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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19화 (119/147)

119화

“뭐라고!”

귀족들 틈에서 믿을 수 없다는 탄식이 터졌다. 그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돼!”

웅성거림은 점점 더 몸집을 불려 나갔다.

이를 까득 악문 카르단이 발을 쾅쾅 굴렀다.

“닥쳐! 닥치라고!”

에슬린은 눈동자만 굴려 카르단을 응시했다.

“네가…… 기어코 나를……! 모후! 저 개소리를 더 들으실 겁니까?”

카르단이 시뻘게진 얼굴로 황후에게 소리쳤다. 당장 저 입을 막으라는 황자의 패악이 이어졌다.

황후는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카르단…… 그럼 넌 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대로 넘기겠단 것이냐?”

“그건!”

“너도 억울할 텐데, 이 자리에서 누명을 벗어야지. 안 그래?”

“그러니까 그게……!”

카르단은 잘근잘근 입술을 물었다.

그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신없이 주변 귀족들 눈치를 살폈다.

다시 에슬린이 나섰다.

“제게 이 소식을 전한 건 모리어스 후작입니다. 후작, 한 번 더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전하.”

모리어스 후작이 공손한 얼굴로 에슬린에게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단상 한켠을 응시했다. 주름진 눈이 우묵하게 깊어졌다.

“레실리아, 괜찮겠느냐?”

곧 쓰러질 듯, 창백한 얼굴을 한 레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카르단의 얼굴에 깨달음이 스쳤다.

“……하.”

그런 거였군. 기어코 레실리아가 후작을 움직인 거였어!

‘하지만 어떻게?’

레실리아의 궁은 모두 뒤졌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했다.

드나드는 편지나 물건들까지 탈탈 털어 검열했다.

‘그동안 황자비궁을 드나든 건 고작 음식 재료나 와인, 장작 같은 것들뿐이었어…….’

와인 병이 좀 많았던 것 같긴 했지만…… 그는 문득 생각하곤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었다. 카르단이 주먹을 내질렀다.

“증거! 증거를 가져와!”

레실리아의 궁 어디에도 독약 병은 없었다. 걸레짝 하나까지 모두 들춰 보았으니 확실하다.

카르단은 그래서 당당했다.

“지금 증거도 없이 이러는 것은 아닐 테지?”

“물론 있습니다.”

“뭐?”

후작은 천천히 품 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분명…… 없었는데?

“독약이 들어 있던 병입니다. 이걸 호수에 버리셨더군요, 전하.”

“내가 그걸 버렸다고? 거짓말하지 마!”

카르단은 강하게 반발했다. 후작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볼 뿐이었다.

그때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버지의 말씀이 맞아요.”

“레실리아.”

“카르단 전하께서 절 찾아와 빈 독약 병을 내미셨어요. 저기 계신 황녀 전하께 죄를 덮어씌우라면서…… 그 독약 병을 제게 주셨어요.”

에슬린을 가리키는 레실리아의 고운 손이 상처투성이였다. 카르단은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챘다.

유리병에 가느다란 실이 매여 있었다.

어딘가에 묻어 놓고 다시 꺼낸 것 같은 흔적.

“레실리아……! 네가 날, 결국. 결국!”

“카르단, 사실이냐?”

황후가 물었다. 카르단은 그야말로 벌침 맞은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사실일 리 없지 않습니까! 모함입니다!”

“모함이라고?”

“네! 모리어스 부녀가 아주 절 아주 바닥으로 떨어뜨리려 모함하는 겁니다!”

“……?”

귀족들의 얼굴에 순간 의문이 떠올랐다.

카르단을 따르는 귀족 중 하나가 그 의문을 입에 담았다.

“카르단 전하, 모리어스 후작가는…… 전하의 처가 되시는 곳입니다.”

“근데!”

“전하의 최측근 아닙니까……? 전하의 편을 들어도 모자랄 판에, 왜 전하를 모함하죠……?”

카르단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내가 바람 좀 피운 거 가지고 앙심을 품은 거잖……”

“전하?”

헙, 카르단은 제 입을 틀어막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살얼음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제기랄. 카르단이 뿌득 이를 갈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레실리아를 노려보았다.

“쯧! 이혼을 하려고 별 발악을 다 하는군.”

몇몇 귀족들이 질끈 눈을 감았다.

치명타다. 수군거림이 피어나 곧 실내 전체로 번졌다.

“지금 카르단 전하께서 뭐라고 하신 거야?”

“레실리아 님을 배신한 거야……?”

카르단은 방방 날뛰었다.

“에잇! 그게 지금 중요해? 살다 보면 좀 즐기고, 실수하고 그럴 수도 있지!”

그가 단상 아래를 함부로 삿대질했다.

“거기 당신네들은 뭐, 떳떳하오?”

“…….”

같은 냄새를 풍기는 귀족 몇이 시선을 피했다. 서로를 보듬고 감싸 주며 한때 그들만의 절절함을 뽐내던 이들이었다.

“큼. 커흠.”

어색한 헛기침 소리가 가득했다.

“음. 썩은 맛.”

그 주변에 서 있던 로하르트가 다시 입을 헹궜다. 오물 냄새가 난다며 휘적휘적 몸을 물렸다.

에슬린은 로하르트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사르르 웃으며 붕대 감은 손을 흔든다.

‘쟨 또 뭘 하는 거야?’

있는 줄도 몰랐다. 문득 시선을 돌리니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던 디에리안이 긴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하여튼!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딴 모함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카르단이 날뛰는 바람에 다시 시선은 단상 위로 향했다.

황후가 피곤한 낯으로 물었다.

“그럼 저 독약 병은 무엇이지?”

“모릅니다! 그냥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빈 병 아닙니까? 저게 어떻게 증거가 되죠? 증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증인.

기다리던 말이었다. 에슬린은 드디어 제 차례가 왔음을 깨달았다.

“증인이라면 있습니다.”

“증인이 있다고?”

“카르단이 호수를 깨고 빈 병을 떨어뜨리는 걸 보았다더군요. 황궁 정원사 두 명입니다.”

그럴 리가! 카르단이 씨근덕댔다.

증인을 매수한 것인가? 그건 카르단이 에슬린에게 하려던 짓과 같았다.

그가 시퍼렇게 눈을 치떴다.

“그 정원사들은 어디에 있지?”

황후가 물었다.

“…….”

줄곧 당당하던 에슬린의 표정에 미세한 균열이 갔다. 움찔거리는 입술이 어쩐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돌려 테베트를 마주 보았다. 테베트는 슬쩍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조금 잦아든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모습을 감추는 바람에 지금…… 수배 중입니다.”

“하하! 그거 봐! 마음이 급했군! 증인도 못 잡아 놓고, 뭐?”

“…….”

“그것 보십시오, 모후! 제대로 된 증인도 없이 절 몰아가려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수사할 가치는 있습니다.”

에슬린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황후는 그런 그녀를 무감하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황후는 잠시 멈칫했다.

너도 알겠지만, 이라니.

맹세컨대 의도하고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증거로, 황자를…… 황태자를 모욕하고 이 자리를 엉망으로 만든 죄가 더 크다.”

“아니요, 모후.”

황후는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어느새 귀족들은 물론 기사들, 시종들, 저 멀리 있는 하녀 한 명까지.

모두 에슬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뭘 모른다는 거지?”

“저는 지금 카르단에게 황태자 자격이 있는 것인지. 그 근본을 여쭈고 있는 것입니다.”

“…….”

에슬린은 가볍게 뒤를 돌았다.

그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심해를 닮은 눈동자가 주변을 훑었다. 귀족들이 긴장한 듯 얼굴을 굳혔다.

“그대들에게도 묻지.”

목소리가 나직하게 퍼져 갔다. 부드러우나 힘 있고, 작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해소되지 않은 의혹으로 이 자리를 이 꼴로 만든 카르단 베르타니아에게.”

“…….”

“과연 황태자 자격이 있는 게 맞나?”

그건 아주 교묘한 말이었다.

이 자리를 이렇게 만든 건 에슬린이었다.

“에슬린! 닥쳐! 네가 감히-!”

카르단이 달려들었다. 당연히 주변 기사에 의해 저지당했다. 기사들에게 붙들리고서도 카르단은 한참을 발악했다.

에슬린! 에슬리인!

황후는 약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제야 완전히 깨달았다.

황제 시해는 핑계다.

신전에 난입하고, 발언권을 얻기 위한 핑계.

에슬린이 진짜 원하는 건 황제 시해 미수 사건을 파헤치는 게 아니다.

“허억, 헉…….”

한참을 날뛰던 카르단이 제풀에 지쳐 입을 다물었다. 벌겋게 핏발 선 눈이 에슬린을 잡아먹을 듯 응시하고 있었다.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카르단 전하께서 또 저러시네…….

그런 쑥덕거림은 황궁 기사들 사이에서 나왔다.

기사들은 카르단이 연무장에서 에슬린의 이름을 부르짖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도 저 하녀를 죽일 듯 구셨던 것 같은데.

혹시…… 저 의혹이 사실이라서?

그럼 설마 저 여자의 정체도……

탕, 탕!

뻗어 나가는 생각을 잘라 내듯, 날카로운 타격음이 울렸다. 먼지처럼 퍼지던 소음이 일시에 멎었다.

“황후 폐하 앞에서 경망스럽군.”

프레이 백작이었다.

“…….”

그는 에슬린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깐깐해 보이는 눈매가 순간 경련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알겠다. 황자비 전하께 부정을 저지르고, 감히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했다는 의혹에 휘말린 것만으로도…… 황족으로서 명예롭지 못한 일이긴 하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르단을 보았다. 씩씩대던 카르단이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타앙! 그의 지팡이가 다시 바닥을 짚었다.

백작은 이번에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그것만으로 황태자 자격에 큰 흠결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폐하. 저는 물론이거니와 이곳 귀족들 또한,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공기를 진동시켰다.

프레이 백작은 살짝 몸을 틀어 제 뒤에 선 귀족들을 응시했다.

“안 그렇소?”

날카로운 물음에 귀족들 사이에 짧은 술렁임이 일었다.

“……마, 맞습니다.”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프레이 백작은 카르단 지지 세력의 중심축 중 하나였다. 귀족들은 삽시간에 마음을 정리했다.

어찌 됐건 지금 단상 위에 서 있는 것은, 카르단이 아닌가? 카르단이 무너져선 안 된다.

귀족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황자비 전하 일은 놀랐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자격 문제를 논할 정도인지는…….”

“어처구니없는 근거로 카르단 전하를 모함하다뇨! 말도 안 됩니다!”

“애초에 황자비 전하 일로 모리어스 후작이 카르단 전하께 앙심을 품고 이러는 게 아닙니까?”

참다못한 모리어스 후작이 나서려 했다.

에슬린은 눈빛으로 그를 저지했다.

분노를 참는 후작의 주먹이 벌벌 떨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후작.”

에슬린은 작게 속삭였다.

“남의 고통을 딛고 선 이들에겐 더 큰 고통이 찾아올 테니.”

그렇게 만들겠다는 다짐과도 같은 말. 후작이 입술을 사리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슬린은 말을 보탠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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