“게다가 뭐!”

“리, 리페리우스 공작과 함께입니다!”

카르단의 숨이 멈추었다. 차마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오호.”

방만하게 서 있던 로하르트의 입술이 치켜 올라갔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고블릿을 휙 쓰러뜨렸다.

챙그르르. 금색 잔이 테이블을 뱅글뱅글 돌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로하르트가 가볍게 뒤돌아 단상을 내려갔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네.”

산뜻한 혼잣말과 함께였다.

카르단은 이제 로하르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미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모리어스가 리페리우스와 함께 신전으로 오고 있다고? 기사를 이끌고?

“대체 왜!”

밀랍 같은 낯빛을 한 레실리아를 보았다. 꽉 잡은 드레스 자락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웬 소란이냐?”

잠자코 있던 황후가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후!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시종은 무슨 일인지 똑바로 보고하라.”

황후는 무섭도록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시종이 잔뜩 몸을 움츠렸다.

“예, 예, 폐하. 그러니까 리페리우스 공작과 모리어스 후작이 기사를 이끌고 신전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왜지?”

“그, 그게…….”

“…….”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한 범인을 체포한다면서…….”

시종이 질끈 눈을 감았다. 차마 입에 담기에도 참담하다는 표정이었다.

실내는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하지만 잠시였을 뿐, 길길이 날뛰는 카르단에 의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뭐라고? 네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카르단, 소란이 과하구나.”

“하, 하지만 모후!”

황후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여인이었다. 웬만한 혼란에도 그녀는 쉽게 동요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는 병환이 갑작스레 악화하여 쓰러지신 것이다. 대체 무슨 황망한 소리냐?”

“저, 저는 그저 전언을 전한 것뿐입니다…….”

시종은 벌벌 몸만 떨었다. 황후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리페리우스 공작과 모리어스 후작을 기다려 봐야겠군.”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카르단이 불안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고집스럽게 앞을 응시하고 있는 레실리아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전 입구가 어수선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히이잉. 말이 우는 소리와 함께 기사들의 철컥거리는 소리가 분주하게 울려 퍼졌다.

문지기가 크게 소리쳤다.

“리페리우스 공작님과 모리어스 후작님께서 드십니다!”

이름만으로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들이었다.

내부를 메운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두 귀족의 등장을 기다렸다.

“그, 그리고…….”

“……?”

또 등장할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귀족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문지기가 단말마의 비명처럼 외쳤다.

“에슬린, 베르타니아 화, 황녀님께서 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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