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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18화 (118/147)

118화

저 문지기가 드디어 미쳤구나.

귀족들은 귀족대로, 사용인들은 사용인대로 눈을 끔뻑이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

그렇다는 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말인데.

“누가…… 왔다고?”

카르단이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걸 시작으로 웅성거림이 퍼져 갔다.

“……무, 문지기가 미쳤나 보군.”

“에르단 전하를 잘못 말한 거 아니야?”

“하지만 에르단 전하는 남부에 가셨는데!”

철컥, 철컥.

기사들 특유의 쇳소리가 신전을 울렸다.

웅성대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수백 쌍의 눈동자가 입구를 응시했다.

곧 모리어스 후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

짧은 탄성이 터졌다.

모리어스 후작 뒤로, 리페리우스 공작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몹시 정중한 손길로 누군가를 이끌고 있었다.

‘누군가’를.

“로즈벨……?”

하녀들 사이에 탄식처럼 그 이름이 떠돌았다.

“황자비궁 하녀 로즈벨 아니야?”

그러나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저게 로즈벨이 맞나?

로즈벨은 하녀였다. 아름답지만 늘 조용하고, 조금 똑똑한 것 같지만 과하게 튀지 않는. 찾아보면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저 그런 황궁 하녀.

그러니 저런 위엄 있는 얼굴을 한 여자를 함부로 로즈벨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저건 그들이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시선을 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아주 잘 아는 인물처럼 보였다.

몸짓 하나, 내딛는 걸음걸이 하나마다 무시할 수 없는 기품이 흘렀다.

창백함에 가까운 흰 피부. 그와 대조되는 짙푸른 눈동자는 단 한순간도 흔들린 적이 없어 보였다.

타고나길 지배자로 난 듯한 육식 동물의 눈빛이 또렷이 단상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걸을 때마다 곧게 뻗은 허리와 목선을 타고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 움직임마저도 계산된 어떤 장치인 양 보여, 모든 이들은 그저 영혼을 빼앗긴 얼굴로 무력하게 에슬린을 응시해야만 했다.

황녀.

모두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사람들은 이상하게 제 집으로 돌아온 나른한 포식자를 맞닥뜨린 기분이 들었다.

에슬린이 단상 아래에 섰다.

척, 척, 척. 테베트의 기사들이 뒤따랐다.

귀족들은 혼란과 두려움에 젖은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설 뿐이었다.

딱딱한 고목처럼 선 황후를 바라보며, 에슬린은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

“모후.”

황금 홀을 쥔 황후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이게 무슨, 해괴한 짓거리지?”

잠시 말을 잃었던 황후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녀는 낮은 분노가 느껴지는 얼굴로 에슬린 주변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대답해 보시오, 리페리우스 공작, 모리어스 후작. 이게 무슨 짓이오?”

“폐하, 실은……”

모리어스 후작이 입을 열었을 때, 털썩. 누군가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새파란 안색의 카르단이었다.

“하…… 하하. 그래, 그런 거였군. 리페리우스와 모리어스를 뒤에 업고…… 레실리아가 그래서…….”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시종이 그를 부축했으나 혼이 빠진 카르단은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씨근거리는 황자의 숨소리 외에 사위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단상 위에 선 카르단과 황후.

그 아래에 선 에슬린.

황후가 에슬린을 직시하며 다시 입술을 떼었다.

“넌 대체 누구길래 감히 황녀 행세를 하느냐?”

“폐하, 모르시겠습니까? 에슬린 전하십니다.”

모리어스 후작이 말했다.

그 이름에 카르단이 발작처럼 소리쳤다.

“말도 안 됩니다! 모후! 당장 저 미친 여자를 끌어내야 합니다!”

“…….”

하지만 어쩐지 황후는 침묵했다. 입술을 달싹일 뿐, 말을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다.

보다 못한 카르단이 벌떡 일어나 날뛰었다.

“당장 끌어내라! 끌어내라고!”

멍하게 서 있던 황궁 기사들이 그제야 움직였다. 검을 뽑아 들고 에슬린을 겨누었다.

“전하께 무슨 무례냐!”

그들을 막아선 건 리페리우스의 기사들이었다.

“뭐?”

“황궁 기사 주제에 감히 황족을 겨누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

황궁 기사들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뭐야? 대체 뭐지?

대치하고 선 리페리우스 기사들의 얼굴이 너무나 확고했다.

정말 황녀 전하란 말인가?

그때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남자가 한 발짝 나섰다. 황궁 기사들의 얼굴이 더욱더 납빛으로 물들었다.

남자는 황녀를 보호하듯 서며 제 검 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 이상 다가온다면, 내가 이 검을 뽑는 모습이 너희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 될 것이다.”

“…….”

그들은 리페리우스 공작을 아주 잘 알았다. 그 또한 기사였다.

그렇기에 저 말이 단순한 허세나 위협이 아님을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었다.

잘못 움직였다간 다 죽는다.

꿀꺽, 누군가 요란하게 침을 삼켰다.

테베트의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그 위를 하얀 손이 가로막았다.

“물러서요, 공작.”

테베트는 에슬린을 슬쩍 돌아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를 훑었다. 지독히 무감한 표정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맹수의 얼굴. 하지만 놀라운 건,

“예, 전하.”

그 맹수의 목줄을 쥔 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각하께서 저 여잘 ‘전하’라고 부르신 거야?”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리페리우스는 중립 가문이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에슬린을 황녀 대하듯 한다. 어느 곳에도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남자가…….

그러니 그 말의 무게는 그 누구의 것보다 묵직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테베트는 제 손등을 빠르게 뒤집어 그 위에 얹은 에슬린의 손을 몰래 한 번 꽉 잡았다. 짧은 순간 시선 교환이 일어났다.

“…….”

에슬린은 테베트를 저지하고 앞으로 나섰다.

두려움에 떨던 황궁 기사들이 하나둘 저절로 몸을 물렸다.

깨끗해진 시야로 황후의 얼굴이 들어왔다.

저를 보는 황후의 눈빛에 흔들림이라곤 없었다.

며칠 전 황녀궁에서 짧게 스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간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사정이 있어 리페리우스에 몸을 의탁하며 지냈죠.”

“…….”

“제가 이 자리에 나선 이유는…… 우리 제국의 안위가 달린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황후는 칼날 같은 시선을 던졌다.

“베르타니아의 안위라고?”

“네.”

“그 말을……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지?”

황후는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에슬린은 딱딱한 권력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 순간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폐하.”

“프레이 백작.”

그는 귀족이라는 단어를 통째로 집어삼킨 것 같은 인물이었다.

냉랭하고도 건조한 시선이 에슬린을 훑었다.

“아무래도 정신 나간 여인이 난동을 부리는 것 같은데, 귀담아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당장 쫓아내심이 옳습니다.”

듣고 있던 모리어스 후작이 윽박지르듯 말했다.

“무엄하오, 프레이 백작.”

“모리어스 후작님, 후작님이야말로 무엄하십니다. 이 자리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황녀 전하라니요.”

백작이 싸늘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탁! 들고 있던 지팡이를 한 번 내리쳤다.

“그분은 돌아가셨습니다.”

홀린 듯 지켜보던 사람들이 번쩍 정신이 든 표정을 지었다.

“백작.”

에슬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명백한 하대에 프레이 백작의 윗입술이 꿈틀 움직였다.

“믿기 어려우면 믿지 않아도 돼. 그대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내가 에슬린 베르타니아가 아닌 것도 아니니 말이야.”

“감히 네가 건방진…….”

백작이 위협적으로 한 발자국 다가서자, 테베트가 몸을 비틀어 그를 막았다.

에슬린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모후.”

“…….”

“의혹을 밝히게 해 주십시오. 이건 제 정체를 파헤치는 것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황후는 에슬린과 프레이 백작을 번갈아 가며 내려다보았다.

“얼토당토않은 소립니다! 폐하!”

그녀는 과연 누구의 입을 열게 할 것인가?

“제 정체에 대해선, 이 이야기를 들으신 후 추궁하셔도 늦지 않으실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후 추궁하라?”

“예. 눈앞의 불부터…… 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윽, 에슬린은 티 나게 단상 위 카르단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의 방향을 확인한 프레이 백작이 부르르, 볼을 떨었다.

“카르단 전하! 왜 가만히 계시는 겁니까?”

“그, 그게…….”

갑자기 이름이 불리자 카르단은 냉수 맞은 사람처럼 굴었다.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은 채였다.

“그러니까…….”

프레이 백작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는 아주 뛰어난 감을 가진 자였다.

카르단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허옇게 질린 얼굴을 보자 그 감은 예외 없이 발동했다.

“설마, 진짜로…….”

혼잣말처럼 흐른 목소리에 카르단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했다. 냉랭한 시선을 받자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었다.

황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 누구냐! 너는 대체 누군데 이딴 미친 짓을!”

황급히 고함쳐 보지만, 예리한 정치가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

프레이 백작은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일단 입을 다물었다.

“황후 폐하.”

지켜보던 테베트가 황후에게 마지막 명분을 얹어 주기로 했다.

“리페리우스 공작.”

“리페리우스는 베르타니아를 위해 헌신해 온 가문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겁니다.”

“물론……”

황후와 테베트 사이에 날카로운 시선 교환이 일어났다.

“잘 알지.”

에슬린은 옆에서 그런 두 사람을 지그시 관찰했다.

“제가 베르타니아에 해가 되는 일을 벌일 리 없지 않습니까?”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황후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어딘가를 응시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황후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과연 에슬린이 이 사태를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지.

“좋다.”

“모후!”

카르단이 발작하듯 소리쳤으나, 황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의혹이 대체 무엇인지 들어나 보자.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단 말이냐?”

창처럼 예리한 시선이 꽂혔다.

그 시선을 기꺼이 맞받으며, 에슬린은 나직이 목소리를 냈다.

“이곳에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한 범인이 있습니다.”

주변이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뭐라!”

“그, 그러고 보니 아까 시종이 그렇게 얘기했었……!”

휙, 황후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웅성거림이 삽시간에 멎었다.

“폐하께서는 갑작스레 병환이 악화하신 것뿐, 음독이 아니다. 황궁 의원 일곱이 그렇게 확인했는데, 그게 틀렸다는 말이냐?”

“체내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서서히 죽이는 독이라 들었습니다.”

“그런 편리한 독이 대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이냐?”

“그건 범인에게 물으셔야겠죠.”

“…….”

황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래서.”

되묻는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누구지? 네가 말하는 그 범인이란 게.”

그러자 멍하게 대화를 듣고 있던 카르단이 소리쳤다.

“모후! 개소리입니다! 당장 저것들을……!”

“저기서 황태자 임명식을 치르고 있는.”

에슬린은 가볍게 팔을 뻗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는 하얗게 질린 얼굴의 황자가 있었다.

“카르단 베르타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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